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10)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마왕의 목을 베어냈다는 게, 이 뜻이었다. 마왕으로 변한 백시현의 멱을 땄다는 거였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도무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연달아 나타났다. 원래는 잘만 돌아가던 머릿속이 과열되었다. 미치겠다.
“왜 벴냐고 우리가 소리치니까, 벨리텐트가 말하더라. ‘마왕으로 변했는데, 저걸 저대로 내버려 두겠다고?’라고. 우리는 아무 말도 못 했어. 마왕을 죽이라는 명을 받았는데, 안 죽이면 어떻게 하겠어. 심지어는 용사가 한순간에 마왕으로 전락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동료를 쉽게 저버린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 게 보였다. 죽이는 것을 막지는 못했더라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말에 반박은 해볼 걸 하는 게 드러났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몬트리오의 죄책감은 여기서 기인한 듯했다.
하지만 별개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행동을 따로 놓고 본다면, 옳은 쪽에 가까웠다. 용사와 그의 동료들은 마왕을 죽여야만 했고, 만일 죽이지 않았다면 벌어졌을 일들이 훤했다. 죽이더라도 저들이 입을 닫는다면, 평행 세계 백시현은 마왕을 죽이고 전사한 명예로운 용사 혹은 제 할 일을 끝내고 사라진 용사가 됐으리라.
그러나 명예로운 이나 홀연히 사라진 이가 됐다기에는 이 저택의 사용인만 해도 평행 세계 백시현을 경멸했다. 아닌 척 불온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게 뜻하는 건 하나였다.
“용사가 마왕이 됐단 사실을 함구하지 않았나 보네.”
“……정말 다르네.”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평행 세계 백시현을 대조한 듯했다. 나도 다를 바가 없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저 부분에서 어딜 보고 다르다는 걸 체감하는 건지 당최 알 수 없었다. 평행 세계의 백시현이 머리가 안 좋기라도 했나 싶었지만, 혈연이 나와 똑같다면 그럴 수가 없을 터였다. 그 집에선 머리 안 좋게 살아남기 힘들다.
그 집안 생각을 할 바에는 박시찬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유익할 수준이었다. 나는 성인이 되면 나가버릴 집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깨끗이.
“네가 예상한 대로 원래는 함구하려고 했어.”
어느새 능청스러움은 사라진, 울림이 깊은 미성이 들렸다. 시선은 내게 향해 있었지만, 알맹이는 과거를 상기하는 듯 더 먼 곳으로 향해 있었다.
“잡음이 없게, 시현은 임무를 수행하고 떠난 용사로 내버려 두고 싶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소문이 돌더라고.”
데드리언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백옥 같은 손등에 혈관이 선명히 튀어나올 정도였다. 착잡함과 죄책감으로 물들어 있던 몬트리오와 아랫입술이 피가 날 정도로 깨물고 있던 알리 또한 고요히 분노하고 있었다.
‘용사가 사실 마왕이었다.’, ‘신탁이 잘못되었다.’ 등 여러 소문을 말하면서 데드리언은 거의 이를 갈다시피 했다. 지금 일어난 일이 아닌데도 꼭지가 열릴락 말락 하는 게 보였다.
“몬트리오가 수소문해서 말을 흘린 사람을 찾아냈는데….”
이것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네.
“…벨리텐트가 나오더라고.”
놀랍지도 않았다. 내가 겪었던 일과 같다면 마왕을 죽일 수 있던 사람이라고는 평행 세계 백시현과 그의 동료들뿐이었을 테다. 그런데 그중에서 암묵적인 합의를 깰 사람이 따로 누가 있겠는가. 동료의 목도 단숨에 베어버린 평행 세계 루블리안밖에 없다.
“그것도 일부러 흘린 듯이. 근데 일부러 그랬다는 걸 몬트리오가 벨리텐트와 접촉한 후에 알아서 벨리텐트의 계획에 낚여준 셈이 됐지.”
몬트리오와 벨리텐트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 궁금했으나, 데드리언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나갈 뿐이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나보다 감정 표현이 적고 말수도 적었다는 것부터, 벨리텐트가 얼마나 개새끼인지까지.
미성이 귀로 흘러들어오는 동안, 다른 목소리는 들어오지 않았다. 들어오면서 닫지 않은 창문에 달린 커튼 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 근처를 맴돌았다.
“…이게 끝이야.”
이야기가 종점을 다다랐다. 최대한 무겁지 않게 말한 듯했지만, 내용이 가볍지 않아 소용이 없었다. 이들에게 평행 세계 백시현은 소중한 동료였다. 그랬기에 평행 세계 백시현에 대한 이야길 어째서 기꺼워하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죽은 이의 이야기를, 그것도 불명예스럽게 죽어버린 이의 이야기를 누가 꺼내길 좋아할까. 심지어 동료가 죽었을 때는 반박 하나 하지 못했는데. 이건 이들의 치부였으며, 역린이었다.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내게 데드리언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침착해 보이긴 하나 속으론 혼란스러울 것을 앞서서 배려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이 잠깐의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기로 했다. 들은 내용과 알고 있던 정보들을 접목해 결과를 도출해내기까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으니.
결과적으로 평행 세계 백시현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죽인 건 알겠다. 거기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잘 알겠다. 그런데 왜, 알리는 평행 세계 백시현이 나를 대신한 희생양이라고 했을까.
