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5)
죽이라는 목소리에 온몸에 식은땀이 축축이 배었다. 머릿속이 강제로 뒤집히는 느낌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정신력이 약한 이들은 이미 쓰러지고도 남을 수위의 고통이었다.
이 끔찍한 고통을 떨쳐내려면 우선 소리와 멀어져야 했다. 이 상태로는 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호흡이 힘들어져 느릿하게 숨을 뱉고 들이켰다. 이어서 허벅지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고 해봤지만, 시도에 그쳤다. 소리가 점점 더 거세진 탓이었다.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소리는 그야말로 날 것과 다름없었다. 몸을 뜻대로 가눌 수 없었다. 그간 억누른 나날의 한을 오늘 갚겠다는 듯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절로 눈가가 찡그려졌다. 좁아진 시야 사이로 바닥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쳐버리겠다. 소리가 머릿속에 들어차 이곳저곳을 제멋대로 휘젓고 있는 통에, 잠깐 생각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다.
눈앞이 흐릿했다. 숨이 점점 턱 막혔다. 동시에 목소리가 일컫는 대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죽여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소리가 나를 조종하려 하고 있었다. 억제하기 힘든, 오래 묵힌 원망 어린 비명에 휘둘리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했다.
가쁜 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꾸만 팔에 힘이 빠져 손이 미끄러졌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도대체 이 소리는 뭐지? 의문이 든 순간, 나는 이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대처를 못 하게 하려는 듯 생각하면 할수록 소리가 거세졌다. 악물었던 입에선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최대한 머리를 비우고 호흡을 골랐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잡히니, 정신을 꽉 붙잡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알 수 없는 소리에 점점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의식이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빠져나가야 하는데,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상체는 기울어진 채였고, 뺨은 바닥과 맞닿았다.
점차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오고, 눈이 가느스름해질 무렵. 잡아먹을 듯 커다래진 목소리 사이로 미약하게 구두굽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아닌 귀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가늘어진 시야 사이로 검은색 구두가 흐리멍덩하게 보였다. 이 구두의 주인이 누군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다.
그가 왔으니 더욱 정신을 붙잡고 있어야 함을 알았음에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불행히도 한계에 다다랐다.
감각이 아득히 멀어졌다. 암전이었다.
_oOo_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느닷없이 백시현의 신발에 걸어놓은 마법 중 하나에 움직임을 감지하지 않았다면 필시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계획대로 몬트리오 알레스칸에게 백시현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도록 이야기를 흘렸고, 그는 곧바로 미끼를 물었다. 타이밍 좋게도 백시현이 도서관에 있을 때 몬트리오가 저택에 도착했다.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백시현은 의도한 대로 숨겨놓은 방이 있는 곳에 들어갔다. 이제는 몬트리오와의 쓸데없는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한 뒤 늘 그랬듯 몬트리오가 그 방으로 향하기만 하면 됐다.
“사실대로 말해. 정말 ‘백시현’인가?”
“내 ‘자기’지.”
‘백시현’이냐는 물음에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자기’라고 정정했다. 그것은 몬트리오가 말한 ‘백시현’과, 루블리안이 말한 ‘자기’는 명백히 다른 인물임을 의미했다.
“하…….”
허탈한 숨이 응접실 가득 울렸다. 착잡해 보이는 그와 달리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태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당연한 일을 했는데 왜 유난이냐는 표정이었다. 몇 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 몬트리오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걔가 원했나?”
“몬트리오.”
“걔가 원했냐는 거다. 솔직하게 걔가 이걸 원할 리가 없지. 그런데 넌, 도대체….”
“몬트리오 알레스칸.”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말을 자르며 재차 호명했다. 두 번째로 불린 이름에는 성이 따라붙었다. 이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될지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냐는 눈짓은 덤이었다.
명백한 굴복의 뜻이 담긴 무형의 기운이 몬트리오를 내리눌렀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선을 넘는다면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만 마시고 돌아가. 더 돌아다니다 내 ‘자기’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네.”
느릿한 음성은 누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명백하게 나타냈다. 그는 명령과 흡사한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몬트리오를 흘기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고풍스러운 문손잡이를 잡을 때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생각했다. 이제 곧 몬트리오가 여느 때와 같이 말할 것이다. 그곳에만 들렀다 가겠다고.
참으로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한다 한들 속죄가 가능할 것 같나. 그냥 더럽게 나쁜 새끼라는 걸 인정하는 게 훨씬 빠를 텐데. 죄책감을 느끼는 게 우습기만 했다. 덕분에 계획 짜기는 쉬웠지만.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백시현에게 걸어놓은 마법이, 그것도 몸이 위협당할 시 알림이 오는 마법이 발동되었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낯을 빠르게 굳혔다.
