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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23)화 (23/112)

023.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12)

이 정신 없는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 시선은 루블리안에게로 곧게 박혀 있었다. 나는 주술 때문에 멀어져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홀린 것처럼 그를 훑어 내렸다. 뚫린 천장으로 인해 쏟아지는 달빛은 그의 머리카락을 더욱 반짝였고, 길고 곧게 뻗은 속눈썹 아래 햇빛에 의해 잘게 부서지는 바다 같은 눈동자에는 은은한 광채가 맴돌았다.

어디 야윈 곳도 없어 보였다. 열다섯 개의 세계를 돌아다녔다기엔, 무척이나 멀끔한 차림새라 신이 말하지 않았다면 한 번에 나를 찾은 줄 알았을 테다.

“시현.”

붉은 입술 사이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낭랑하게 꽂히는 목소리에는 애정이 넘치다 못해 줄줄 흘렀다. 이상하게 귓속이 간지러웠다. 살살 긁어내리고 싶을 정도였다.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데, 귓바퀴에 슬며시 물컹한 감촉이 닿았다. 닿는 듯, 닿지 않는 듯한 애매한 거리에서 느른한 음성이 나에게 충고했다.

“자기야. 정신 차려야지. 애새끼가 또 피 토하는 꼴 보고 싶나 봐?”

“……네가 할 말이야?”

내 주의를 끌어 자신을 보게 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웃었다. 알고는 있지만, 성격이 더럽다.

하지만 맞는 말이다. 이대로라면 루블리안이 각혈하는 광경을 또 봐야만 했다. 주술을 풀지 못했으니까.

“놔.”

“날 두고 도망가려고? 자기야, 함께 보낸 밤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되지.”

말꼬리를 부러 늘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나를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실으며, 나른히 눈꼬리를 접었다. 퇴폐적인 동시에 화려한 낯은 진실만을 말했다는 듯 당당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내 어이란 어이는 다 털렸다. 이제 탈탈 털어봐도 남아있을 어이가 없을 게 자명했다.

“저, 저게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한순간에 더욱 싸늘해진 분위기 속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평행 세계 몬트리오였다. 그는 나를 돌아보며 ‘아니지? 거짓말이지? 그럴 리가 없지?’라는 말을 눈빛으로 전했다. 부정과 배신감, 지키지 못했다는 감정으로 얼굴빛이 혼탁해졌다.

저걸 믿나. 루블리안을 바라보니, 저쪽은 웃는 낯을 유지하며 화를 참고 있었다. 얼마나 꽉 쥔 건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것 같았다.

[시현. 저 세계 파괴범이 전해달래요. 주술은 자기가 알아서 처리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요.]

정말 전해주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처리했다고?’

[네. 주술을 잘 아는 이를 찾아가 시현에게 걸린 주술과 같은 주술을, 지정자만 시현으로 바꿔 자신에게 걸었대요.]

그렇다면…….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루블리안의 등장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 준다는 듯이 여유만만했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내리니, 루블리안도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었다.

……루블리안이라 생각하는 것도 똑같은 건가. 어떻게 된 게 둘이 똑같은 주술을 걸었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지정자, 백시현의 생명력을 빼앗는다는.

‘루블리안한테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스스로한테 주술 건 거 말했어?’

[아니요? 저 협박 당하느라 그것까진 말할 시간이 없었어요……. 훌쩍.]

다시 생각해도 억울한지 신이 훌쩍거렸다. 그러나 이미 여기가 난장판이며, 그 중심이 나라는 걸 상기한 듯 큰 소리로 울진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조용히 훌쩍거리는 데 그게 더 신경 쓰일 판이다.

‘내가 사과할게. 그러니까 훌쩍이지 좀 말아줄래.’

[머리 아프신가요? 훌쩍. 그럼 저 저기서 울고 올 테니까 필요하면 부르세요. 훌쩍.]

