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24)화 (24/112)

024.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1)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그렇게 말했을 때, 당연히 딱 다리와 발목으로 절단되는 줄 알았다. 그렇기에 붙이는 건 더 쉬워 재생이 빠를 줄 알았고 그리 생각하며 신발을 벗었는데, 터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미쳐버린 놈이란 걸 간과했다.

심지어 잘린 단면은 깔끔했다. 더 어처구니없을 노릇이다. 시간을 돌린 부작용으로 저만큼이나 머리가 돌아버린 건가 싶기도 했다. 원래 그랬다고 치부하기엔, 루블리안은 정상 범주를 좀 벗어난 정도였다. 저렇게 심하게 미치진 않았다.

내가 빠지니 몬트리오, 알리, 루블리안이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맘껏 싸운다. 그 와중에도 합이 안 맞는 듯, 맞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몬트리오나 알리의 공격 방식이 내 동료인 그들과 똑같아 보이니, 어쩌면 당연할 걸지도 몰랐다.

전투에서 빠진 데드리언은 내게 다가와 치료를 돕고 있었다. 제어구가 풀렸는데도, 힘의 크기가 커지지 않았다. 왜지? 단순한 오류로 취급하기엔 무언가 찜찜했다. 차원을 이동했기에 원래라면 힘이 강해졌어야 맞다.

“자, 다 됐어.”

“고마워.”

이런 거야 별거 아니라는 듯이 으쓱이는 어깨 너머로 싸우는 이들을 보았다. 덤비는 이들이 셋이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공격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쪽도 나라는 제약이 사라졌기에, 더욱 맘 편히 공격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데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생각한 거, 있어?”

“그쪽에서도 나는 전략을 짰나 보네~.”

“나랑 같이 머리 좀 썼지.”

일순 데드리언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게, 또 평행 세계 백시현 생각을 한 듯했다.

“그래서 있어, 없어.”

“없지. 뜬금없이 싸움이 일어날지도 몰랐고, 우리는 벨리텐트한테 복수하는 방법으로 널 선택한 거거든.”

유일하게 마음에 든 소중한 걸 잃어보라는 식으로.

숨을 토해내듯 데드리언이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평소의 자애로운 미소는 사라지고 담담하고도 아득한 낯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든 소중한 것. 그게 나라는 사실이 우스웠다. 내가 그런 존재가 됐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고개를 털어내며 신성력으로 쇼트 소드를 만들어내는데, 데드리언이 말을 꺼냈다.

“원래도 널 이 저택에서 빼낸 다음, 신전에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예정이었는데. 일이 쉽게 풀리긴 하겠어. 몬트리오가 우리에게 네 이야기를 하고 혹시 몰라 몇 년간 연구한 게 쓸모없어졌지만.”

색소 옅은 눈동자가 루블리안을 눈에 담고 있었다. 생경한 것을 직시하는 눈이다. 하긴 이쪽 미친놈에 비하면 루블리안은 양반이었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시선에 나는 손을 내밀고 말했다.

“뭐든 됐네. 네가 원하는 거, 결국엔 이뤄질 테니까.”

이곳을 빠져나간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앉아있던 데드리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어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고는 손을 잡은 뒤, 몸을 일으켰다.

“그렇네~.”

그리고 선선히 긍정했다. 맞잡은 손이 떨어지고 데드리언이 신성력으로 무기를 만들었다. 활이었다. 보통 때라면 이렇게 좁은 장소에서 활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지만, 신성력으로 만든 데드리언의 화살은 특이하게도 지정된 이를 끝까지 따라갔다. 도중에 힘이 다해 터지면 끝이긴 하지만, 터질 때까지는 목표물을 끝까지 쫓았기에 열받게 하기에는 최고였다.

데드리언은 됐고. 내가 해야 할 건 루블리안과 접촉하는 일이다. 이렇게 주술이 풀릴지는 몰랐지만, 풀렸으니 세계를 넘는 일만 남았다. 뒤따라올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걱정이었으나, 우선 벗어나고 생각할 일이었다.

‘신.’

[네.]

어느새 기운을 차린 목소리였다. 신치고 단순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래서 편했다.

‘루블리안한테 바로 세계를 넘는 게 가능하냐고 물어봐 줘.’

[네, 잠시만요.]

전령과 다름없는 취급이었으나, 신은 거리낌 없이 허락했다. 원래 같았으면 전음 마법으로 전하겠지만, 여기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있었다. 이 중에서 마법에 가장 능하고, 힘까지 일시적으로 강대해진 루블리안과도 비등한 그는 단번에 전음 마법을 간파할 터였다.

[가능하다고 해요. 슬쩍 뒤로 빠져 볼 테니까 다가와 달래요. 접촉만 하면 된대요.]

‘알겠어.’

그때였다. 뱀처럼 스멀스멀 기는 마력이 느껴졌다. 기민한 나는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언뜻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눈이 마주쳤던 것도 같다. 저쪽에서 싸우면서 나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다니,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펑! 콰광! 더 이상 무너질 벽이 있나 싶을 정도로 터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렸다. 후방에서는 데드리언이 활을 쏘며 길을 텄고, 알리가 4원소의 상급 정령을 소환해 화살이 연 길로 따라붙었다. 전방에서는 몬트리오가 궤가 변칙하는, 예측이 어려운 검술을 보이고 있었고, 루블리안이 간간이 마법을 쓰면서 스태프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공격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막아내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여유로운 작태로.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음에도 보란 듯이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하는 모습은, 나 때문인 게 분명했다. 이쪽 용사 동료들과 만나게 한 것도,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 또한 연장선이고.