그는 곧장 몬트리오가 응접실을 나오지 못하도록 구속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고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소리치는 몬트리오를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서둘러 백시현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보이는 광경에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온통 커튼이 쳐져 있어 컴컴하고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 백시현은 온몸의 힘이 빠져 바닥에 늘어진 채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땀을 얼마나 흘린 건지, 몸에 옷이 달라붙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불규칙한 숨소리와 함께 간간이 굽은 등이 들썩거렸다.
멍청하게 그 모습을 얼마나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린 벨리텐트는 저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이어 백시현을 추슬러 안아 들었다.
몸이 차갑다. 눈을 감은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뺨과 입술에 혈색이 돌지 않았다. 땀에 젖은 머리는 축축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무심코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감히…….”
화가 치솟았다. 이 장소를 전부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만든 범인을 찾아 목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극심한 분노에 한 줌 정도 되는 이성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체내의 마력이 그의 분노에 감응하듯 불안하게 일렁였다.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겨우 이성을 붙잡은 건, 순전히 조금 전보다 찌푸려진 백시현의 얼굴 덕이었다. 공주님 안기를 하는 와중에,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가니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백시현을 한 번 내려다본 그는 이내 시선을 들어 올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행 세계의 백시현이 머물렀던 이곳은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위험한 것은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 주술을 걸어놓았으니, 괜한 물욕에 이상한 것을 사 놓았을 리도 없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저택에 걸린 마법이 감지하고도 남았다.
차질이 생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차질이, 백시현을 이 꼴로 만들었다는 게 무척이나 거슬렸다. 싹 다 쓸어버리고만 싶었으나, 지금은 쓰러진 백시현이 먼저였다. 먼지가 가득한 방을 나온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마법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목적지는 그의 침실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눕는 건지.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턱 밑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주고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결 좋은 금발이 흐트러지고, 사나운 빛을 내는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똑똑. 깔끔한 두 번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이어서 보좌관, 알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날린 마법 전령 때문이었다.
“들어와.”
알트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겨우 한 발을 내디뎠을 때, 그는 절로 입술이 바싹 마르고 침을 삼키게 되었다. 그만큼 벨리텐트의 기세가 무척이나 흉흉했다. 지금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응접실에 있는 몬트리오 알레스칸. 내보내.”
“네.”
“그리고 ‘마왕’ 백시현이 썼던 방. 싹 다 불태워. 내 눈에 안 띄게 처리해.”
그 말에 알트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용사가 아니라 마왕이었다.’, ‘신전이 이상한 예언을 알렸다.’, ‘불길한 징조가 아니냐.’ 등등 많은 이야기가 사람들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정보 길드에 대놓고 말을 흘린 탓이었다.
이후 확실한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고, ‘용사’였던 이가 사실 ‘마왕’이 되어 죽었다는 말이 진실 판정이 났다. 그 이후는 난리가 났다.
무려 세계를 구할 용사가 마왕이었단 것에, 잘못된 예언을 내린 신전의 권위가 실추되고 백시현이 쓰던 곳곳은 불길하다고 여겨 인적이 끊어졌다. 그곳들은 삽시간에 폐허로 변했다. 벨리텐트의 저택에 있던 백시현이 쓰던 복도 맨 끝 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불길한 곳을 대체 누가 들어가려고 하고, 없애려 할까. 심지어는 몇 년이 지난 탓에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을 터였다. 음습하고 텁텁한 공기가 가득 공간을 메우고 있으리라.
거기다 저길 루블리안 벨리텐트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인간은, 아마 없다. 존재하면 그건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닐 테다. 알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대답, 안 하나?”
그렇다고 해서 저기다 대고 ‘죄송하지만, 그럴 인물이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주십시오.’라고 하기엔 기세가 너무나 매서웠다. 알트는 제 목숨의 소중함을 알았다. 지금은 확실하게 사려야 할 때였다.
“……알겠습니다.”
알트는 눈물을 머금으며 수긍했다. 자신을 대체할 사람은 많았기에, 해고되지 않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조건에 맞는 인물이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수행해야 했다. 이 일에 실패하면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 불 보듯 뻔했다.
알트는 진정으로 백시현이 얼른 깨어나길 바랐다. 차라리 깨어나서 루블리안 벨리텐트의 기분이 나아졌으면 했다. 그렇게 하면 일에 실패해도 어느 정도 생존의 가능성이 커질 텐데. 그만큼 저가 모시는 주인은 백시현에게 미쳐있었다. 사흘 내내 곁을 떠나가지 않고, 자는 모습만 바라볼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