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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19)화 (19/112)

019.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8)

대책 없이 해맑은 낯에 나는 할 말을 잃고 헛숨을 내쉬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좀 더 어른스럽고 농익었단 게 보자마자 와 닿았는데, 알리는 그냥 알리였다. 약간의 어른스러움을 저 해맑음이 무마시켰다.

내가 멈춰있는 동안, 알리는 자연스럽게 창을 넘었고 뒤이어 데드리언과 몬트리오까지 합류했다.

변하지 않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연푸른 머리카락과 연푸른 눈동자. 어깨 근처에서 흔들리는 밤색 머리카락과 샛노란 눈. 둘은 알리보다 훨씬 어른이라는 느낌을 풍겼다.

“오랜만이다.”

“안녕, 시현~.”

몬트리오는 딱딱하게, 데드리언은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세계가 다르지만, 성격은 여전해 보였다.

……그런데 왜 오랜만이라는 말이 나오지? 나를 평행 세계 백시현으로 보고 있는 건가 싶었다. 뾱 소리에 유의하며 한발 물러서서 셋을 바라보는데, 몬트리오의 눈에 담긴 지독한 그리움이 보였다. 나이가 든 데드리언은 능구렁이가 다 된 듯 표정을 읽을 수 없었고, 알리는 오히려 내게 반감을 느끼고 있었다.

“와. 진짜 시현이랑 똑같이 생겼네요. 여전히 스물두 살인가?”

코앞까지 도달한 알리가 내 시야를 가렸다. 순수할 것만 같은 얼굴과 다르게 다분히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내 동료 알리도 이랬다. 아닌 척 유순히 웃으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불만을 표했다.

“알리.”

“알겠어요, 알겠어. 그만할 테니까, 무서운 눈빛 좀 치워요, 몬트리오.”

졌다는 듯이 알리가 뒤로 물러났다.

경고를 날린 몬트리오는 여전히 추억에 잠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움이 만면에 떠올랐다. 정말 이상했다. 그는 날 통해 다른 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평행 세계 백시현이 아닌 ‘나’를 아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아는 건지 경로를 알 수 없었다.

나는 평행 세계의 인물을 모르는데, 이쪽 루블리안과 몬트리오는 어째서 평행 세계의 백시현이 아닌 ‘나’를 아는 것처럼 구는 건지. 잠시 활동을 멈췄던 뇌가 다시 꿈틀거렸다.

“날 알아?”

일부러 몬트리오에게 시선을 두고 말했다. 평행 세계의 이가 아닌 걸 아느냐는 내포된 뜻을 알아차린 듯 일순 그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안다. 내가 어떻게 너를 모를 수가 있겠나.”

“어떻게?”

“…….”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너는 나를 어떻게 알지?”

지금 대답을 듣는다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나를 아는 이유도 함께 알 수 있을 테다. 나는 몬트리오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는 몇 번 입을 우물거리다 입술을 안쪽으로 말며 꾹 다물었다.

“자자. 그 얘긴 나중으로 미루고~.”

이번에는 데드리언이 내 시야를 가렸다. 얼굴이 약간 수척한 것도 같았다. 마왕을 죽이는 데 일조하여 공을 세웠다면, 더 살이 올랐어야 할 텐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행과 백시현의 행방 등 평행 세계에서 머무르는 짧은 시간 동안 알아낸 것들이 심상치 않아서 그런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점이 눈에 들어왔다.

“시현, 너 정말 무서운 걸 잘도 신고 있구나?”

“와, 저거 뭐예요? 괜히 정령들이 기겁하면서 도망치는 게 아니었네. 무슨 마법인지는 몰라도 엄청나네요…….”

알리가 질린다는 기색으로 몸을 으슬으슬 떨었다. 그러고는 뒷걸음질하며 거리를 벌렸다.

