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14)화 (14/112)

014.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3)

몇 번 더 말하던 소리는 아무런 징조 없이 뚝, 끊겼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사라지자,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집사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신과의 대화 때문에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게 익숙한 나도 이런데, 저렇게 멀쩡하게 서 있는 건 불가능하다. 들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바닥에 엎어져 숨을 헉헉 내쉬고 있어야 한다.

그만큼 소리의 주인은 세기를 조절하지 못했다.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어놓았다. 애초에 ‘죽, 여, 려’라는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들리는 걸 보면 신처럼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말을 전하기 위해 반복하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 같단 느낌도 들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재차 물어보는 집사에게 가벼이 대꾸했다. 내 안색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봐줄 만하지 않은가 보다. 한껏 머릿속이 헤집어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서재라 칭하기엔 너무나도 광활한 거 아닌가 싶다. 황궁 도서관의 크기와 맞먹을 것 같았다.

여기서 주술에 관한 책을 찾을 수는 있나. 현실적인 의문이 들었다. 책을 좋아하지만, 책이 어디 있는지 일일이 외우기도 힘들 정도로 책장이 많았고 커다랬다. 그나마 책장 한쪽 면에 나열된 기준이 쓰여 있어 다행이지, 아니라면 아마 온종일 찾아도 원하는 책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있어도 시간을 단축할 뿐, 찾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정리된 기준이 상당히 포괄적이었으며, 똑같은 기준인 책장이 기본으로 네 개는 있으니 말이다. 책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셀 수 없을 듯했다.

“이쪽입니다.”

바로 책을 찾지 못하고 주춤거릴 거란 걸 예측한 건지, 집사가 나를 안내했다. 무슨 책을 찾는지 이미 다 아는 듯, 발걸음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여깁니다. 금서는 이쪽 책장입니다.”

“……금서가 원래 이렇게 탁 트인 곳에 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호한 얼굴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럼에도 해본 거였다. 금서까지 열어줄 정도로, 자신이 있는 건가 해서. 아무리 찾아도 주술을 풀 방법이 없는 건가 해서.

“그럼 편하게 보십시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을 땐 저 버튼을 누르시면 됩니다.”

나가달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집사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곤 뒤를 돌았다. 올 때와 똑같은 정제된 걸음으로 그는 도서관이라 불러야 할 듯한 광대한 공간을 벗어났다.

고요하던 공간에 문 닫는 소리가 퍼지고 나 혼자 남았다. 그의 수족 없이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게 하더라도 무언가 장치를 해놨을 터다. 예를 들면 바로 앞에 대놓고 있는 영상구라든지.

숨길 생각도 없나. 개방된 장소에 떡하니 놓여있는 영상구에 있던 어이도 사라진다. 내 목적이 무엇인지 이미 뚜렷하게 안다는 건 알겠는데, 심히 노골적이다.

헛숨을 한 번 뱉은 나는 집사가 일러준 주술 관련 책들이 들어찬 책장에서 책을 골라냈다. 도서관 문을 열자마자 거세게 들이닥친 목소리가 무엇인지,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누구의 목소리인지 의문스러운 점은 많았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파헤치기엔, 주술을 푸는 게 우선이었다. 내게 1순위는 루블리안이니 당연했다.

루블리안은 벌써 깨어나 여러 세계를 헤집으며 이곳에 거의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신이 다른 세계로 온 걜 봐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흐르는 시간이 같다면 벌써 4일이나 지났다. 서둘러야 했다. 다른 곳에 마음 쓸 시간이 있다면, 그것을 모조리 주술을 푸는 데에 투자해야만 했다.

<주술의 기본 이론>, <주술의 응용>, <금술을 배우고 싶나요? 그럴 땐 이 책을 골라라!>, <주술을 배우는 네가 참 노답. 그렇지만 이 책은 정답>…….

……책 제목이 개성 넘쳤다. 한 분야에 미쳐있는 사람은 다 어디 한 부분이 멀쩡하질 않았다. 루블리안을 따라 마탑에 갔던 걸 회상하며 고개를 저었다.

책을 다 골라낸 듯하여, 옆에 있는 둥근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처음 펼친 책은 <주술의 기본 이론>이었다. 열자마자 보이는 작가의 말이 시선을 끌었다.

「나 주술사, 뭘뤼학잘은 이 책을 지으면서 세상에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새끼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쉽게 설명해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며 출판이 어렵다고 하다니. 어떻게 이걸 모르지? 상당히 충격적이지만, 다시 한번 천천히 쉽게 설명을 쓰기로 했고 실패했다. 그리고 또다시 도전했다. 이건 103번의 고침 끝에 출판된 책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너는 답이 없는 거다. 포기해. 라는 마음으로 적었으니, 모두가 이해하길 바란다.」

그 밑에는 이 작가의 말이 본래는 퇴짜를 맞았으나, 주술에 재능이 있는 이만 읽을 수 있게 해놓았으며, 이걸 못 보면 재능부터가 없는 것이라며 포기하라 적혀있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초본을 못 보는데, 포기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작가의 말을 보고 나니, 초본을 볼만큼의 재능은 있다는 게 다행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이걸 모르지’라는 대목은 익숙하기까지 했다. 설명하고 ‘음, 아주 완벽하네.’라며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혼자 뿌듯해하다, 이해 못 하는 학생들을 보며 세상 멍청한 사람을 보는 눈을 했던 물리학 선생님과 닮았다. 표정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 보니, 꽤 인상 깊었던 것 같다.

