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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11)화 (11/112)

011. 루블리안과 원래 세계 (6)

나는 루블리안을 곁눈질했다. 거리를 둬서 그런지 피를 토하는 게 잠잠해지고는 있지만, 지금 이 거리에서도 주술이 적용되고 있을지 모른다.

낭패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어떻게 할 생각에만 빠져 있었고, 루블리안은 열을 받은 상태였으니 빠르게 대처할 여유가 없었다. 저쪽 또한 ‘루블리안’인 이상 유순하게 나올 인물이 아니라는 걸 잊으면 안 됐는데. 실책이었다.

주술이 걸려 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이 피해 보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루블리안만 데리고 도망쳤을 텐데 그러기엔 상황이 복잡했다.

그렇다고 이 주술을 역이용하자니, 이걸 건 당사자가 저 미친놈이었다. 가까이 가봤자 저쪽이 내 의도를 간파하고 이 주술을 풀어버리면 무용지물이다.

거기다 무언가 수를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엔,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너무나 멀쩡했다. 주술은 그에게도 적용될 텐데, 그는 루블리안처럼 피를 토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주술을 이용하여,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생명력을 빼앗는 것도 보류. 루블리안을 챙겨서 자리를 뜨는 것도 보류. 피를 흘리는 루블리안을 두고 덤비다가, 루블리안이 다치면 안 되니 싸움도 보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지? 땀이 난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상황을 파악하며 타개할 방법을 찾는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이런 내 생각을 아는 것처럼 녹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자기야.”

“…….”

“살리고 싶어?”

눈꼬리를 길쭉하게 뺀 그가 당연한 소리를 했다. 알면서 묻는 게 악질적이다.

“뭘 원하는데.”

“쉬워. 자기가 직접 나한테 오기만 하면 돼.”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살려준다는 듯 목소리는 자애롭기 짝이 없다. 천사의 겉가죽을 강탈해 입곤 소곤거리는 악마 같았다.

“네가 약속을 지켜주리란 걸 내가 어떻게 믿고?”

곧바로 반박하자, 미친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금빛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쏠려 하얀 이마와 날렵한 눈썹이 도드라졌다. 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위로 올라갔다.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얼굴이다.

“안 지킬 것 같아?”

물음을 물음으로 갚은 그가 끝이 아닌 듯 말을 더 이었다.

“뭐, 안 믿을 수도 있긴 하지. 그런데, 자기야.”

다른 방법은 있고?

흘리듯 말한 마지막 말에 이를 꽉 악물었다. 미친놈의 말이 맞아서 할 말이 없었다. 당장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시, 현……!”

내가 대답하지 않자, 루블리안이 피를 토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를 말리려는 그의 음성은 조금 전보다 훨씬 연약하고 파들거렸다.

각혈이 잠잠해지길래 이 정도 거리는 괜찮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루블리안이 피를 삼키고 있는 것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루블리안이 일부러 괜찮아진 척하는 것도, 루블리안이 저 상태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도. 루블리안을 만난 이래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력함이었다.

마왕 토벌 중 루블리안이 피를 토하는 일은 없었고, 무엇이든 빠르게 해결했기에 무력감은 배로 커져만 갔다. 더군다나 어딘가 다치더라도 데드리언의 신성력이면, ……신성력?

주술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알아도 신에게 주워들은 몇 가지 정도. 그러니 주술로 인한 각혈에 신성력이 통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것보단 나을 테다.

문제는 신성력으로 치유를 하려면 불가피하게도 접촉을 해야 했다. 내가 루블리안에게 다가가면 생명력이 쪽쪽 빨릴 터라, 쉽사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자기야, 계산은 다 끝냈어?”

느긋한 말씨였다. 그는 일부러 여유 있게 굴었다. 생각할 시간이라도 주는 양 너그럽게 구는 이유는 아마, 결국 자기 말을 따르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란 걸 테다. 그가 주는 친절이 역겨웠다. 의도를 캐낼수록 교활한 면모가 점점 드러났기에 더 그랬다.

그런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목적은 뭔지. 의문이 샘솟았다. 그가 나를 원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를 본인 세계에라도 데려가려는 건가? 그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날 두고 뭘 하려는 건지. 생판 처음 보는 남인 나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뭔지. 왜 루블리안과 나를 떼어 놓으려 하는 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켜켜이 쌓여만 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태평하게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가득 쌓인, 의문 뭉텅이를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 못 끝냈겠어?”

한 박자 늦게 대꾸하고 힐끗 루블리안을 바라보니, 피로 물든 옷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얀 교복을 입은 상태라, 붉은 자국이 더욱 선명했다.

시선이 마주친다. 쾌청한 하늘 같기도 하고, 물결치는 바다 같기도 한 눈동자는 호소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제발, 이리로 오라고.

