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10)화 (10/112)

010. 루블리안과 원래 세계 (5)

“자기야,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을 잊었어?”

무논리에 대답하는 것도 잊고 있자,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말했다. 더는 상실할 어이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말문이 막히는 소리만 할 수 있는 건지. 저것도 재능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길래 어디까지 하나 보려고 했지.”

“내 목소리가 더 듣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 안 해도 돼. 우리 자기는 부끄러움도 많네.”

미쳤나? 아. 미쳤지. 루블리안의 개소리를 뛰어넘는 개의 울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친놈에게 미쳤냐는 질문을 했다. 안 미쳤으면 저런 소리를 할 리가 없다.

그만 지껄이라고 입을 열려는데, 루블리안이 내 앞을 막고 섰다. 꽤 넓은 등에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가려졌다.

“루블리안?”

“네에.”

루블리안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난데없이 내 앞으로 움직인 이유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의 대치가 이어졌다.

“자기를 가린 이쪽 세계의 나는 몇 살?”

여유작작한 음성이 귀에 꽂혔다. 적으로도 판단하지 않는 듯한 나긋함이었다. 꼭 루블리안을 상대도 안 되는, 자기보다 훨씬 어린아이로 여기는 것처럼.

그 사실을 루블리안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지는 걸 못 참는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다웠다.

“우리 여보한테 찝쩍거리는 ‘아저씨’보다는 적을 것 같은데요?”

아저씨라는 말에 유독 강세가 들어간 건 착각이 아닌 듯했다. 루블리안의 등에 가려져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볼 수는 없었으나, 잠시 조용해진 걸 보니 딜이 들어간 듯했다.

‘신. 있어?’

[네. 있어요!]

루블리안이 신경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 때 저 미친놈을 어떻게 할 방법을 찾아야겠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였지만, 저놈을 죽이거나 돌려보내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이 났지? 들린 신의 목소리는 높은 동시에 밝았다.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아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왜 신났어?’

[제가요? 아니에요. 저는 신난 적 없어요. 절대로 치정물을 좋아해서 루블리안이 본처고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이 갑자기 사이에 낀 첩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다 말하고 뭘 안 한다는 건지. 신은 자기가 생각한 걸 다 말했다는 자각이 없는 듯 신나지 않았다는 말을 강조했다.

관리하는 세계의 균형이 무너졌는데 치정물을 생각하다니. 조금 전까지 세계를 구해야 한다고 하던 신은 어디로 사라졌나 싶었다. 인간과 달라 저리 태평해질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아까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을 조금 더 머금었다. 루블리안끼리의 대치가 오래도록 이어지니 조금 더 생각해도 될 성싶었다.

_oOo_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루블리안을 바라보았다. 함정에 걸린 것도 모르고 백시현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꼬락서니에 설핏 비소가 흘러나왔다.

눈빛은 매서웠으나,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아지풀로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딱 그 정도의 귀여움이라면 모를까.

“‘아저씨’는 창피하지도 않나. 나이 먹고 한참 어린 우리 여보한테 집적거리는 거.”

둥글게 휘어진 눈매 밑으로, 아직 빛을 잃지 않은 눈동자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또렷이 직시했다. 그는 루블리안의 패기가, 경고가 그저 같잖았다.

‘그냥 죽여 버릴까…….’

충동이 일었다. 머리를 바닥에 찍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백시현의 얼굴은 엉망으로 물들을 테고, 바닥은 피로 적셔질 테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가만히 서 있는 백시현을 보곤 입매를 더욱 둥글게 휘었다. 집착이 어린 진한 미소였다.

“‘아가’는 아직 어려서 머리 쓸 줄을 모르나 보네. 우리 자기를 지키기는커녕… 짐만 되겠어.”

어른스럽고 농익은 음성은 비웃음과 조롱을 감추지 않았다. 목소리에는 누가 들어도 진실이라 여길 만큼의 진정성이 존재했다.

루블리안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주먹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한지,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과민 반응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앞에 서 있는 이를 보면 감정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몸짓도, 어투도 모든 게 여유로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미래 모습과 지독히도 똑같은 이가 헛소리를 지껄여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존재 자체가 짜증이 난 걸지도 모른다.

루블리안은 하나하나 따지다가 헛된 가정을 그만뒀다. 시현에게 짐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루블리안은 숨을 고르며 주먹의 힘을 풀었다. 시현의 옆에 오래도록 있던 건 자신이었다. 마음을 얻은 것 또한 자신이었다.

그는 똑같이 비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연적도 안 되는 ‘아저씨’가 말은 많네.”

모태 탱커의 완벽한 도발이었다.

_oOo_

“아직 어린 ‘아가’는 분수를 모르나? 한참 어린 애새끼한테 위협을 가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거슬리네.”

