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9)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셋 모두 못 들을 거라도 들은 것처럼 혹은 역린을 건드린 것처럼 잠시간 꼼짝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빠르게 입을 연 건, 알리였다.
“당신! 벨리텐트, 그 자식한테 뭐라 들었어요? 뭐라는데요! 대답하세요!”
거리를 단숨에 줄인 그녀는 씩씩거리며 배로 언성을 높였다. 그 소리에 몬트리오와 데드리언이 정신을 차린 듯 내 멱살로 향하는 손을 막았다.
아깝게 됐다. 알리가 내게 분노한 것은 예상에 없었지만, 멱살 정도는 순순히 잡혀주려 했다. 그 뒤, 알리가 토해내는 말들을 들을 생각이었다. 평행 세계의 백시현에 대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기회였는데. 다시 생각해도 아쉽다.
저들 중 가장 머리가 잘 굴러가는 데드리언은 버둥거리는 알리를 어르며, 서늘하게 나를 응시했다. 여태 만면에 미소가 떠올라 있다는 점에서, 루블리안와 데드리언은 동족이 틀림없다.
“왜?”
그들의 동요는 깡그리 무시하고 내가 뭐 잘못했냐는 듯이 무던하게 물었다. 데드리언은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저었다. 당연했다. 그저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고는, 그걸 실행한 것뿐이니 말이다.
내가 아는 알리는 화가 나면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다 뱉어버린다는 걸, 순간적으로 기억해내 이용하려고 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저쪽도 저쪽 나름의 사정 때문에 나를 보내려 하는데. 피차일반이다.
“그래서 대답은?”
알리의 입을 막던 몬트리오가 더욱 격렬해진 몸짓에 못 이겨 그녀를 놓아주었다. 풀려나자, 바로 카랑카랑한 소리가 되돌아온다.
“그게 왜 궁금한데요!”
밤이라는 걸 잊은 모양새였다. 이걸 봐주고 있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이들과 나의 만남에서 대체 뭘 노리는 건지. 그가 얻을 만한 게 없을 것 같아 그의 의도를 더욱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용사야.”
난 대답을 이끌어 내려 가진 패를 하나 털어놓았다.
“……그래서, 뭐! 당신 잘났다 이걸 말하고 싶으신가요?”
자기 사람에게는 한없이 물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일이 가시를 세우며 태클 거는 버릇이 똑같다. 고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지만, 충고하진 않았다. 내 동료 알리가 아니니, 챙겨줄 필요가 없다.
나는 알리를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앞뒤 안 가리고 또 끼어들려는 그녀를 데드리언이 제지했다.
“마왕을 토벌한 용사인 이상, 대우가 좋아야 해. 대부분은 날 선망할 테고. 그런데 여기 사용인들은 나를 경멸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궁금한 것뿐이야. 막힘없이 뒷말까지 끝을 맺자, 셋 다 입을 꾹 다물었다. 억울함, 미안함, 분노. 갖가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게 보였다.
오로지 데드리언만이 감정을 절제하며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두 명이 감추질 못해서 무쓸모였지만 말이다.
나는 말을 잇지 않고 기다렸다. 데드리언이 나에게 상황을 설명하겠단 판단이 서기까지를.
“하아.”
색소 옅은 입술 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복잡해졌다는 심경이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데드리언은 그새 고민을 끝낸 듯했다.
“우선, 네가 아닌 시현은 용사가 맞아.”
용사일 거라 예상한 건 맞았다. 그렇다면 왜 그런 눈총을 받는 거지?
“넌 시현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지?”
“맞아.”
“후. 솔직하게 말하자면, 시현의 이야기를 굳이 하고 싶지는 않아. 우리한테 썩 좋은 얘기도 아니거든.”
“…….”
“그렇지만 대부분 아는 내용이기도 하고, 너도 알긴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알려줄게.”
“뭐라는 건가!”
“데드리언!”
거센 반응이 몰아쳤다. 한 명은 나에 대한 걱정으로, 다른 한 명은 이야기의 주인에 대한 감정으로.
“진정해~ 나도 내키진 않는데, 저쪽 시현도 알 건 알아야지.”
데드리언은 그들에게 양 손바닥을 보이며 진정하라 타일렀다. 익숙한 모양새였다.
어느 정도는 말해주리라 생각했기에, 나는 무심히 떠들썩한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웬만하면 빠르게 말해주고 나가줬으면 한다. 괜히 용사 시절이 생각나, 때아닌 추억에 잠길 듯하니 말이다.
‘신.’
어디까지 말할지 조율하는 그들을 두고 신을 불렀다. 대답이 돌아오리란 기대는 없었다.
[흐어엉! 시혀어언!]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머리가 띵 울렸다. 며칠째 오지 않던 신의 등장이었다.
[시현의 동료인 루블리안 진짜 너무 싫어요. 히끅. 저한테 협박이나 하고 있고, 흐윽. 여긴 제가 담당하는 세계가 아닌 데다가, 한 세계에 두 신이 존재하면 안 돼서 허락 맡는 데만 해도 오래 걸리는데 절 놔주지도 않고…. 허어엉. 저 진짜 힘들었어요….]
‘우선 조용히 좀 해봐.’
머리가 어지럽고 찌릿한 감각에 손으로 옆머리를 매만졌다. 뭘 경험했으면 이렇게 한탄하나 싶긴 했지만, 내 머리가 더 중요했다. 안 그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에 혹사당한 머리였다.
