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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15)화 (15/112)

015.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4)

“자기야, 그래서 원하는 건 다 얻었어?”

느른히 올라가는 입꼬리가 거슬렸다. 기초 용어부터 모르리란 걸 알면서 이리 군다. 성격 한번 진절머리나게 더럽다.

“너야말로 다 알면서 뭘 물어봐.”

“관심이지. 자기를 향한.”

느릿하게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살거린다. 루블리안이 눈웃음을 살살치며 사람을 꼬여내는 여우라면, 이 미친놈은 뱀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온몸을 휘감아 사람 숨통을 조일 요사스러운 뱀.

그러나 나는 하와가 아니니, 그딴 뱀에게 넘어갈 일은 없다. 뱀의 요사스러운 혀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을 일은 일어나지 않은 테다.

“개소리 하고 싶으면 딴 데 알아봐.”

“내 진심이 개소리라니. 마음 아프네.”

하나도 안 아픈 표정이었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쯤이면 취향을 의심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내 손에 의해 밀려난 그는 다시 허리를 곧게 폈다. 이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라도 할 모양새였다.

“점심 먹어야지.”

“글쎄. 너랑 먹다간 체할 것 같은데.”

책의 겉표지를 매만지며 심드렁히 대꾸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체는 하지 않을 것 같았으나, 저 얼굴을 보고 밥을 먹는 게 끌리지 않았다.

루블리안과 똑같지만,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얼굴.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색이 아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눈동자는 반짝이는 바다보다는 차갑고 짙었다. 마치 어두운 심해 같았다. 그건 루블리안과 그를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지표와 같다.

하나하나 뜯어보듯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가 어딘가 아니꼬운 듯한 기색으로 눈시울을 가늘게 휘었다. 가는 눈웃음에 반쯤 가려진 눈은 곧 먹잇감을 물어뜯을 타이밍을 재는 뱀을 연상시켰다.

“자기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심히 나긋나긋하고 여유로워, 이채가 스친 눈과 어울리지 않았다.

“자기는 왜 자꾸 날 보면서 애새끼를 떠올리지. 안달 나라고 이러는 건가.”

큰 손이 불쑥 가깝게 다가왔다. 또 내 뺨을 강하게 그러쥐려는 듯했다. 나는 다가오는 손을 파리 쫓듯 내치고는 무감하게 그럴 리가 있겠냐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그가 조금 전처럼 허리를 숙였다. 의자에 등받이가 있어 뒤로 물러나기가 쉽지 않았다.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심해와 같은 눈동자에 내가 담긴다. 꼭 깊은 바다에 잠긴 것 같아 거북하다.

“확실히 봐. 애새끼랑 겹쳐보지 말고, 자기야.”

겹쳐 본 적은 없었다. 눈 앞의 이와 루블리안은 확연히 달랐다. 이현 같은 경우엔, 루블리안이니까, 루블리안이었으니까 그래서 헷갈린 거였다.

또 루블리안 생각으로 빠진 걸 안 건지, 그의 표정이 조금 더 살벌해졌다. 붉은 입술은 둥근 호선을 그렸지만, 그의 속은 둥글긴커녕 모난 모양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방금 그러지 말라고 말했는데 또 그러네. 자기야, 그러면 내 속이 상하겠어, 안 상하겠어.”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뱉어진 말은 스산함을 몰고 왔다. 그에 지지 않으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를 타이르는 어조로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선택을 강요했다. 내 입에서 절대 그가 원하는 답이 나올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짭 루블리안은 내가 자기를 좋아할 리 없고, 그의 말을 쉽사리 따라주지 않으리란 걸 누구보다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나한테 집착하는 이유도 알 수 없다. 나하고 무슨 일로 엮인 건지도 알 수 없다. 온통 예측하기 어려운 베일에 싸인 놈이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내 머릿속 흐름을 읽지 않는 이상,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러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드리워졌던 미소가 약간 걷혔다. 뜻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얼굴이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죄송합니다만, 주인님 급하게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덜컹 소리와 함께 점잖은 남자의 목소리가 서재에 퍼졌다. 살을 찌르던 미묘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무언가 캐낼 기회는 날아간 지 오래였다.

“무슨 일이지?”

“그게…….”

나와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 남자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가 있어서 얘기하기가 조금 곤란하다는 뉘앙스였다.

그러자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나를 힐끗 보곤 가볍게 발을 굴렀다. 사일런스 마법을 쓴 건지 입 모양은 움직였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무슨 일이 생기긴 했나 보다.

이야기를 다 끝낸 듯 나와 그들 사이의 장막이 걷혔고 그는 나를 돌아보며 나른한 음성을 내었다.

“미안한데, 자기야. 점심은 혼자 먹어야겠다.”

“너랑 먹는다고 한 적이 없는데.”

“자기야, 같이 못 먹는다고 심술부려?”