정령은 자연적인 마력은 괜찮아했지만, 비자연적인 마력은 좋아하지 않았다. 거의 기피하다시피 했다. 자연 친화적인 성격 때문이라나. 그래서 대체로 정령사들은 정령에 어느 정도 동화되는 탓에 마법사들과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마법사들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그저 체내에 있는 마력으로 마법을 쓴다는 이유 하나로 미움받는 것이니.

“이거 벗으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안 불편해요? 땀은 안 차요? 어떻게 씻어요?”

물음표 공격이 연달아 들어왔다. 그 와중에 땀은 안 차냐니. 생각지도 못했던 점이었다. 평행 세계로 넘어와서 제정신이었던 시간이 채 하루가 안 되니, 불편함을 아예 못 느끼고 있었다. 뾱뾱 소리만 제외한다면.

“알리, 그만~ 시현도 모를 거야. 저거 마력이랑 신성력 제어도 하고 있어서 시현은 지금 마력의 흐름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상태일 테니까.”

폭주하는 알리를 말리며 데드리언이 나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내려간 눈꼬리에는 확신이 아롱아롱 맺혀있었다. 확신까지 하면서 굳이 확인하는 게 그답다.

“맞아.”

“왜 안 벗었어?”

마력과 상반되는 신성력을 가진 데드리언은 의외로 마법에 박식했다. 신성력과 마력의 응용 방법은 알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기도 했고, 그가 직접 공부를 했으니 잘 아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선천적으로 감각과 흐름을 읽는 눈이 좋은 것도 한몫했다. 그러니 벗으면 발목이 나가떨어진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묻는 이유는 뻔하다. 힘이 많이 들긴 하지만, 신성력으로 절단된 다리를 재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리란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벗으면 알람이 가는 마법을 안 걸었을 리가 없잖아.”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무심하면서도 단조로운 음이 목구멍에서 나왔다.

데드리언은 언제나처럼 웃는 그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나직이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새 벨리텐트를 파악했네.”

방 안이 너무 조용하여, 다들 들리는 크기라 혼잣말이 맞나 싶긴 하지만.

“과거의 잔재일까, 아니면 다른 벨리텐트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일까.”

둥글어졌다가 가로로 늘어졌다가 하는 입술이 만든 문장 중 과거의 잔재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귓속에 물이 고인 것처럼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과거……. 역시 한 번 만난 적이 있으나, 내 기억에 문제가 있는 건가. 하지만 한사코 기억을 더듬고, 손댄 흔적이 있나 찾아보아도 멀쩡하기만 했다.

데드리언은 신경 쓰이는 말을 던지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냥 넉살 좋게 웃었다. 내 동료인 데드리언이 사고를 친 뒤 몬트리오에게 잘못을 떠넘기며 웃던 때랑 아주 똑같다. 당하는 기분은 역시 좋지 않았다.

“왜 왔어.”

이 건에 대해서는 연신 한숨을 내쉬는 몬트리오에게서 답을 얻어내기로 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라면 이미 침입한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내 방을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네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나?”

한발 물러서 상황을 지켜보던 몬트리오가 나를 또렷이 직시했다. 샛노란 눈동자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그의 눈매가 매의 양상을 띤다. 꼭 사냥하기 직전의 먹잇감을 보는 것처럼 집중한 모양새였다.

“지금 그 말은 꼭 내 세계로 돌려 보내주기 위해 왔다는 말로 들리는데…… 어째서지?”

평행 세계에 와서 얻는 거라고는, 헛소리 면역과 의문뿐이다. 깨어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물음표가 머리에서 떠나간 기억이 없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데드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같았어도 의혹이 들었으리란 태도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알리가 튀어나오듯 입을 열었다.

“당연히 복수죠!”

……복수? 예상에 없던 말이었다. 알리한테서 멎은 시선을 움직여 나머지 둘을 바라보니, 그들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 있었다. 마치 말괄량이 여동생을 둔, 형제 같은 모습이었다. 순전한 단독 행동인가 보다.

“무슨 복수인데.”

“그거야 당신 때문에 희생된,”

“알리 레디언!”

“알리.”