이야기를 다 끝냈는데도, 희생양으로 칭한 이유와 몬트리오가 내게 보내는 그리움과 친근함의 원천 등 모르는 게 많았다.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한 구간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계획에 낚여, 몬트리오가 그와 접했을 때 뿐이다. 아마 저 때 내게는 말하지 않은 정보들을 더 알게 된 듯한데……. 나는 빠른 속도로 셋을 훑었다. 할 말을 다 했다는 태도다. 답을 내어줄 리가 없다. 이건 내게 그리움을 지닌 몬트리오에게 따로 접선해야 할 성싶었다.
희생양. 희생양…. 똑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굴렸다. 보통 희생양 하면 상대방을 대신하는데, 들은 거라고는 평행 세계 백시현이 마왕이 되어 죽은 것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원래 마왕이 되어 죽을 운명이었나. 대신한다는 게 죽음인 건가.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내 미래를 어떻게 알고 있던 거지? 거기다 신의 말에 의하면 평행 세게 백시현은 쌓아둔 욕망이 갑작스레 한꺼번에 터지며 마왕이 되었다. 그렇다면 하필 그 타이밍에 욕망이 분출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간결하지 않은, 너무나 많은 정보로 인해 고통받는 머리를 조금이라도 더 쓰기 위해 애썼다. 그때였다. 조금 전까지 평행 세계 백시현에 대해 이야기해주던 목소리가 침묵에 잠긴 방에 울렸다.
“나랑 알리가 널 별로 안 좋아하는 건, 벨리텐트랑 관련이 커. 몬트리오는 기억이 있기라도 하지. 나랑 알리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라, 그때의 감정이 생기진 않거든.”
“데드리언!”
몬트리오가 버럭 소리쳤다. 마치 합의되지 않은 사항을 이야기한 것처럼. 그에 데드리언을 바라보자, 그는 의뭉스럽게 웃고 있었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부러 내게 정보를 던져주었다.
“몬트리오. 화내지 말고. 딱 여기까지만 말할게. 이쪽 시현은 결국엔 알아낼 것 같아서 그런 거야. 숨기는 것만이 답은 아니잖아.”
역정을 내는 몬트리오를 데드리언이 살살 달랬다. 확실히 몬트리오의 반응은 유난스러웠다. 내가 알지 않았으면 하는 사실에 가까워지는 걸 막는 듯했다. 그 사실에 확신을 더하듯, 내게 좋은 감정은 없는 알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다.
한차례 그들의 반응을 살핀 후, 데드리언의 말에서 신경 쓰이는 부분인 ‘기억’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역시 평행 세계의 몬트리오와 루블리안만은 평행 세계 백시현이 아닌 ‘나’를 잘 아는 것 같았다. 특히나 평행 세계 몬트리오는 나를 오래도록 알아 온 사람처럼 친근함을 느끼고, 오랜만에 본 사람처럼 그리움을 느꼈다. 아예 ‘나’를 아냐고 물었을 때, 수긍하기도 했고. 그건 저 ‘기억’의 여부 차이일 테다.
알리와 데드리언이 없는 것처럼, 나한테도 없을 기억. 내 머릿속에 손을 댄 거라면, 어딘가에 이상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조금 전에 살폈듯 그런 부분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두 가지로 좁혀진다. 아직 내게 벌어지지 않아 내 기억에 없는 것이거나, 완전히 이 세상에서 지워진 기억. 둘 중 하나로.
그러나 아직 내게 벌어지지 않았다는 가설은 폐기하는 게 옳다.
저게 성립되려면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는 가정이니, 미래의 내가 저들과 만나야 한다. 그것도 과거로 가서.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몬트리오는 이미 나를 알고 있다. 즉, 그 말은 그들에게는 나와 만난 일이 과거의 일이라는 뜻이다.
얼마만큼 과거로 돌아갔는지는 모르나, 몬트리오와 루블리안을 마주했다면 알리와 데드리언 또한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 ‘그때의 감정이 생기진 않거든.’이라는 발언을 곱씹다 보면, 내게 없는 기억 속 저들이 함께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알리와 데드리언은 나처럼 기억이 없다. 머릿속을 건드리는 건 상당히 위험하고 실례인 행동이라, 직접 확인해보진 못하지만, 보이는 태도로 보아 둘의 기억도 손댄 흔적이 없을 테다.
치유에 치중된 신성력은 특히 정신적인 면에서도 뛰어나다. 그런 대단한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저절로 기억의 이상을 알아낼 터였다.
정령사도 비슷했다. 자연적인 걸 좋아하는 정령은 누군가 자신의 친구, 정령사에게 인위적인 흔적을 남겼다면 바로 치유하고 만다. 용사 시절, 토벌 중 알리가 말했던 것이니 확실했다.
물론 자기 자신이 기억을 묶어버렸다면, 그냥 넘어갈 테다. 그러나 그랬다면 굳이 몬트리오에게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 묶은 기억, 스스로 다시 풀어버리면 되니.
그럼 완전히 이 세상에서 지워진 기억이라는 가설이 옳다는 건데……. 나는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있던 일이 없었던 일로 완전히 지워지려면, 시간을 돌려야 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시간은 신의 영역이다.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함부로 건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짓을 할만한 사람이…… 있다. 그런 짓을 하고도 남으며, 성공률까지 높을 사람이. 거기다 세계를 뛰어넘는, 신의 관할에 손을 댄 전적까지 존재하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시간을 되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