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1)
처음에는 루블리안만 생각하기 바빠,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루블리안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게 죽이고 싶단 눈으로 바라봤으면서, 왜 루블리안을 살릴 기회를 주는지. 힘으로 제압할 수 있으면서, 복잡하게 주술을 이용한 까닭은 무엇인지. 죽일 기회가 빈번했으면서 죽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왜 그랬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을 놓고 보면, 그가 루블리안을 증오하면서도 죽일 생각은 없다는 답이 도출된다.
오로지 심증뿐이었으며, 살의에 찬 눈이 너무나 선연하여 긴가민가했지만, 반응을 보니 확실해졌다.
평행 세계에서 온 그는 루블리안을 죽일 생각이 없다. 그렇게 죽이고 싶다는 눈을 했으면서.
“맞아. 애새끼 목숨 보전하느라 눈치 못 챌 줄 알았는데…… 사랑의 힘인가?”
멱살을 잡은 손에 입술을 내리며 그가 수긍했다. 입술이 움직이는 감촉과 닿는 숨결은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불쾌감을 주었다. 바로 멱살을 놓으려 하자, 여전히 내 두 손목을 쥐고 있는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미친놈은 마법까지 쓰면서 나를 구속한 후, 입술을 몇 번이고 문댄 뒤에야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손이 자유로워지자마자 뒤로 물러나며 입술이 닿은 부분을 옷에 닦았다.
“아, 물론 자기하고 나 말하는 거야.”
오해하지 말라는 듯 그는 금발을 쓸어넘기며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너랑 사랑을 해.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쪽도 반드시 제정신은 아닐 테다.
“헛소리하지 마.”
“헛소리라니, 자기야. 이왕이면 플러팅이라고 해줄래?”
개소리엔 무응답이 제격이다. 뱀처럼 눈꼬리를 길게 빼며 요사스럽게 웃는 미친놈한테 해줄 말은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도 안 해주네. 첫날밤부터 소박맞긴 싫었는데.”
“미친 새끼.”
답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가 입을 열자마자 무너졌다. 첫날밤이니, 소박이니. 열면 감당이 안 되는 재앙, 그 자체다.
“왜 불러, 자기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천덕스럽게 답했다. 심지어 자기가 미친 새끼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듯한 어조였다.
순간 머릿속에 용사 시절의 한때가 스쳐 지나갔다. 데드리언이 청초하게 웃으며 그랬었다. 잘난 얼굴에, 성격이 더럽고, 말투가 더럽고, 정신이 회까닥 돈 사람을 보면 피하라고. 이미 걸린 건 어쩔 수 없다며 데드리언이 루블리안을 눈짓했었다.
그런데 지금 더한 새끼한테 걸린 것 같은데. 무감하게 속으로 중얼거리자, 상상 속 데드리언이 이미 망했다고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살짝 밑으로 당기는 손짓이, 이렇게 말을 하는 거라고 가르쳐주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저건 대답하라는 약간의 빈정거림과 강요였다.
미친 새끼란 말은 탄식처럼 나온 것이었으며, 자길 부른 게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 저랬다. 미친 또라이한테는 상식이 존재하질 않았다.
“자기가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일부러 내 곁에 남아있는 이유를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고 있는데.”
어느 정도 풀어졌던 분위기가 다시 조여졌다. 알고 있을 거라 예상하긴 했다. 이쪽도 루블리안 못지않게 머리가 비상했으며, 눈치가 좋은 것 같았으니.
“어차피 날 네 세계로 데려갈 거였잖아. 오라던 이유도 그거였고. 따지자면 이득 아닌가?”
“그렇긴 한데… 내가 굳이 내 세계로 갈 이유는 없지, 자기야. 이 세계가 멸망하고 자기랑 둘만 남는 것도 충분히 낭만적이라.”
“허. 세계가 멸망했는데, 내가 너랑 있을 것 같아?”
“아니. 자기는 죽으려 하겠지. 우리 자기는 참…… 한결같으니까.”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내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자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얇은 선을 그리듯 눈꼬리를 휘었다.
“자기 머릿속은 훤히 보여. 내가 여기 세계를 망치는 것도 싫고, 아끼는 애새끼를 죽이는 것도 싫고, 주술은 풀고 싶고.”
느릿하고 여유롭게 내가 따라가려는 이유를 나열한 그가 약간 벌어졌던 간격을 좁혔다. 천천히 걸어오는 그는 가만히 서 있는 내 앞에 도달하여, 상체를 숙인 후 붉은 입술을 열었다.
“내가 각혈을 안 하는 이유도 궁금하지? 나한테도 주술을 걸었거든. 우리 자기한테 건 주술이랑 똑같은 걸로. 지정자 백시현과 가까이 있을수록….”
설마.
“백시현의 생명력을 빼앗는다, 는.”
“진짜 미친 새끼…….”