루블리안과 여기서 벗어나면 저들이 어떻게 될지 뻔했다. 이미 머리가 돌아버린 미친놈과 다르게 이쪽은 죽을 각오를 하고 덤비고 있었다. 복수하는 건, 자기 선택이니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일일이 그걸 느낄 시간도 없었다.

저들을 상대하면서도 내게 마법을 쓰며 견제하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루블리안이 뒤로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루블리안에게 가까이 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나는 고립되었다.

데드리언이 저들에게 합류하는 것엔 방해 하나 안 하더니. 이걸 노린 거였나. 한 치도 방심할 수가 없다.

우선 루블리안에게 닿는 게 먼저인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뻗어오는 마력을 치우며, 방안을 생각했다. 끝내 번뜩,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게 있긴 했다. 거의 도박에 가깝다는 게 문제였지만, 때로는 과감함이 필요한 법이다.

‘신. 한 번만 더 전해줘. 준비하라고.’

[네. 그럴게요.]

신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알겠다는 답까지 받았다는 걸 확인하고, 나는 나에게 통증을 못 느끼게 하는 마법을 걸고 질주했다. 데드리언의 화살, 알리의 정령술, 몬트리오의 검, 평행 세계 미친놈이 튕겨낸 것들까지.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실패한다면 꽤 크게 다칠 테고, 성공한다면 이곳을 벗어나리라. 그런 생각으로 달렸다. 그리고 끝끝내 루블리안에게 도달했다. 일순 표정을 일그러트린 루블리안은 애써 그린 듯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잔소리는 나중에 할게요. 곧 따라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같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문이 들 새도 없었다. 그대로 내 시야가 오그라들면서 풍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달빛만이 빛을 발하던 어두컴컴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되어 있었으며, 반파된 건물과 부서진 조각들은 사라지고 녹음이 가득한 울창한 숲이 나를 반겼다. 싱그러운 풀 내음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조금 전 전투와 다르게 평화롭기만 한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현대로 가는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숲속이라니. 약간 멍하게 공중을 바라보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눈에 보이는 게 나무와 풀뿐이라 탐색 마법을 시전한 찰나, 바로 옆 수풀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동물과는 다른, 확실한 사람의 몸짓이었다.

“넌 뭐야.”

그리고 수풀 사이에서 한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을 한 몸에 받는, 내가 사랑하는 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남자아이였다.

_oOo_

‘예상했는데도 반응해버렸네…….’

실책이었다. 그 많은 수 중 백시현이 제 몸을 던지리란 수까지 예상했는데…. 맨몸으로 뛰어가는 시현에게 반사적으로 보호 마법을 걸었다. 뛰는 걸 막았으면 됐으나, 그토록 여유롭던 그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 본능적인 행위였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남은 잔챙이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 분야에서 일인자 자리를 먹은 그들을 잔챙이라고 부르지 못하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백시현이 아닌 이상 의미가 없었다.

‘애새끼, 그냥 죽일까.’

죽이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백시현이 아끼고 애정하던 것들이 죽었을 때 하는 눈과 행동을 알아서. 그걸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충동을 억눌렀다.

그런데 너무 열이 뻗쳤다. 시현을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그의 곁에 자꾸만 얼쩡거리는 게 성가셨다. 저 목을 졸라버리면 다 해결될 텐데. 벨리텐트는 그리 생각하며 공격을 막아내고, 또 공격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살의를 가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시현의 동료이자 마탑주인 루블리안 셀턴 또한 같은 생각 중이었다.

‘저 인간만 아니었으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일이 없는데.’

화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제 몸을 아낄 줄 모르는 백시현에게 화가 끊이질 않았다. 왜 걱정할 자신을 생각해주지 않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들끓는 감정들을 애써 뒤로 하고 루블리안은 평행 세계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다른 세계로 넘어간 후, 막강해진 힘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완전히 숨통을 끊어버리는 건 어렵지만, 큰 타격을 입힐 수는 있었다. 적어도 반죽음 상태에는 이르리라. 루블리안 셀턴은 그리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곁눈질했다.

저들이 죽는다면 백시현은 신경이 쓰일 테다. 안 그런 척해도 백시현은 상냥한 축에 속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저쪽도 나름 백시현을 도왔을 테니.’

“알아서 잘 살아.”

“뭐?”

순식간에 몬트리오, 데드리언, 알리의 발밑에 마법진이 생겨났다. 그들이 마법진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아무런 설명 없이 연고도 없는 곳에 세 사람을 보낸 루블리안은 태연했다. 접촉하지 않았기에 사지가 멀쩡할지는 알 수 없으나, 스스로 할 만큼 했다고 여겼다.

끌려가듯 사라진 세 사람이 있던 자리를 본 벨리텐트가 입을 열었다.

“괜한 객기를 부리는 걸 보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본데……. 그렇다면 소원대로 해줘야지.”

벨리텐트가 눈을 가늘게 휘며 붉디붉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광기에 잡아먹힌 듯한 눈빛은 누가 봐도 섬찟하다 느낄만했지만, 루블리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 웃었다.

이 사이에 백시현의 동료인 몬트리오가 있었다면, 이건 악몽이라고 외칠만한 모습이었다. 그만큼 두 루블리안의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성격이 더럽다는 걸 곧이곧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시선이 교차했다. 서로를 관찰하던 시선을 끊은 건 루블리안이었다. 루블리안이 스태프를 꺼내고 재빠르게 달렸다. 곳곳에 마법진을 펼쳐 마법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순식간에 벨리텐트가 마력으로 만든 검의 형상과 루블리안의 스태프가 큰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강하게 휘둘리는 스태프에 검을 맞대며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이 보호 마법을 전개했다. 공격 마법과 보호 마법이 충돌하고, 그로 인해 생긴 연기가 둘을 감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