앞으로 헛소리는 먹금이다. 나는 정신이상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응. 좀 이따 봐. 1층 응접실 쪽은 오지 말고. 오면 마법에 발목이 예쁘게, 알지?”

그러나 그런 취급에도 끄떡없는 미친놈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은 후,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 뒤를 남자가 따랐다. 도서관에 혼자 남겨진 나는 고민하다 도주할 때를 위해 구조를 익힐 겸 내부를 둘러보았다.

양쪽이 대칭을 이루듯, 양옆 책장은 똑같은 구간에 놓여있었다. 깔끔하고 단순한 구조였다. 몸을 은신하는 건 무리일 듯했다. 애초에 숨길 생각 없는 감시 행위와 저택 전체에 걸린 마법 때문에 가능하지도 않을 테지만.

계속해서 둘러보던 중 한쪽 벽면에 마력이 부자연스럽게 뭉쳐져 있는 걸 발견했다. 방금 전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이 나타났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마력까지 제어 당하는 바람에, 어떠한 마법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력의 존재 여부와 흐름 정도는 보였기에 눈치챌 수는 있었다.

아까부터 어딘가 비자연적인 마력이 강하게 느껴지더니 여기였나. 잠시간 고민하다 벽면에 손을 뻗었다. 일부러 내가 눈치채길 바라는 듯이 떡하니 도서관에 마법이 걸린 곳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여기에 마법이 걸린 걸 내가 알아챌 거라 이미 예상했을 것이다.

함정인가 싶었으나, 날 죽일 거면 진작에 죽였다. 이리 살려두는 걸 보면 내가 아직까진 그에게 필요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여기 걸린 마법은 공격 마법은 아님이 확실하다.

그리 여기며 벽면에 손을 대자, 무언가 만져졌다. 문이었다. 공개적으로 드러난 게 아니었다. 아마도 마법으로 판별이 안 되도록 가려져 있는 듯했다. 감쪽같은 솜씨다.

마법만 쓸 수 있다면, 탐지나 투시 마법을 써서 어디로 이어지는 확인해볼 텐데, 마력이 제어되어 불가능했다. 가볼지, 포기할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여. ……죽…….’

아까 들었던 끊기는 소리가 머릿속에 또다시 침투했다. 소리는 벽의 문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선명해졌다.

이 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으며, 이 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갈지 말지에 대한 고민은 빠르게 끝났다.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을 믿지 않으나, 그가 날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했다. 나는 문을 당겨 열었고 그대로 어디론가 이동되었다.

……순간 이동 마법이 걸려 있었나.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외진 곳인지, 지나가는 사용인 또한 한 명도 없다.

게다가 복도이긴 하나, 빛이라고는 맨 끝에서 변색한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한줄기가 전부였다. 한 걸음 옮기니 먼지가 부유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방치한 건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여……려. ……죽. ……텐…….’

고개를 휙 돌렸다. 소리가 또다시 들린다. 그것도 조금 더 뚜렷하게.

‘……여. ……블. ……여줘.’

어째서 여기서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건지. 의문투성이였으나, 걸음을 옮기다 보니 소리가 점점 커지는 곳이 있고 점점 작아지는 곳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안내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가 분명해지고 커지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어느 방문 앞이었다.

여기 또한 청소한 지 오래된 듯, 문손잡이에는 먼지가 쌓여있었다. 이쪽 복도 자체가 다른 곳과 달리 먼지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 머리가 헤집어졌기 때문이었다.

‘죽여. ……안을……여. 죽어. 죽……버려.’

나는 먼지 가득한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내 문을 열었다. 불이 켜지지 않은 어두컴컴한 방은 온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널브러진 옷가지가 사람이 살았었다는 걸 증명하는데도.

계절과 맞지 않는 침구와 온통 새하얀 먼지가 내려앉은 텅 빈 책상. 그 옆 책꽂이에도 책 몇 권이 전부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불길함에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 순간 불분명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충격에 나는 휘청거리며 방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윽.”

직후엔 그대로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죽여. 벨리텐트를 죽어버려. 제발, 죽여버려. 죽어. 루블리안을 죽여. 죽여. 죽어. 죽어버려.’

분명해진 목소리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 머리가 깨져버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이어졌다.

죽여. 죽여. 루블리안을 죽여. 죽여줘. 벨리텐트를 죽여. 제발 죽여버려. 죽어. 죽여줘. 계속해서 외치는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차분했으나, 그것은 비명이었다.

살려달라는 발악. 나한테 왜 그랬냐는 원망. 죽이지 말아 달라는 애원. 죽어버리라는 분노. 살고 싶다는 염원.

끊임없이 루블리안을 죽이라고 하는 목소리엔, 그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지금껏 들어본 원망 중 가장 깊고 처절했다. 이것이 저주가 아니라면, 무엇이 저주인가 싶을 정도로.

……이 미친놈 도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건지. 원망 어린 목소리가 끊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러다 내가 미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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