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2)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한동안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겨우 멈췄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현실을 부정하듯 발을 한 번 움직였다. 그러자 뾱 소리가 울렸다.
……허, 뾱?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의 주인인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침대 끄트머리에서 다리를 꼰 채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언제 푼 건지 모를 크라바트는 느슨해져 있었고 시선은 내게 향해 있었다.
한술 더 뜨듯 그는 느릿하게 윗단추를 풀며 농익은 과실처럼 웃었다. 유혹이라도 하는 행태에 헛숨이 나왔다. 수치심도 모르는, 낯짝 두꺼운 새끼가 아닐 수 없다.
그 미친 행태를 보고 있으니, 따질 의욕도 사라졌다. 말을 섞는 것조차 싫었다.
나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뾱뾱.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리가 울렸다. 사실 날 수치사 시키려는 고도의 전략이라고 해도 수긍할 것 같았다.
용사 시절까지 합친 22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신은 적 없는 뾱뾱이 신발을 이 나이에 신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주변에 사용인들이 거의 없어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 꼴로 웃음거리가 될 뻔했다. 다행히도 있는 사용인들은 그리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곤 이내 불편했던 감각을 지워냈다. 짭이 명령한 거든, 자발적인 거든. 내가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있나. 괜한 감정 소모였다.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그들의 눈빛이었다. 이 적은 이들 중 극소수가 보내는 시선이 묘하게 분노, 불안, 경멸을 띠고 있었다. 여길 처음 오는 나한테 보낼 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감정의 대상은 이곳의 나, 평행 세계 백시현일 테다. 대체 여기에선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미묘하게 거슬린다. 깔끔한 손가락 중 한 곳에만 일어난 손톱 거스러미 같았다. 평소 남의 일이든, 내 일이든 무심히 넘기는 편이지만, 거슬림이 유독 심했다.
나와 같은 루트를 탔다면, 용사로 이 세계에 온 뒤, 마왕을 죽여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저런 불온한 눈빛을 받는 게 아니라.
신이 짭 루블리안이 마왕의 목을 베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평행 세계의 백시현은? 나와 같다면 ‘용사’로서 이 세계를 왔을, 마왕을 죽여야 하는 사명을 지닌 그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이러한 시선을 그에게 보내는 걸까.
주어진 정보가 적었다. 무언가 더 알아내기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이한 집착. 평행 세계 백시현에게 향하는 불온한 감정. 둘 다 평행 세계의 인물인 이상, 두 개를 잇는 이음새가 분명 있을 터였다.
물 흐르듯 생각이 흘러갈 때였다. 점차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그림자가 드리웠다. 눈앞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있었다. 사용인들과 다른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정갈한 차림새와 각 잡힌 몸짓을 보아하니, 이곳의 집사인 듯했다.
물끄러미 집사로 추정되는 이를 응시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던가. 그의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었고, 지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사용인들에게 느꼈던 불온한 감정도 있었으나, 그것은 내게 향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도록 애쓰고 있었다.
그렇기에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내가 이쪽 백시현이 아닌 걸 안다는 것을.
“저는 이곳의 총괄 집사, 베이입니다. 주인님께서 손님분을 서재로 안내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또한 그렇기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이 사람만 내가 평행 세계의 백시현이 아니란 걸 알고 하필 아는 이를 보낸 이유는 뭘까, 하는.
미끼인가, 단순한 실수인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자식은 루블리안이었다. 실수란 단어가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이다.
게다가 총괄 집사란 자리에 앉은 사람을 소모성 미끼로 사용하기엔 아깝지 않나. 단시간에 여러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네.”
일단 안내를 받기로 했다. 미끼든, 아니든 내가 할 짓은 똑같았기 때문이다. 미끼면 걸려주어 이용하면 되는 거였고, 아니면 아닌 대로 이용하면 되는 거였다.
내가 서재로 향하리라 예상하고 보낸 사람을 사양하지 않는 것처럼.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일면식이라고는 하나 없던 이에게 죄책감을 느낄 만큼 친절하지도 않았으며, 그러기엔 의심과 경계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시절을 겪어버렸다.
용사가 되지 않은 고3 시기의 나라면 다를지도 모르겠다. 착하고 바른 아이가 되려고 아등바등했던 시절이었으니. 다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주인님의 손님이시니, 말을 낮춰 주시기 바랍니다.”
정중한 부탁이었다. 나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에는 이런 게 어려웠다. 가족의 정을 조금이라도 받기 위해 한창 착한 아이에 집착할 때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점차 적응되었다. 적응되어야만 했다. 그곳은 한국이 아니었고, 신분제가 존재하는 곳이었기에.
용사는 귀족이 아니었으나, 그보다 높은 권력을 가졌다.
