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22)화 (22/112)

022.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11)

백시현이 자발적으로 납치되어 잠들고 하루가 지났을 무렵, 루블리안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막 뜬 그의 시야에는 낯선 하얀 천장이 비쳤다.

여기가 어딘가 하는 당연한 의문이 들 새도 없었다. 곳곳에 시현의 체향이 가득 배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이 시현의 방이란 건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체를 일으킨 루블리안은 마법으로 집안을 탐색했다. 탐색 마법에 잡히는 사람은 없었다. 루블리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곤 시현의 향이 가득한 이불에 얼굴을 묻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이어 차근차근 잠들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정리했다. 끝내 머릿속에 맴도는 장면은 하나였다.

시현이 떠났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루블리안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현의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가오는 순간부터 의심하고 있었는데, 다정하게 불리는 이름에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방심해서는 안 됐는데, 당해버렸다. 루블리안은 자신을 질책했다. 동시에 떠나버린 시현에게 위험한 걸 알면서 왜 따라가냐며 따지고 싶었다.

백시현의 입장에서는 그게 제일 나은 선택이었을 테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감정과 이성은 언제나 따로 놀았다. 시현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들어간 힘은 풀릴 기색이 없었다.

“신. 당신 아직 여기 있지. 여기 다 부숴버리기 전에 나와.”

루블리안이 허공을 향해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자리를 비운 것처럼 신이 나오질 않았다. 어느 정도 파괴하면 나오겠지. 시현의 집을 떠나, 인적이 드문 산 쪽으로 이동했다. 누가 휩쓸리든 상관은 없지만, 시현이 싫어할 테다. 그리 여기며 그대로 산을 반파시켰다.

비정상적인 산사태가 일어나자, 그제야 신이 허겁지겁 달려와 물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시현이 있는 위치, 불어.”

[네? 네에?]

갑자기 세계에 문제가 생겨 달려온 신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어 ‘네?’만 반복적으로 말했다. 그만큼 신은 당당하게 백시현의 위치를 내놓으라고 한 루블리안이 어이가 없었다.

안 그래도 시현이 자신의 관할이 아닌 세계에 뚝 떨어져서 그 세계를 담당하는 신한테 가 사정하는 중인데, 루블리안의 눈이 휙 돌아 있었다. 난리 났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네?’ 퍼레이드에 루블리안은 이맛살을 살짝 구기며, 관자놀이를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이 두통을 매번 어떻게 견딘 건지. 머리가 아팠다.

“‘네’라는 대답밖에 못 해?”

[아니거든요!]

“그럼 얼른 말해. 시현의 위치.”

[제가 왜요?]

솔직하게 말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신은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야 그럴 것이 시현이 평행 세계를 자발적으로 간 이유는 주술을 풀기 위함이었다. 저 뻔뻔스러운 놈이 죽지 않았으면 하기에.

그런데 여기서 시현의 위치를 알려주면, 루블리안은 바로 이동할 터였다. 그럼 결국 시현의 그 선택과 생각들은 모두 쓸모없어지는 것 아닌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 신도 감정이라는 게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설치고 다니는 루블리안보다 시현을 더 아꼈다.

[시현이 당신 때문에 평행 세계의 당신을 따라간 건 알고 있죠? 지금 가면 시현의 선택을 무시하는 거 아닌가요?]

“허, 선택? 강제성이 따라붙는 걸 시현이 본인만의 의지로 선택했다고 할 수 있나?”

루블리안이 목을 긁듯 말했다. 맹수의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연상케 하는 목소리였다.

끙. 신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한시가 급한데, 알려주기 전까지는 놔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뭐가 됐든 시현이 선택한 것은 맞았기에 위치는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루블리안이 찾아갔을 때, 시현이 주술을 풀지 못한 상태라면 도망을 갈 텐데 그럼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갈 게 분명했다. 더 이상의 시말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런 신의 생각을 꿰뚫어 보듯 루블리안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이 세계가 완전히 파괴되는 거, 보고 싶나 봐? 네가 그렇게 원치 않던 시말서 더 쓰게 해줄 수 있는데… 어때?”

시현에게 말하는 것과 다르게 애교가 완전히 빠진 느른한 어조였다. 루블리안은 알려주지 않으면 세계를 파괴하겠다는 협박을 대놓고 하고 있었다. 협박이라는 걸 감출 생각도 없다는 듯이.

이에 환장하는 건 신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빼액. 날카롭고 높게 소리 지르는 신에 루블리안이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가 입을 뗐다. 붉은 입술 사이로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걸 몰라서 물어? 좋은 말로 할 때 시현의 위치, 얼른 말하라는 거잖아.”

빈정거리는 듯했지만, 알려주기만 하면 얌전히 있겠다는 투였다. 신은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이내 이곳이 시현의 소중한 친구들이 있는 세계란 걸 깨닫고 이를 이용했다.

[여기 반파하면 시현이 미워할걸요? 여긴 시현이 소중히 여기는 친구도 있는 세곈데, 휘말리면 큰일 나는 거 알죠? 게다가 좋은 추억이 있는 장소도 있다고요.]

이래도 네가 여길 파괴할 수 있을 것 같냐는 뉘앙스가 질질 풍겼다. 루블리안은 혀를 내둘렀다. 시현에게 의미 있는 장소는 파괴할 수 없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으며, 나중에 함께 가서 여기에 어떤 추억이 있는지 직접 물어보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딘지 알면 거기만 제외하고 부숴버리겠다만, 알지를 못했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시현과 관련만 없으면 어디든 반파할 수 있었다. 루블리안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몬트리오가 봤다면 악마가 재림했다며, 시현에게 정화를 부탁했을 정도로 사악한 미소였다.