애달픈 눈빛에 손끝이 움찔거렸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움직이는 루블리안의 목울대는 여전히 피를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거리에서도 저런 상태인데, 더 가까이 가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그래도 여기에 계속 있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나와 평행 세계 루블리안 사이에 신성력으로 막을 하나 만들었다. 물처럼 투명한 막 너머로 보이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여전히 귀족의 낯이었다. 특유의 여유로움은 깨지질 않았다.

혹시 몰라 만든 거였는데, 만들 필요도 없어 보였다. 저쪽은 내가 자기에게 돌아오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잠시만.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쉽게 보내준다고? 왜 이런 기회를 주는 거지? 갑작스럽게 느낀 위화감에 의심이 솟구쳤으나, 우선 등을 돌려 루블리안에게 다가갔다. 루블리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환한 얼굴 위로 옅은 의구심이 스쳤다.

그래. 내가 네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는데, 이렇게 쉽게 곁으로 갈 리가 없지. 나를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의심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믿는 동시에 믿지 않았다. 이 모순된 문장이 우리라서, 우리니까, 우리에게 허용됐다.

“루블리안.”

최대한 상냥하고 부드럽게 이름을 입에 머금자, 루블리안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 빈틈을 노렸던 나는 손으로 그의 눈을 가리며 온몸이 치료되게끔 치유를 썼다.

단 한 번도 다정히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무어라 말을 붙이기 힘든, 그런 기분이다.

나는 원래 걸었던 보호 마법 위로 슬립 마법을 중첩했다. 그와 동시에 신성력으로 만든 장벽도 없앴다.

“안녕.”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루블리안에게 자그마한 속삭임을 건넸다.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건넨 작별 인사이기도 했다.

이내 투명한 물빛 눈동자가 모습을 감췄다. 속눈썹이 가지런하게 피부에 내려앉았다.

나는 루블리안의 머리가 바닥에 닿기 전, 집 좌표를 떠올려 순간 이동 마법을 썼다. 축 늘어진 몸이 마법진에 빨리듯 사라졌다.

이제 여기 남은 건 나와 평행 세계 루블리안. 둘뿐이었다.

[헉. 시, 시현? 루블리안을 보내도 괜찮겠어요?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거죠?]

……정정한다. 셋이었다.

‘없어.’

[그런데 루블리안을 보내신 거예요?!]

신이 경악에 차 소리를 내질렀다. 찬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소리 지르지 말라고 전부터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 지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죽게 생겼는데, 놔 둬? 억지로 안 보냈으면 어떻게 됐을지 뻔하다는 거, 당신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게다가 저 짭은 노골적으로 나를 표적으로 삼았다. 나를 원했다. 그러니 언제나 내 유일한 약점인 루블리안은 여기에 있어선 안 됐다. 결코 그가 죽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신은 대답 대신 미약하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일종의 대답이었으며, 동의였다.

짧은 대화가 끊기니, 왜인지 전보다 싸늘해진 눈동자가 끈질기게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는 나한테 제 발로 걸어오랄 때는 언제고, 고아한 작태로 내 앞에 당도했다. 그러고는 내 뺨에 손을 얹었다. 불유쾌한 감각에 바로 쳐내려 손을 들었지만, 다른 쪽 손과 함께 제압당했다.

“다시 불러봐.”

“뭐?”

“내 이름, 다시 불러보라고.”

억세게 내 턱을 잡았던 전과는 다르게 조금 부드러워진 손길로 내 뺨을 지분거렸다. 이 미친 놈은 도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걸까. 나를 데리고 뭘 어떻게 하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미지의 세계에 놓인 기분이다.

“내가 왜?”

“자기야.”

그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내 두 손목을 잡아 억압하고 있는 손은 물론이고 한쪽 뺨을 매만지던 나머지 손까지.

“자기는 내가 배알이 꼴려서 홧김에 죽여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

느릿한 음성이 귀에 꽂혔다. 그 음성은 노기를 띠고 있었다.

누굴 죽이는지 말은 안 했지만, 대강 알아들었다. 내 앞에 있는 놈은 날 죽일 생각이 없으니, 남은 사람은 한 명이다.

이 미친 새끼는 루블리안의 목숨을 두고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속이 뒤틀리기도 잠시, 나는 아까 느꼈던 묘한 위화감을 집어냈다. 반신반의한 상태였으나, 루블리안을 보내는 것에 별다른 말을 얹지 않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의 확신이 생겼다.

제압당한 두 손을 힘껏 움직여 그의 멱살을 잡아 내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빛 한 점 없는 눈동자에 내가 담긴다.

“너, 죽일 생각 없잖아.”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하여 속삭이듯 내뱉은 내 말에 광기에 잡아 먹힌 흥미로움이 푸른 눈동자에 떠오르고, 피에 적신 듯한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안면에 짙은 미소가 가득 차올랐다.

정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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