훌쩍이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계속 훌쩍여 머리만 아프게 할 바에는 신이 그냥 가는 게 낫겠다 싶어 굳이 잡지 않았다. 그보단 지금은 내가 제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훨씬 중요했다.

이 미친놈은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게 능숙했다. 이렇게 여유로운 걸 보면, 이미 무언가 수를 쓰고, 걸리길 기다리는 것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시현! 어찌하여 대답을 안 하는 건가!”

몬트리오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답을 재촉했다.

아. 신이 갑작스럽게 말을 전해주어, 대답을 잊고 있었다. 신의 존재를 아는 루블리안은 신이 자기의 말을 전해준 걸 아는 눈치였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무언가를 캐내려는 듯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빛이 더욱 집요하고 진득해진다. 이놈이랑 더 오래 있다간, 빠른 시일 내에 신의 존재를 들키리라.

신의 존재를 모르는 건, 지금 있는 이 세계를 관리하는 신과 내 세계를 관리하는 신이 달라서 그런 듯했다. 보통 어느 신이 한가로이 토벌하는 걸 구경하면서 머릿속에 목소리를 채우겠는가.

“대답 안 하는 거 보면 모르겠어, 몬트리오? 검술 훈련 말고 눈치를 기르는 훈련이나 하는 게 어때. 그편이 더 유용할 것 같은데.”

“아니니까, 그만 물어보고. 넌 헛소리 적당히 해.”

잠깐 생각을 잇자마자 망발을 사실로 낙인찍으려는 도둑놈에게 말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놔.”

손에 힘을 주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한쪽 팔을 허리에서 떼어 냈다. 그러자 가까운 거리에서 나직하게 울림이 깊은 목소리가 툭 귓전을 건드린다.

“왜? 놓으면 주술이 걸린 애새끼한테 가려고?”

“주술이 걸려?”

바로 모르는 척 반문했다. 그런 날 보며 쓸데없이 머리가 잘 돌아가는 미친놈이 입가에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새겼다. 들킨 건지, 아닌지 의중을 알기 어려운 모호한 시선이다. 곤란하게 됐다.

“응. 애새끼도 나긴 나니까…… 아마 똑같은 걸 생각한 것 같은데, 아쉽게 됐네. 내가 자길 놓아줄 생각이 없어서.”

“누구 마음대로.”

서늘하게 벼려진 눈동자가 접힌 눈꺼풀에 반쯤 가려졌다. 여유로우면서도 고풍스러운 낯이 망가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제 뜻대로 되리란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런데 그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재수도 적당히 없어야지. 여하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날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신발을 벗고 거리를 벌리는 게 가장 괜찮은 방안이었다.

루블리안이나 삼인방에게 기대기엔, 나는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가 아니었다. 자립으로 탈출하는 쪽에 가깝지.

이 시점에 루블리안이 온 것도 기껍지는 않았다. 멀쩡한 걸 보니 안심이 되고, 얼굴을 보니 좋긴 했다. 그러나 풀리지 않은 의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저걸 다 풀고, 이쪽 세계의 동료들을 이용하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다.

펑!

내 옆머리를 스치며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자, 벽이 무너졌다. 짧은 시간 내에 한 많은 생각을 다 미뤄두고 알리를 바라보았다.

“다들 왜 가만히 있는 건가요! 아니, 정신 차리고 공격을 해야죠!”

답답하다는 듯 알리가 소리쳤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심정이 절절했다. 동감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적대 관계이니까.

그러나 그녀가 미처 눈치 못 챈 건, 데드리언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틈을 노렸고, 몬트리오는 틈을 노리면서 데드리언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분위기가 어쩐지 묘해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신경전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으음. 몬트리오한테 듣긴 했지만, 역시 신기해서?”

“거기다 시현이 저기에 잡혀 있는데, 그냥 공격했다가 맞으면 어떡하나! 지금은 신성력도 못 쓰는 처지 아닌가!”