목차를 넘기고 제1장을 펼친 나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천천히 책을 닫았다. 왜 퇴짜 맞았는지 알겠다. 수학으로 따지자면, 곱셈을 뛰어넘고 미적분을 구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기본 용어조차 모르는데 저걸 어떻게 알겠는가. 이 책은 103번이라는 끈질김에 의해 출판된 건지도 모른다. 왠지 다른 책들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나머지 책들도 펼쳐보았으나, 주술을 모르는 문외한이 이해할 수 있게끔 주요 단어들의 뜻을 설명한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보통 마법사들은 스승의 밑에서 마법을 배운다. 주술도 같은 궤인지, 밑바닥을 쌓을 기초나 용어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설명했다.

그러니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친절히 사람까지 보내며 서재로 안내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쌩기초를 모르는데, 읽어도 알 리가 없지.

얻은 것이라고는 이 주술을 내가 못 푼다는 사실 하나였다. 주술을 푸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네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주술이 걸린 이의 죽음이다. 당연하게도 목숨을 잃으면 주술이 풀린다. 그러나 내가 자살할 일은 없다. 그러니 이건 패스다.

두 번째는, 시전자가 주술을 푸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주술을 풀 수 있다는 건데, 풀어줄 리가 없다. 그렇기에 이 방법도 폐기다.

세 번째는, 상반되는 주술을 거는 것이다. 내가 지금 걸린 주술의 경우, 지정자와 거리가 가까울수록 생명력을 빼앗는다, 인데…… 이제 반대로 지정자와 거리가 가까울수록 생명력을 빼앗긴다는 주술을 내게 걸어야 한다는 거다.

어찌 보면 당연한 전제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한 사람에게 상반되는 주술이 걸리다 보니, 주술이 서로 충돌하여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50%의 확률로 죽음과 삶이 판결 난다. 운에 목숨을 맡길 생각은 없으니, 마찬가지로 제외한다.

마지막으로는, 시전자보다 실력이 우위인 주술사가 풀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주술사가 없었다. 있더라도 평행 세계 루블리안보다 실력이 좋은지 알 수 없으니, 이 방법도 탈락이다.

방법이 없었다. 신이 있다면 물어라도 봤을 텐데, 불러도 답이 없었다. 오지 않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일부러는 아니리란 확신이 있었다. 인간미 하나 없을 것 같은 신은 정나미가 넘쳤으니 말이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습관적으로 손톱을 탁탁 쳤다. 바로 옆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스하게 몸을 감쌌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머릿속과 다르게 몸이 나른해진다. 사실상 납치와 다름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가로이 책이나 뒤적거리다니. 주술을 풀기 위함이었지만, 겉보기만 놓고 따지니 우습기 짝이 없다.

‘신.’

혹시나 하여 한 번 더 신을 불러보았지만, 답이 없다. 나는 신을 기다리는 것은 포기했다. 때가 되면 어련히 오겠지 싶었다.

허공에 고정되었던 내 시선이 하얀 테이블 위, 탑처럼 쌓인 주술 책으로 옮겨졌다. 저 책을 다 보았는데도 이해한 것이 몇 안 되다니. 간접적으로 바보 체험을 한 기분이다.

……이젠 어쩔까. 탁탁 계속해서 손톱끼리 맞부딪히며 머리를 굴렸다.

그를 따라 이 세계에 온 가장 큰 목적이 주술을 푸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방법을 찾을 수 없단 걸 알게 되었으니 이젠 무사히 이 세계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되는데.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도 ‘루블리안’인지라, 또다시 나를 찾고는 내 고유 세계를 침범할 것 같았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가장 급한 건 탈출이라, 그것부터 구상에 들어가는데 바로 옆에서 마력이 부자연스럽게 뭉쳐지는 게 느껴졌다. 마법진이 생기고 그 위로 금발이 흐트러지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나타났다.

“다 읽었어, 자기야?”

루블리안의 말끝을 늘리는 애교스러운 말투와 달리 능청스럽고 느긋한 말투였다. 다 읽기를 기다렸다는 말에 내가 무감하게 바로 앞의 영상구를 눈짓하며 물었다.

“더 있지.”

“다 알면서 뭘 물어봐.”

짭 루블리안은 거리낌 없이 답했다. 아무리 상대가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 뻔뻔하기가 수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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