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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18)화 (18/112)

018.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7)

느닷없이 주변이 환해졌다. 얼굴까지 덮었던 이불이 걷힌 탓이었다. 그의 손길에 잡념이 단번에 스러지고 잔혹한 현실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언제 이동한 건지, 바로 옆에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가까워 거리를 벌리려고 하자, 다른 쪽 손이 내 허리를 붙잡았다. 그 손을 치울까 했던 나는 푸른 눈동자에 멈칫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기 전, 보았던 눈빛보다 훨씬 음산했다. 좀 더 있다간 누구 한 명을 찢어 죽일 것만 같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이 반쯤 뱅글 돌아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눈이 돌아갈 일이 뭐가 있을까. 그를 만난 지 며칠 안 된 나로서는 추측하기 어려웠지만, 내게 유난스럽게 구는 그를 상기하면 대략은 파악할 수 있었다.

너, 내가 죽는 게 싫구나. 위험해지는 것도 그렇고.

“내가 다치는 게 싫어? 안 죽었으면 좋겠어?”

높낮이의 변화가 없는 단조로운 물음이었다.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저 어울리지 않게 평화롭던 분위기가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해졌을 뿐이다.

나와 그에게는 이런 게 어울렸다.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고 약점을 잡는. 방금은 꿈에 루블리안이 나온 여파가 커, 경계가 흐릿해졌던 거였다.

서로의 밑천까지 들여다보겠다는 듯 얽힌 시선이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그 미소 속 미묘한 균열이 보였다.

“왜?”

“…….”

“너랑 내가 무슨 사이라고, 내가 죽는 게 싫어?”

그 말에 무슨 버튼이라도 눌린 듯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무언갈 참는 헛숨이 흩어져 나왔다.

“그러게. 자기랑 무슨 사이라고 내가 이러고 있을까. 응?”

허리를 붙든 손이 힘껏 나를 잡아당겼다. 몸이 맞닿았다. 숨결 속에 어울리지 않는 포근한 향이 섞여들었다.

묘하게 루블리안의 체향을 닮아, 친밀한 것처럼 구는 스킨십에 생겼던 거북함이 더욱 커졌다. 살갗은 아니지만, 맞닿고 있는 게 싫었다. 바로 벗어나려 했던 나는 이어지는 물음에 잠시 행동을 멈췄다.

“근데 그런 게 중요해?”

“뭐?”

“중요하냐고, 자기야. 자기가 말했듯 나는 미친 새끼라서, 여기가 돌아버린 새끼라서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해.”

턱을 괴던 손의 검지로 옆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눈꼬리가 뱀처럼 가느스름하게 접히고 피를 적셔 색을 입힌 듯한 입술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이가 도드라졌다. 저런 말을 하면서 환히 웃는 모습은, 그가 완벽히 미쳐버린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원래도 미쳤다고 여겼지만, 정도가 심했다. 너무 돌아버려서 360도는 가뿐히 찍은 뒤, 몇 바퀴를 더 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기야. 내가 미친 새끼인 거 내가 가장 잘 알아. 여길 망가트린 새끼가 나거든.”

뱉어진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특유의 여유로움 가운데 어딘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조심해. 내가 자기를 못 가둬서 저택 내에 풀어놓는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여기도, 여기도….”

허리를 감싸던 손이 이불 위로 내 손목 안쪽을 뭉근히 매만지는 동시에 그의 허리가 느릿하게 움직이더니 맞붙은 허벅지를 마찰시켰다. 중간에 끼인 얇은 이불이 사브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시발. 잘 뱉지도 않는 욕이 나왔다. 나는 곧장 몸을 물렸다. 내가 벗어나리란 걸 예상한 건지,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서 내려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술을 움직였다.

“다 잘라먹고 나만 보게 가둬버리고 싶은데 참고 있잖아. 응?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말고, 예쁘게 굴자, 자기야. 쓸데없이 똑똑한 머리, 잘 좀 쓰고.”

“내가 내 머리를 너한테 쓸 것 같아?”

“아니. 자기는 안 그러겠지.”