첫 번째가 몬트리오였고, 두 번째는 데드리언이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알리를 불렀다. 끝맺어지지 않은 문장의 이어질 말을 막듯이.

“나 때문에 누가 희생됐는데?”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는 여전히 높낮이 없이 고요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족한 정보를 채우려면 그들에게서 하나라도 더 캐내야 했다. 알리에게 향하는 시선이 노골적인지, 몬트리오는 은근슬쩍 알리의 앞을 막아섰고 데드리언은 대놓고 훼방을 놓았다.

그에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알리가 있던 자리만을 응시하자, 데드리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표정이 토벌 중 정해놓은 전략대로 행동하지 않는 이를 볼 때랑 똑같았다. 계획에 없던 변수에, 속으로 인생 한탄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알리의 말은 신경 쓰지 마. 네가 겪은 세계는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는 벨리텐트랑 사이가 심히 안 좋거든~.”

적당히 넘기려는 게 뻔히 보였다.

나는 차근차근 단서를 정리했다. 나를 위한 희생양.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 그리고 알리가 복수를 말할 만큼 정을 줬으면서 나와 연관성이 있는 사람. 조건을 조합해보면 딱 답이 나왔다.

평행 세계의 백시현이다.

“어쨌든 탈출하려는 거 아니야? 도움, 안 필요해?”

생각을 오래 하면 내가 알아내리란 걸 아는 듯 괜한 수작을 부린다. 이미 생각 정리가 끝나 정답까지 도출해냈는데 말이다.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지. 나는 미심쩍다는 감정을 얼굴로 아주 미약하게 드러냈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것처럼.

나를 잘 알고 있는 내 동료라면 속지 않을 테지만, 이쪽은 나를 잘 몰랐다. 그 증거로 내 반응을 본 데드리언은 어쩐지 안심한 얼굴이었다. 몬트리오는 평행 세계 백시현이 아닌 ‘나’를 아는 듯했기에 우려가 되긴 했지만, 부러 표정을 확인하지 않았다.

“도움, 필요하긴 하지.”

저 말이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날 모르는 만큼, 나도 그들을 몰랐다. 그저 내가 알던, 내 동료들과 대조하며 유추해 볼 뿐이었다. 경계하고 또 의심하면서.

“그런데, 그 전에 알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는데.”

대답해줄 거냐는 뉘앙스를 풍기자, 데드리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답을 해줄지 말지는 듣고 결정하겠다는 몸짓이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목소리가 커서 안 들킬 리도 없고, 이 저택에 온통 마법이 걸려 있어서 바로 걸릴 텐데.”

“걸릴 거 알고 온 거야. 네가 쓰러지기 전, 벨리텐트가 일부러 몬트리오한테 말을 흘렸거든. 백시현을 닮은 사람이 여기 있다고. 어차피 벨리텐트는 너와 우리를 만나게 하고 싶어 했으니까, 막을 필요가 없는 거지. 반쯤 도박이긴 했지만.”

당당하기 짝이 없었으나, 돌파구가 없을 때는 만들어서 직진하는 게 데드리언다웠다. 계획을 짠 것도 실행에 옮긴 것도 다 데드리언이었을 테다.

“네가 쓰러진 지 이틀이 지났으니까, 그 이틀간은 허탕을 치긴 했지만.”

“내가 오늘도 안 일어났으면, 내일 또 오려고 했나 보네.”

“당연하지. 일어날 때까지 왔을걸.”

능청스럽게 빙긋 웃은 데드리언은 진심이었다. 확실히 얘도 정상은 아니다. 역시 여기도 한 발짝 뒤에서 소름이 돋은 듯 몸을 한차례 떠는 몬트리오가 제일 멀쩡했다.

살며시 고개를 저은 나는 처음 던졌던 가벼운 질문에 이어 가장 궁금한 것을 입에 담았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용사였나?”

말이 뱉어지기 무섭게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데드리언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경계하는 기세가 확연했고 몬트리오는 그대로 굳었다. 마지막으로 알리는…… 분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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