고민하느라 중간 부분을 듣지 못했다. 서로 나이를 깐 건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루블리안을 아가라고 칭하고 있었다.

자신과 얼굴이 똑같은 사람을 아가라고 부르다니. 얼마만큼 더 미치고 싶은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돌지 않았나. 더 미쳤다간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데.

여전히 둘의 신경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할 말이 뭐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길어지는 시간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지만, 공기 중의 흐름도 보통 때와 같았다. 변한 게 없었다. 찜찜했으나, 이걸 더 생각하기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나는 신에게 의아했던 부분을 콕 집어 물었다.

‘저쪽 루블리안, 죽일 거야?’

직설적으로 묻자 신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어 내게 되물음으로 답한다.

[시현은 죽일 수 있을 거라고 보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루블리안을 데리고 오면 된다며.’

어쩔 거냐고 했을 때, 애매하다고 한 게 못 죽여서 그런 거였나. 그런 것 치고 그때는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린 게 이 미친놈인 걸 모르는 것 같았는데.

‘언제부터 알았어?’

[네?]

‘다른 세계의 루블리안이 균열범이라는 거.’

그러고 보니 균열이 뭔지도 말해주겠다면서 답을 안 줬다. 루블리안의 존재를 알면서 내버려 둔 것부터 시작해서 말을 안 해준 게 수두룩했다. 지금은 물어볼 상황이 아니니, 나중에 날 잡고 털어야 할 듯했다.

[제가 소리 지르면서 나타난 적 있죠? 그때 알았어요. 무시하기도 어려운 어마한 기운이 가까이서 느껴져서 시현에게 알리러 갔던 거거든요. 그때 얼굴을 보고 알아차렸어요. 신은 인간의 삶을 읽을 수 있거든요.]

‘죽일 수 있겠냐는 건 무슨 소리야.’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은, 이쪽의 루블리안과 좀 달라요. 출생의 비밀이랄까요……. 개인적인 거라 말하긴 좀 그렇지만, 훨씬 질 좋은 교육을 받았고 경험도 풍부하죠.]

신의 목소리에는 착잡함이 담겨 있었다. 그건 결코 죽이지 못할 거란 것을 뜻하기도 했다.

[시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마왕의 목을 베어냈어요. 다른 세계에서 온 것도 아니라 그저 본인의 힘만 갖고 있는데 말이에요.]

신의 말에 단번에 얼굴을 구겼다. 마왕을 죽인 건 나였다. 원래라면 평행 세계에 존재하는 내가 마왕을 죽였어야 말이 맞는다. 그런데 평행 세계에서는 왜 루블리안이? 평행 세계의 나는 용사가 아니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를 묻기 위해 다시 신에게 말을 거는데, 미세한 마력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 즉시 나는 루블리안을 잡아당겨 자리를 피했다. 곧바로 우리가 서 있었던 바닥에 마법진이 펼쳐졌다. 조금만 늦었으면 걸렸을 터였다.

……그런데 너무 대놓고 마법을 썼지 않나? 이상함을 느끼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자기야. 나는 자기가 여전해서 너무 좋더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그는 눈꼬리를 가느스름하게 접어 웃었다. 마법에서는 벗어났고, 주변에서 느껴지는 마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안했다. 덫에 걸린 걸 모르는 소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뭐지. 대체 내가 뭘 놓친 거지. 찾아야 했다. 내가 모르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깔아놓은 함정을. 그때였다.

“시, 윽.”

갑작스럽게 옆에 있던 루블리안이 입을 막으며 허리를 숙였다.

“왜 그래.”

“욱… 괜, 괜찮아요.”

루블리안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의 손이 피범벅이 되었다. 다급하게 루블리안을 살피는데, 나른한 음성이 퍼졌다.

“지정된 인물이 가까이에 있을수록 천천히 생명력을 빼앗는 금지된 주술인데 어때? 마음에 들어, 자기야?”

‘지정된 인물이 가까이에 있을수록’이라는 말을 곱씹은 나는 루블리안에게 보호 마법을 강하게 건 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내게 둔 만큼의 거리를 뒀다.

그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말하는 이는 거짓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는 인물이었다.

금지된 주술이라. 금지된 주술에 대해 들어보기는 했다. 신이 나에게 주술도 재능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주술은 지정 인물의 신체 일부가 필요했다. 저 짭이 루블리안과 만났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미친 새끼…….”

“멍청해도 귀여울 텐데 우리 자기는 쓸데없이 똑똑하기도 하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느릿한 말에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미친 새끼는 자신의 일부를 쓴 거였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루블리안이니 말이다.

쓸데없는 대화를 오래 한 것도 그 맥락인 듯했다. 시간을 끌수록 유리한 건 본인이니까.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어떻게든 더 파헤쳤어야 했는데.

완전히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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