애초에 들으리라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서 굳이 저런 말을 하여 심기를 더럽히는 이유를 모르겠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너무 깊고, 너무 많은 감정이 섞여 있어 명료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너 나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직설적으로 물었다. 혼자 관찰하고 가늠하여 알아내려고 해봤자일 테다. 저쪽이 표정을 잘 감추는 것도 그렇고, 좀 전에 언급했듯 딱 깔끔하게 떨어지는 감정이 없었다. 날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도 명확하게 구별이 되지 않았다. 따지자면 둘 다 섞인 애증 같았다.

내가 뭘 했다고.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평행 세계 백시현 때문에 내게 집착한다고 여기기엔, 나를 삼켜버릴 듯한 저 눈은 나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지 않았다.

“좋아하지.”

느릿한 음성은 큰 변화 없이 평이했다. 제 마음을 인정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며, 무감각했다. 정확히는 그러해 보였다. 화려한 색들이 어우러진 수채화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이 등장한 것처럼.

“그런데 싫어도 해.”

이번에도 싫어한다는 감정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아 이질적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일부러 감정을 조절하는 게 틀림없다는 걸. 대체 얼마나 많이 감정을 숨겨본 건지, 상당히 능수능란했다.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알아보지 못했을 테다.

그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나른히 올라간 붉은 입술 새로 소리를 내뱉었다.

“죽지 않았으면 하는데…… 죽었으면 하기도 해.”

누군가는 저게 무슨 말이냐고 의문을 품을 정도로 모순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공감했다. 이해가 갔다. 저 모호하고 의뭉스러운 말이.

인위적인 빛에 반짝이는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담아낸다. 나를 한 차례 휩쓸고 잠기게 할 것만 같은 눈이었다. 그런데 그 바닷속이, 차가운 심해가 되레 포근하고 안락할 것 같았다. 기이한 감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다시 누워, 자기야.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든.”

더 이상의 물음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이불 한쪽을 들어 올렸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건 선이었다. 더 이야기하다간 속을 들킬 것 같은 불안감에, 다 내뱉어버리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선.

여기서 탈출하기 위해선 심리전에서 이겨야 했다. 나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모르지만, 저쪽은 나를 잘 아는 것처럼 굴었으니. 저 미친놈의 생각이 무엇인지,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해소되는 편이 유리했다. 선을 넘는다면 다 알 수 있으리라. 그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나와 어떠한 연을 가졌는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을 넘을 생각은 없었다. 선을 넘고 알게 된 그의 생각에, 그의 감정에 책임을 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므로.

생각을 끝마친 나는 시선을 떼어 내고, 한 걸음을 내딛다 잊고 있던 뾱 소리에 순간 멈칫했다. ……소리가 났었지. 일어나서 걸을 일이 없다 보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얄미운 새끼. 나는 그를 무시하고는 창 근처로 가 처진 커튼을 걷어냈다. 밖이 온통 캄캄했다. 밤이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의식을 잃었던 건지.

루블리안이 걱정이었다. 주술을 풀지도 못하는데, 이쯤이면 루블리안이 이 평행 세계에 다다랐을 것만 같았다.

“안 와?”

맡겨놓은 것도 아니고 재촉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바라보자, 그는 무척이나 편한 자세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가 차는 동시에 짜증이 났다. 이 사태를 벌이고도 한결같은 저 여유로움이.

그래서였다. 평소라면 헛소리라 치부하고 넘어갔을 말에 일부러 뉘앙스를 이상하게 꼬아 말을 한 것은.

“같이 자주면, 주술이라도 풀어줄래?”

얽힌 시선이 풀리지 않았다. 외려 더욱 풀기 힘들게 얽히고설킨 채 맞물렸다. 풀렸던 공기가 급속도로 냉랭하게 변했다.

“자기야, 예쁘게 굴라고 한 지 몇 분도 안 지났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짓거릴까. 응?”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느릿하게 물었다. 붉은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눈동자는 매서운 빛을 띠었다. 지지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어 심기가 꼬인 낯이었다.

나는 뾱 소리가 나지 않게 사뿐히 걸어, 침대 바로 앞에 당도했다. 이어 상체를 숙인 상태로 손을 뻗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뺨에 손을 올리고, 그의 고개를 더욱 들어 올렸다.

“왜, 싫어? 주술 푸는 대가로 자주겠다는데, 네겐 이득 아닌가?”

그 순간 강한 힘으로 멱살이 잡혀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들어갈 만한 거리에 얼굴이 있었다. 그것도 여유로움이 미세하지만, 걷힌 얼굴이.