이건 희소성의 문제였다. 사람들은 세계를 멸망으로 이끄는 ‘마왕’의 유일한 대적자인 ‘용사’를 보다 많이 필요로 했다. 그러나 신이 내려준 용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귀족이 여럿에, 대체할 사람도 많은 것과는 상반되게.
그러니 유일하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용사’는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무게를 지닌 자리였다. 말이든, 행동이든 신중하게 내뱉지 않으면 안 되는. 그렇기에 존댓말은 여러모로 좋지 않았었다.
“여기가 어딘지 좀 알려주면 좋겠는데. 갑자기 납치당한 통에 물어볼 여유가 없었거든.”
“여긴 벨리텐트 공작가의 영지, 리헤튼의 저택입니다.”
……벨리텐트? 예상 밖의 성이었다. 그럼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의 본명이 루블리안 벨리텐트라는 건가? 이상했다. 그야 그럴 것이 내가 용사였던 루블리안의 세계에서 벨리텐트 공작은 다른 이였다. 더불어 루블리안은 평민으로 알려져 있었다.
“형제나 자매는 없나 봐.”
“남동생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현재의 나우 백작 부인과 혼인하여, 성을 바꾸시고 나우 백작이 되셨습니다.”
떠보듯 묻자, 정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도 지금 나우 백작이라는 사람이, 루블리안 세계에서의 벨리텐트 공작인 듯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평행 세계 루블리안한테서 나오던 그 특유의 여유로움은 기득권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움직이는 손가락 마디까지 고상한 몸짓 또한 그러했다.
……이래서 신이 출생의 비밀과 교육 운운을 한 건가. 확실히 루블리안은 ‘셀턴’이라는 성이 있지만, 그건 대대로 마탑주가 사용하는 성이었다. 그렇기에 제국의 귀족부터 저잣거리 아이들 할 것 없이 루블리안이 평민인 줄 알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루블리안은 어린 시절 이야기는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될 거라며 꽃망울이 피어나듯 해사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니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마탑주가 되면서 귀족의 성을 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루블리안은 워낙 어린 시절이 알려지지 않아 암묵적으로 평민 판정이 났다고 몬트리오가 그랬다.
“마탑주는 아닌가 보지.”
“마탑주의 자리는 거절하셨습니다.”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와는 확실히 달랐다.
무엇이 영향을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루블리안의 삶이 평탄했다면 이렇게 됐을까. 질 좋은 교육을 받고 다른 삶을 살았어도 나를 좋아했을까. 자연스레 루블리안에 대해 생각이 흘러간다. 의미 없는 가정이 머릿속을 메운다.
끝이 나지 않을 듯한 생각을 몰아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입술 사이로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던 것이 흘러나왔다.
“내가 잠에 빠진 뒤,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4일입니다.”
창 너머로 내리쬐는 아침 햇살에 기껏해야 하루가 지났을 거라 생각했다. 4일이나 잠들 줄은 몰랐는데. 예상 밖이다. 시간의 흐름이 내 세계와 이쪽 세계가 같은지는 모르겠으나, 같다면 루블리안은 진즉 깨어났을 테다. 그리고 여기저길 뒤집으며 나를 찾고 있겠지.
서둘러야 할 이유가 생겼다. 강한 집념을 가진 루블리안은 끝끝내 나를 찾아올 거다. 그를 잘 알기에 확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루블리안이 나를 찾아버렸을 때, 주술이 풀려 있지 않다면? 그럼 다시 각혈과 도주 엔딩이다. 최대한 빠르게 계획을 짜고 실행해야만 했다. 나는 약간 마음이 급급해졌다.
‘벨……. ……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생각을 멈춘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런 나를 보며 집사가 묻는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앞으로 고갯짓을 했다. 잔말 말고 안내하라는 뜻이었다.
집사는 한 번 더 시선을 던지더니, 멈췄던 다리를 움직였다. 집사의 태연함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소리를 못 들은 듯했다. 아니면 내가 잘못 들은 거거나.
그렇지만 부정하기에는 확실히 소리가 끊기듯이 들렸다. 신과 대화할 때와 비슷하게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였다.
다시 소리가 들릴까 하여 집중하며 걷는데, 들리는 것은 저벅거리는 걸음 소리뿐이었다. 대화 소리가 사라진 복도에서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건가. 묘한 찝찝함을 떠안고 서재 문 앞에 도착했다. 집사가 여기라며 문을 열자마자, 날렵한 바람이 머릿속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총알처럼 소리가 들이닥쳤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괜찮으십니까?”
집사가 휘청거린 나를 부축하려 했다. 나는 손을 휘저어 그를 만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작아진 목소리가 또다시 속삭인다.
‘죽……. ……여. 죽……려.’
착각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전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죽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