데드리언은 그저 놀라운 광경에 구경하고 있었다는 듯 시치미를 뗐고, 몬트리오는 진심을 내비쳤다. 도대체 시간을 되돌리기 전, 나와 무슨 사이였기에 저렇게 돈독한 감정을 품나 싶었다.

“아오! 그럼 저대로 두자고? 게다가 쟤가 못 써도 데드리언이 있잖아!”

“다친 채로 놓아주지 않으면 어쩔 건가. 알리,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사적 감정을 배제하면 벨리텐트, 저 자식한테 덤빌 이유도 없거든?”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공적, 사적으로 나뉠 만한 감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몬트리오는 말문이 턱 막힌 얼굴을 했고, 데드리언은 둘을 말렸다. 개판이 따로 없다.

“저럴 거면 광대나 해야 했는데. 서커스단도 아쉽겠어. 적합한 인재를 놓쳐서.”

느긋한 목소리가 작지 않게 울렸다. 세 명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알리는 화에 못 이겨 다시 정령을 소환했다. 공기의 파동이 달라지면서 허공에 소용돌이가 하나가 생겼다. 이내 그 소용돌이는 새 모양을 띠었다. 바람의 상급 정령이었다.

데드리언은 자애롭게 웃었고, 몬트리오는 검집에서 검을 빼내었다. 나 때문인지 그는 달려오지 않았다. 공격해도 피할 자신이 있는데, 나를 너무 약하게 본다.

그 사이, 날카로운 바람포가 날아왔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움직이지 않고 모든 걸 막아냈다. 자유자재로 어떠한 무리 없이 마력을 움직이고 마법을 쓰는 모습이 경이롭다 못해 질릴 지경이었다. 진정한 밸런스 붕괴자는 여기 있었다.

루블리안은 내게서 시선을 한 번도 떼지 않았다. 뚜렷하게 나를 담아내는 맑은 눈동자는 고민하고 있었다. 자기가 오거나, 내가 가거나. 그 둘 중의 하나를 고르려는 듯.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나았다. 여기가 본래 세계가 아니니, 이상하게 힘이 강대해지지 않는 나와 다르게 루블리안은 힘이 강해졌을 테다. 그러나 상대는 시간까지 돌린 미친놈이었다. 대책 없이 다가오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내가 신발을 벗는다면, 절단될 다리가 재생되는 데 걸리는 시간과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서 벗어나려면 필요한 시간을 계산할 때였다.

펑! 펑! 콰광! 큰 소리와 함께 죄 없는 벽이 부서져 나갔다. 알리가 물과 불의 상급 정령까지 소환하여 연계 공격을 날렸으나, 내 뒤에 있는 놈이 태연자약하게 막은 탓이었다. 튕겨 나간 공격이 천장이며, 옆벽이며 여기저기를 파괴했다.

용사의 동료라면 이래 봬도 그 분야에서 손꼽는 수재거나 일인자다. 알리는 나이가 어렸지만, 천부적인 재능으로 일인자에 오른 이였다. 이렇게 쉽게 막아내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정상이 아니었다.

……머리도 제정신 아니더니, 능력치도 미쳐버린 게 틀림없다. 여기서 벗어나도 저 정도면 금세 날 따라올 터였다. 근본적인 게 해결이 안 될 테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신발을 벗었다.

“으윽!”

그 순간 펑!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여기저기 튀었다. 미친 듯이 아팠다. 나는 재빠르게 제어에 풀려난 마력으로 고통을 못 느끼게 만들고, 신성력으로는 다리를 재생시켰다.

터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잽싸게 다가온 루블리안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근접전으로 대치를 시작했다. 그 사이 옆으로 빠진 나는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재생되는 다리를 보며 생각했다.

아니, 어느 미친 새끼가 피가 튀기고 살점이 나돌아다니게 터지는 걸, 예쁘게 분리된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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