‘루블리안이 뭐라고 했길래 그래.’
[제가이쪽세계신한테권한좀달라고허락을구하고있었는데갑자기세계에문제가생긴거예요!]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랩을 하는 수준으로 숨도 안 쉬고 말을 이었다. 방금까지 운 게 맞나 싶었다. 머리가 아까보다 욱신거렸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조곤조곤.’
[네……. 그런데 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루블리안이었어요. 시현 동료요. 그래서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으니깐, 시현이 간 세계와 위치를 알려달라는 거예요. 그걸 알려주지 않는다면 세계를 다 부숴버릴 거라면서요.]
내 말대로 조용조용 말하던 신의 목소리가 차츰 하이톤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아무리 말려봐도, 끝내 목소리가 높아지던 걸 기억한다. 나는 말리기를 포기했다.
루블리안 이야기에 반사적으로 반문한 내 잘못이다.
[거기다 대고 제가 ‘여긴 시현이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도 있는 세곈데, 휘말리면 어쩌려고요?’라고 하니까, 시현 찾으면서 다른 세계를 반파시킨다고 노선을 튼 거 있죠! 진짜 절 피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게 분명하다니까요? 시말서에서 이제 겨우 벗어났는데!]
‘설마 알려줬어?’
[…….]
‘…….’
도르륵. 눈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신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 그게 다는 아니고 어느 정도 추려서만 알려줬어요. 반파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 열다섯 개의 세계만 뒤지게 했어요. 그게 제 최선이었어요…. 나름의 시간 벌이였는데.]
‘…….’
신은 세계가 우선이니, 이해가 가는 것과 별개로 할 말을 잃었다. 열다섯 개라니. 지금은 어디지? 마음이 급해졌다. 루블리안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신에게 다시 질문하려는 찰나였다. 이야기가 다 끝난 듯 그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따 더 이야기해.’
말을 하냐 마냐로 자기들끼리 다투던 끝에 결론이 나왔는지 데드리언이 다가왔다.
“미안. 조금 걸렸지? 이제 얘기해줄게. 우선, 혹시 모르니까.”
그리 말한 그가 가볍게 손짓했다. 이미 이 방 전체를 감싸던 신성력 막이 한층 더 두터워졌다. 소리 차단용으로 있던 걸 더 강화한 것 같았다.
셋 중 마법사는 없는 데다가, 마법으로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이길 자가 없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신성력을 쓴 건 현명했다. 이 저택에 신성력 무력화 마법이나, 물질이 있지 않다면 말이다.
“음, 시현은 이쪽 시현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
“아무것도.”
“그럼 곧 있으면 해가 밝으니, 중요한 부분만 이야기할게. 별로 안 길어.”
중대 발표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그가 심호흡했다. 여상스러운 미소였으나, 그 안이 곪아있는 게 보였다. 어떤 말을 하려는 건지 의아할 차에,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방금 말했듯, 시현은 용사였어. 그리고 마왕이기도 했지.”
“……뭐?”
데드리언을 지나, 알리와 몬트리오에게 시선을 던졌다. 표정 변화가 없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닌 모양이다. 머리가 내용을 받아들이질 못했다.
용사와 마왕.
그 둘은 대척점에 있었다. 서로를 죽이는 숙명을 가졌다. 무릇 마왕이란, 용사란,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용사였으면서 동시에 마왕이었다니. 허무맹랑한 소리다. 저들의 꾸밈없는 반응이 아니었더라면, 더 들어볼 것도 없이 자리를 떴을 테다.
물론 거짓일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의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나는 더 말하라는 듯 연푸른 눈동자를 직시했다.
“원래부터 마왕이었던 건 아니야. 원래 존재하던 마왕의 목을 벴을 때, 갑자기 눈에 핏발이 서선 악에 받쳐 소리 질렀지. 그런 뒤에 변했어. 마왕으로.”
하늘에 맹세코 거짓 한 점 없단 얼굴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신의 축복 및 가호를 받았다면, 마왕이 되지 않는 게 옳았다. 분명히 신은 내게 그리 고했다. 그런데 무슨 죽기 전 후계를 정하는 것도 아니고. 마왕의 목을 벤 순간 마왕으로 변하다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흐름이었다.
‘신. 저게 사실이야?’
[네. 사실이에요. 전에도 예외가 있다고 하려 했는데, 그땐 시현의 동료 때문에 말이 끊겼었잖아요. 게다가 이걸 정확히 이해하려면 옛이야기까지 알아야 해서 시간도 걸리거든요……. 우선적으로 답하자면, 시현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신의 축복과 가호를 받아도 마왕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는 긍정에 헛숨을 들이켰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파악하기에 앞서 내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옛이야기를 하지 않고 설명하려니까 어렵긴 한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욕망을 한 번에 터트리면 돼요. 차곡차곡 쌓아둔 욕망을 한 번에 터트리면, 그 찰나의 틈을 타 마왕으로 변모시키는 게 가능하거든요.]
꼭 누군가 뒤에서 욕망을 통해 마왕으로 변화시킨다는 뉘앙스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데드리언의 이야기를 듣던 중이었기에 나머지는 조금 뒤에 묻기로 했다.
“계속해.”
“그리고 변한 시현의 목을 벨리텐트가 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