“그럼 다른 세계를 부수면 되지.”

[……네?]

“네가 담당하는 세계가 아닌 곳을 부수면 더욱 난리가 나겠지. 시말서도 더욱 많이 쓸 테고. 안타깝게 됐네.”

전혀 안타깝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신은 가느스름하게 휘어진 눈매에 오싹했다. 하필이면 왜 저런 싸한 놈을 좋아하는지, 시현이 아까웠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생각해야만 했다. 세계가 파괴되지 않아 시말서를 쓰지도 않고, 시현을 위해 시간도 벌어줄 수 있는, 저 두 가지가 충족되는 방법을.

[그, 그럼 이렇게 해요.]

루블리안은 들어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권태롭고 오만한, 누가 봐도 갑의 태도였다.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에 몇백 년은 더 산 신은 욱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봐도 자신이 을이었다. 신은 인간계에 직접적인 개입이 불가능하기에, 루블리안에게 어떤 해를 끼칠 수도 없었다. 억울한 신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말을 이었다.

[세계를 반파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스무 개의 세계를 알려줄게요. 그중 하나에 시현이 있을 거예요. 이 정도는 괜찮죠?]

“열 개.”

[네? 그건 너무 적어요!]

“열세 개.”

[으윽. 열, 열다섯 개……!]

“그래. 그럼 열다섯 개로 하자.”

처음부터 열다섯 개를 노리고 열 개를 언급했던 루블리안이 칼 같이 답했다. 머릿속에서 신은 ‘어……?’ 하는 어리둥절한 소리를 내었다. 속았다는 것도 모른다. 이런 게 신이라니. 세계가 멀쩡히 돌아가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만 연발하는 신에게, 안 알려주냐고 묻자 신이 열다섯 개의 세계의 위치를 하나씩 말했다. 한 번만 말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는데, 전혀 무섭지 않았다. 마력을 이용해 공중에 수식과 좌표 등 여러 가지를 다 적은 루블리안이 마침 생각났다는 것처럼 입을 뗐다.

“아, 그러고 보니 말이야.”

[……뭐가 그런데요?]

신은 불안함을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소름이 올라오는 게, 괜한 걱정이 아닐 듯했다. 루블리안이 큰일을 치를 때마다 느껴지는 본능적인 감이었다.

“세계를 이동하면서, 그 여파로 의도치 않게 세계의 일부가 망가지는 건, 나도 몰라.”

[네? 네에에? 지금 그게 무슨,]

루블리안은 머리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어차자마자, 손짓해 다른 세계로 이동했다. 신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거센 소용돌이가 풀리면서 루블리안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강하고 재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소용돌이의 여파는 무척이나 컸다. 그 주변 일대가 모조리 망가졌다. 그러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동된 곳이 울창한 숲속인 덕이었다. 얼핏 신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일부러 여파가 더욱 크게끔 이동했던 루블리안은 느긋하게 탐색 마법을 써 시현이 이 세계에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이동했다.

주술 때문에 본래 세계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루블리안은 그 짓을 열네 번이나 했다. 끝내 마지막으로 간 곳에 백시현이 있었다. 다른 열세 번이 다 숲이었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이동되면서 저택을 파괴했고, 절로 신이 써야 할 시말서가 늘었다. 신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좀 먼 후일이었다.

_oOo_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시간을 되돌렸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 가설이 성립된다면 여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보였던 기행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버거울 정도로 힘이 강대한 것도, 나를 잘 아는 것처럼 굴었던 것도, 내게 집착하는 것도. 시간을 돌리기 전 모종의 사건이 있었을 테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세 명과 신을 병풍 취급하며 좀 더 깊게 파고들던 때였다. 콰과광! 무언가 터지는 큰소리가 울리고 지진이 난 듯 저택이 흔들렸다. 몸의 중심을 잡는 와중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어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고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꿰찼다. 고개를 올리니, 너무나 깊어 수면이 보이지 않는 듯한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교차한다. 이내 붉은 입술이 열린다.

“또 보네, 자기야.”

나에게 경고 후 잠이나 자러 갔을 미친놈은 저택 어딘가가 터진 게 틀림없을 텐데도, 태연하기 그지없다. 누가 보면 이게 일상인 줄 알겠다.

그리 생각한 순간, 방 한쪽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무너진 부분이 바닥과 부딪혀 조각이 나면서 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콜록대기를 잠시, 뿌연 연기가 가라앉고 무너진 부분에서만 달빛이 들어왔다. 은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듯한 곳에서는 루블리안이 서 있었다.

……잠시만, 루블리안?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벌써 찾아온 걸까요…? 열다섯 개의 세계면 마력도 마력이고 여러모로 소모되는 게 많아서 밸런스 파괴범이라도 최소 한 달은 걸리는데…… 이게 말이 돼요?]

내가 더 당황할 겨를도 없이 신의 질겁한 목소리가 정신없이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안 그래도 잡힌 마당에 머리까지 고통을 호소했다. 신을 조용히 시키자, 이번에는 평행 세계 삼인방이 떠들어댔다.

“와…… 옛날 얼굴이랑 똑같네요. 재수 없다!”

“알리. 실례야.”

“사실이긴 하군. 옛 얼굴이랑 똑같아서 거북할 정도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팠는데, 더 아파져 온다. 앞은 루블리안, 옆은 평행 세계 삼인방, 뒤는 정신이 돌아버린 놈.

……이게 대체 무슨 총체적 난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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