무언가 조처를 했을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행동이 심히 여유로웠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루블리안’인 이상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리란 걸 어림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거리가 가까울수록 ‘루블리안’의 생명력을 빼앗는 주술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거리가 가까울수록 나, 그러니까 ‘백시현’의 생명력을 빼앗을 주술이 걸려 있으니, 서로 생명력을 주고받는 것뿐이었다.
주고받는 과정에서 생명력 손실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플러스. 마이너스. 즉 제로다.
이 주술은 처음부터 완벽히 루블리안만을 겨냥한 거였다. 자기 자신이 입을 피해는 아예 없애버리고.
“자기는 날 못 죽여.”
확신이 담긴 말 뒤로, 무언가 다른 감정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그대로 날 잠들게 했기 때문이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고풍스러운 천장이었다. 상당히 낯설었다.
일어나 몸에 밴 습관처럼 탐지 마법을 쓰려고 하자, 마력이 손에 뭉쳤다가 그대로 흩어졌다. 마치 마력 제어구라도 낀 듯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보통 마력 제어구가 채워지는 손목과 발목은 다 멀쩡했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가 평행 세계라면 내 힘은 강해진다. 구속구 정도야 가뿐하게 부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다시 마력을 모아보려 했지만, 마력이 뭉쳐지기는커녕 빠르게 흩어졌다.
신성력도 마찬가지였다. 뭉칠 듯 모이다 순식간에 바스러진다. 뭉쳐보려고 노력하다, 답이 없어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을 때부터 느껴졌던 기척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봐주네. 너무 안 일어나길래 나는 자기가 공주라도 되고 싶은 줄 알았잖아. 뭐였더라… 잠자는 숲의 공주?”
“헛소리 말고.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별거 안 했어, 자기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눈짓했다. 그에 나는 시선을 내렸다.
“……신발?”
눈에 들어온 건 마력 구속구도 제어구도 아닌 신발이었다. 원래 내가 신던 것이 아닌, 아마 마력과 신성력 제어부터 추적까지 여러 마법이 진탕 걸려 있는 듯한 신발.
의외라는 게 얼굴에 드러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미친놈이 눈치가 좋은 건지, 그가 묘한 웃음기를 담은 채 말했다.
“내가 이 발에…….”
그가 내 발목을 세게 잡아당겨 자신의 어깨에 걸치게끔 했다. 그 탓에 제대로 앉아있던 자세가 무너지고, 동등했던 눈높이가 한껏 높아졌다. 내 등이 방금까지 엉덩이를 대고 있던 침대 시트에 닿았다.
“구속구라도 채우길 바랐어?”
날 내려다보는 시선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감정을 읽는 데는 도가 튼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소유욕.
신발을 선물하면 멀리 떠난다는 속설과 어울리지 않는, 집요하고 선명한 욕망이었다. 다른 감정들을 다 잡아먹을 정도로 짙은.
“또 딴생각 중이네. 우리 자기…… 지능이 딸리나. 나는 분명 내 속이 상하게 하는 거 안 좋아한다고 여러 번 말한 것 같은데.”
“윽.”
그가 내 발목에 세게 이를 박았다. 이어 물컹한 것이 느릿하게 살을 빨아올리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마법을 쓰려다, 모이지 않는 마력에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손으로 금발을 쥐어뜯듯 잡고 뒤로 강하게 젖혔다.
“입질하는 개새끼도 아니고…… 내 발목 놔.”
“흐음. 개새끼가 취향 아니었나. 아까도 애새끼가 주인 잃은 개처럼 낑낑대니, 눈을 못 떼던데?”
“그건 걔니까 그런 거고.”
루블리안이랑 네가 같냐는 듯 무심히 바라보자, 그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속이 뒤틀린 게 눈에 보였다.
“그래, 자기 취향이 빌빌대는 그 애새끼다 치고, 어딜 가도 상관은 없는데 신발은 벗으려고 하지 마. 내가 신발에 공을 좀 들였거든. 벗고 싶으면 벗어도 되긴 하는데…….”
추천은 안 해. 발목이 예쁘게 잘릴지도 모르니까.
느릿한 음성이 나직하게 내 귓가에 내려앉았다. 할 수 있는 한 힘껏 손에 힘을 실었으나, 그는 머리카락이 잡힌 상태로도 그 특유의 한없이 여유롭고 귀족적인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신발을 벗는 것 외에는 뭐든 해도 된다는 듯이 말하고는 내 발목을, 정확히는 나를 놓아주었다. 이리 행동하는 의중이 가늠되지 않지만, 언제는 알 법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나.
그래도 추측하자면, 적당한 자유를 줌으로써 내가 반항을 덜 하게 하고, 돌아다님을 막지 않음으로써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확인시키려는 게 아닐까 싶긴 하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이곳 전체에 마법이 걸린 듯 비자연적인 마력이 분포하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그걸 확인시켜도 변하는 건 없을 텐데. 내가 침대에서 내려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발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뾱.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울렸다.
“……?”
한 발자국을 더 움직이자, 또 소리가 울렸다.
뾱뾱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