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6)
이후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쓰러진 백시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을 뿐이다.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
누구의 손에도 백시현을 맡기지 않으리란 의지가 공고했다. 적막 속, 잠시 눈치 보던 알트는 자신을 부른 이유가 이게 끝이라는 걸, 몇 년을 밑에서 구른 짬으로 알아차렸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몇 번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자, 알트의 예상대로 벨리텐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얼굴을 찌푸리니 더욱 사납기 그지없다. 우아하고 귀족적인 낯이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오싹했다.
“눈알 굴리는 소리, 시끄러우니 나가.”
“예.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걸 감추지 못한 알트가 재빠르게 등을 돌렸다. 그러곤 살포시 문이 열렸다 닫혔다는 것도 모르게끔 소리를 죽이며 밖을 나섰다. 커다란 방에는 루블리안 벨리텐트와 의식을 잃은 백시현만이 남았다.
푸르고 깊은, 어딘가 미쳐버린 눈동자에 오밀조밀한 얼굴이 담겼다. 벨리텐트는 손을 뻗어 엄지로 백시현의 눈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보드라운 촉감 사이로 종종 속눈썹의 까끌함이 느껴졌다.
벨리텐트는 억지로라도 눈꺼풀을 들춰 눈동자를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얼른 눈을 떠줬으면 좋겠다. 그 눈에 경멸이든, 분노든, 뭐든 담아도 좋았다. 우선은 그저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색을 품은 눈동자가 자신을 비춰주었으면 했다.
반대로 이대로 영영 눈을 감아주었으면 하기도 했다. 다른 애새끼 따위를, 다른 ‘루블리안’따위를 사랑하다니. 이번에는 왜 이렇게 변수가 많을까. 벨리텐트의 머릿속에 백시현의 행적들이 스쳐 지나갔다. 잠든 본인은 기억에도 없을 일들이었다.
눈가를 만지던 손이 내려갔다. 볼을 스치듯 지나가고 도착한 지점은 목이었다. 커다란 손이 가늘지만은 않은 하얀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손에는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난 널 못 죽여.”
그리고 너도 날 못 죽이지.
느릿한 말씨에는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증오하는 것 같기도 한, 모호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여전히 창백한 낯을 눈에 새길 것처럼 응시했다. 눈이 돌아가려는 것을 막는 실낱의 정신을 붙잡을 방법은, 백시현이 살아있다는 걸 끊임없이 확인하고 되뇌는 것밖엔 없다는 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목을 잡고 있던 사람치고는 모순적이기 짝이 없었으나, 언제는 인간이 항상 한결같기만 했나.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예상치 못하게 백시현이 잠든 시간이 길어졌던 나흘처럼, 내내 눈을 감은 백시현을 응시했다. 눈꺼풀이 들리기 전까지는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듯이.
_oOo_
“리안. 재미없지 않아요? 단둘이 도망가지 않을래요?”
발코니 난간에 등을 기댄 채로 루블리안이 눈을 접어 웃었다. 뽀얀 뺨에 선홍빛이 감돌고 붉은 입술이 시원한 선을 그렸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금색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살래살래 움직였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그는 유독 빛이 났다. 하늘에 떠 있었다면 필시 별이라고 착각했을 테다. 조금 멍한 기색으로 나는 그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네?”
대답을 재촉하는 되물음에는 같이 가리란 미래를 아는 듯 확신이 어려있었다. 루블리안의 예상은 틀리질 않았다.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내밀어진 흉 없는 손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삶에서 가장 빛나는 이를 찾아버렸는데, 상냥함과 애정을 무한대로 주는 사람을 찾아버렸는데, 그 다디단 애정을 내 입을 벌리고 다 먹으라는 듯 쏟아붓는데. 그런 사람을 어떤 이가 거절할 수 있을까.
손가락 사이사이에 하얗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들어찼다. 어두운 밤의 찬 기운 따위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뜨거운 열기를 지니고 있었다.
손이 빈틈없이 맞닿은 순간, 나는 눈을 떴다. 사위가 온통 밝았다. 떠진 실눈 사이로 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루블리안.”
“왜 불러, 자기야.”
자기란 단어에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지고,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시야에 잡히는 이는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이었다. 방금까지 내게 애정이란 애정을 모조리 쏟는 루블리안이 아닌.
……꿈이었구나. 깨달음이 찾아온 동시에 자조했다. 얼마나 보고 싶었길래, 무의식의 반영인 꿈에 나타나는 건지. 루블리안을 타일러 원래 그의 세계로 보내고 내 삶을 살아야 하는 주제에 웃기기 짝이 없다.
저 때가 아마 루블리안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한 날이었을 거다. 그래서 기억이 더할 나위 없이 선명했다. 그때의 얼굴, 날짜, 온도, 옷차림 등 기억나지 않는 게 없었다. 아마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을 테다.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뺨을 꽉 그러쥐는 손에 과거를 상기하던 머리가 현재를 직시했다. 상냥함을 가장한 목소리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눈치가 빠른 놈이니, 깨어나자마자 부른 이름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란 걸 알아차린 게 아닌가 싶다.