“왜 이렇게 싸게 굴어, 자기야. 진짜 애새낄 죽여 버리고 싶게……. 자기야, 주술 풀어줄 테니까 잘래? 애새끼한테 네 덕에 자기랑 잤다고 하면 애새끼 꼴 볼만 하겠다. 그렇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루블리안을 언급하는 순간, 머리가 얼어붙었다. 진심으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과 주술을 풀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충동적으로 한 말인데 이걸 알면 루블리안이 지을 표정을 생각하니 입이 딱 다물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가 허탈한 숨을 흘리며 내 멱살을 놓았다. 이어 뒤통수를 콱 잡았다가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경고조로 말을 이었다.

“자기야, 괜히 화 돋우지 말고 가서 얌전히 잠이나 자. 진짜 다 잘라버리고 싶으니까. 내일은 착하게, 기절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말하자.”

그 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날 복도로 떠밀고 문을 닫았다. 틈새가 꽉 닫힐 때까지 내게서 떨어지지 않던 눈은 날 정말 감금하고 싶어 했다. 그 충동을 참는 게 보였다.

그 충동을 참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방에서 빠져나오니 팽팽하던 공기가 느슨해졌다. 숨통이 트였다. 다시는 저 미친놈 앞에서 저런 말을 하면 안 될 듯했다. 그때에는 정말 감금당하리라.

복도에 서서 한숨을 한 번 내쉰 나는 구조를 익혀볼까 하다 그만뒀다. 마력을 제어 당하지 않았더라면, 라이트 마법과 탐지 마법을 쓰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을 텐데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렁줄을 당겨 시종을 부르거나, 램프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하려면 어차피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게다가 아무도 없으니, 뾱뾱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배정된 방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정신을 맑게 했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헝클어지는 앞머리를 정리하지 않고 바람을 맞았다.

평행 세계 백시현.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나의 관계. 뒤늦게 이어지는 나를 기절시킨 소리에 관한 생각까지. 뭐 하나 확실하게 끝맺은 게 없어 머릿속이 혼잡하기만 했다.

그것 외에도 풀지 못한 주술이라든가, 여기서 탈출할 방법이라든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나를 따라오지 않게 할 방법이라든가. 해결해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유일하게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신도 곁에 없었다. 내 곁에 있었으면 바로 머리를 어지럽히며 조잘거렸을 테다. 머릿속이 고요한 걸 보면 아직 오지 않은 게 맞았다.

쉴 새 없이 머리가 굴러가던 차였다. 열린 창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암살자는 아닌 것 같고. 움직임이 날렵하고 조심스럽긴 했으나, 암살자들 특유의 귀신 같은 걸음걸이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도착지는… 내 방인가. 창문을 닫아봤자, 들어오려고 한다면 못 들어올 게 없었다. 나는 창문 바로 옆 벽면에 몸을 기대고 기척을 죽였다. 청각이 발달한 덕에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세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진짜 이렇게 들어갈 생각인가? 역시 이건 아닌 것 같,”

“몬트리오. 사람이 융통성도 있어야지.”

……데드리언, 몬트리오.

“아니, 이건 융통성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루블리안, 그 자식이 우리가 침입한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우리를 두고 볼 것 같은가!”

“아이고, 귀청이야. 이러다 귀 떨어지겠네~ 자는 사람도 다 깨겠고~.”

“윽.”

“그래, 몬트리오. 조용히 하고 확인이나 하자!”

알리까지. 헛웃음이 나왔다. 익숙하다 싶었더니, 여기 세계의 동료들이었나.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한패는 아닌 것 같긴 한데…… 데드리언이 말한 대로 그 미친놈이 이들이 침입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대체 뭘 노리는 건지. 머리가 한층 더 복잡해진다.

“어? 창문은 열렸는데, 없대! 실프가… 어! 벽에 붙어있다는, 데…. 우리가 여기 있는 거 이미 알아차렸나 봐.”

끝으로 갈수록 어정쩡해지는 목소리가 내가 아는 알리랑 똑같았다. 창틀에 불쑥 거친 손이 올라왔다. 곧이어 귀밑에서 살랑이는 검붉은 머리카락이 방안에 들어오고 새빨간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 안녕하세요?”

내가 아는 알리랑 거의 완벽히 일치했다. 골 때리게 해맑다는 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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