대답을 조르는 말에 입을 벙긋하지 않았다. 널 부른 게 아니라는 말을 할까 싶었지만, 이미 본인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무관심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자, 그가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건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심해 같은 푸른 눈동자가 거친 빛을 띠고, 뺨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으니 말이다.
“자기야. 들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해. 응?”
“너 부른 거 아니니까.”
기어코 말을 내뱉게 한다. 그는 좋으면서도 싫은 듯한 미묘한 낯으로 손에 들인 힘을 덜어냈다. 이어 둥글게 엄지를 굴려댔다.
멋대로 뺨을 만지는 손을 쳐내고는 싶은데 방금 꾼 꿈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움직이는 게 내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는 걸로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밝았던 주변이 순식간에 한층 어두워졌다. 이불이 얇아 빛이 어느 정도 통과되어, 상대적으로 어두워진 거였다.
“윽. 너 뭐해.”
배 부근에 무언가 올라온 듯 갑작스럽게 무게감이 들었다. 진동이 울리고 동글한 느낌이 드는 것이, 머리를 내게 기댄 듯했다.
“글쎄……. 일어나자마자, 애새끼 이야기하는 자기에 대한 심술?”
어이가 없었다. 그럼 내가 일어난 직후 자기 이야기라도 해야 했다는 건가. 바랄 걸 바라야지. 헛소리에는 먹금이란 걸 다시금 떠올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널찍한 침대의 왼편 끝에 있던 나는 꿈틀거리며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묵직한 머리가 배에서 떨어져 나갔다.
“자기가 또 쓰러져 있던 동안, 정말 잠자는 숲의 공주라도 되고 싶은 것 같아서 황녀를 죽이고 자리나 얻어 줄까 했는데. 매정하네.”
“그딴 미친 짓 하지 마.”
등골이 서늘했다. 하도 미친놈 취급을 당해서 더 돌아버린 것도 아니고. 미친 소리를 여상하게 해대고 있다.
“미친 새끼가 미친 짓 하는 게 뭐가 문제야, 자기야. 별은 못 따다 줘도 황족의 목 정도는 따다 줄 수 있어.”
나긋나긋한 음성이 귓전을 간지럽혔다. 얇지만 이불이라는 가림막이 있어도 느낌이 그러했다.
“별도 그 공주 자리도 필요 없어.”
특히 공주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 짓씹듯 말했다.
“왜? 난 자기가 공주면, 공주 대접 제대로 해줄 자신 있는데.”
“쓸데없이 잘 굴러가는 머리, 여기다 쓰지 그래. 공주는 애초에 여자한테 쓰는 말이야. 정실 왕비가 낳은 딸이라고.”
“자기야, 내가 빈 머리통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머저리도 아니고. 뜻은 당연히 알지. 근데 자기는 왕자보단 공주가 더 잘 어울리니까 그런 거지. 입술이 둥글게 말리는 것도 그렇고 어감이 더 예쁘잖아.”
논리라고는 하나 없는 헛소리가 끝맺어지자 툭. 옆구리에 무언가 닿았다.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또 머리인 듯했다. 피할까 하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
평소라면 이 머리를 피해 방을 빠져나가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나, 하필이면 저 꿈을 꾼 탓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저 때가 너무 찬란했다. 함께라는 게 당연했던 시기라서, 동료들과 즐거웠던 추억이 가득 쌓인 시기라서, 지금 상황과 너무나 비교되는 탓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허공을 떠도는 공기가 되고 싶었다. 그냥 의지 없이 흘러가는 대로 떠다니고 싶었다.
몇 년간 헤어짐을 연습했고,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이 빨랐기에 원래 세계에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박시찬과 이리형 그리고 김민식도 있었으니, 그들이 곁을 채웠으니, 정말 괜찮았다. 불현듯 떠오를 때가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지만 정말로 괜찮았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루블리안이 다시 내 삶에 얼굴을 들이 밀은 게 문제였다.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훨씬 괜찮을 수 있었고, 이깟 꿈에 현실과 그때 당시를 비교하며 무기력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다 루블리안 때문이다. 정말 보기 힘든 투정과 같은 한탄이 절로 나왔다.
왜 하필이면 애정을 떠나갈 사람인 내게 준 건지. 루블리안도 보는 눈이 한참 없었다. 줄 거면 같은 세계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줬어야지. 애정을 돌려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줬어야지. 그러면 이런 생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있지, 자기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내 생각을 끊어냈다. 비밀을 캐묻는 듯한 은근한 목소리였으나, 속내에는 무언가 들끓고 있는 게 느껴졌다. 고작 ‘있지, 자기야.’라는 다섯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방에서 뭘 봤어? 왜 쓰러진 거야?”
아. 그제야 나는 머리를 꿰뚫는 소리에 기절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꿈에서 루블리안이 나온 게, 전후 상황을 모두 잊게 했다. 기절했다가 깨어났는데, 어떻게 그 전 상황을 떠올릴 생각을 못 하는 건지.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새삼스럽게 루블리안이 나한테 그만큼 커다랗고, 큰 영향을 주는 존재라는 게 실감이 났다. 확실히 존재감 하나는 엄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