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루블리안과 원래 세계 (4)
뒤로 물러난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루블리안과 똑같이 생긴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그런 내가 같잖다는 듯 나긋하고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넓혔던 거리가 다시 좁아졌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허리를 굽혔다. 가까워지는 얼굴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는데 붉은 입술이 열렸다.
“자기야. 자기가 피하면 내가 속이 상할까, 안 상할까.”
어린아이에게 이게 답이라는 걸 가르치는 듯한 음성은 얼핏 보면 상냥했지만, 강제성을 담고 있었다.
정해진 답을 고르라는 듯이.
“내가 어떻게 알아, 미친 새끼야.”
연막 마법을 쓰고 거리를 벌렸다. 통할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얼핏 훑어도 루블리안의 급의 마력이란 게 보이니까.
시간을 벌 속셈이었다. 분명 루블리안이라면 폭발을 피하고도 남았을 테니 곧 나를 찾아올 터였다. 아니면 대놓고 도발한 게 되는 거지만, 확신이 있었다.
나는 발 빠르게 빌라 사이로 숨었다. 낮이라 그런지 몸 숨기기가 더욱 쉽지 않았다. 은신 마법을 쓸까 했지만, 감이 말해주었다. 저 남자는 이 정도 마법 따위는 손쉽게 간파해버릴 것이라고. 숨을 거의 쉬지 않은 채로 벽에 바짝 붙었다.
그때 근처에서 낮은 목소리가 밝은 노래를 허밍했다. 상황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음률이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기야. 숨바꼭질은 어릴 때 다 뗀 거 아니었어?”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작아졌다가 커지기를 반복했다. 이미 위치를 알면서 저러는 게 분명했다.
진짜 미친 새끼였다. 신에게 묻고 싶었다. 딱 봐도 루블리안 급의 마력에, 다른 세계로 넘어와 힘까지 셀 텐데 뭐가 비등하냐고.
입술을 짓씹으며 상황을 타파할 열쇠는 루블리안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치 제한 시간이 다 된 것처럼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순간 이동을 하고 싶었지만, 하면 어떤 꼴이 날지 몰랐다. 나를 찾겠다고 주변을 다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저 머리가 180도 돌아버린 놈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주변으로 도망가며 시간을 끌자는 판단을 내렸을 때, 빛이 들어오는 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길어졌다. 남자일 게 분명했다. 반대쪽으로 도망가기 위해 등을 돌린 순간, 불쑥 남자가 상체를 내보이며 물었다.
“다 놀았어?”
[꺄아악!!!!]
“윽.”
신이 소리 지르는 게 머릿속에 퍼졌다. 깨질듯한 두통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도주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남자에게 붙잡혔다. 오랜만에 느끼는 토할 것 같은 긴장감에 간단한 속임수에도 속아버리고. 꼴이 말이 아니다.
“흠. 세게는 안 잡았는데…… 주변에 날파리가 있나.”
냉랭하게 주변을 훑은 남자가 나를 보았다. 루블리안의 눈동자와 똑같은 색을 띠는 눈에는 광기와 흥미가 서려 있었다. 결코 정상적인 사람의 눈이 아니다. 어딘가 회까닥 돌아버린 놈이라면 모를까.
[미안해요, 시현…. 폭발한 곳이 신경 쓰여서 다녀왔어요. 그나저나 저놈이에요! 저놈이 균열범이에요!]
‘나도 알아. 근데 나 혼자는 못 잡아.’
[당연하죠. 저놈은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인데다 힘까지 강해졌으니까요. 그래도 시현이 저 남자를 대적하면 시현의 동료인 루블리안이 도와주지 않을까요?]
……잠시만, 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과부하가 되는 것 같았다. 루블리안과 똑같이 생긴 놈은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이고, 신은 루블리안이 세계를 넘은 걸 알고 있었다고?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다.
왜? 어떻게 알고 있고, 왜 아는 데도 내버려 둔 거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음, 아무리 제가 로판 웹소설을 보면서 놀아도 그건 모를 수가 없어요. 세계는 곧 저와 같달까요?]
‘그런데 왜 안 쫓아냈….’
“자기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마물의 피가 흥건한 교복을 콱 잡아당겼다. 거센 힘에 등이 기울고 고개가 앞으로 내밀어졌다. 가까워진 얼굴을 뒤로 물리려 하자, 그가 내 뒤통수를 강하게 잡았다.
“자기는 학습 능력이 없나. 내가 분명히 말해줬는데. 피하면 내가 속이 상한다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눈꼬리를 유려하게 휘며 웃었다. 안광이 사라진 탁한 그의 눈동자는 생기가 없었으며 동시에 섬뜩했다. 집요한 시선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이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 구는 것인지. 또, 나를 아는 것처럼 기억을 운운했던 건 뭔지.
‘내가 미래에 쟤를 만나기라도 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 정답인 듯했다. 아니라면 평소 바로 대답하던 신이 입 다물고 있을 리가 없다.
“윽.”
별안간 머리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눈을 찡그린 채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바라보자, 그가 나긋하고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나한테 집중해야지. 내가 친절히 속이 상한다고 답까지 말해줬는데 이러면 안 되지. 안 그래?”
나를 비추는 새파란 눈동자엔 빛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순간이라도 저 눈동자를, 내가 사랑하는 색이라 생각했던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이렇게나 다른데.
쟤는 앞으로 짭이다. 평행 세계든, 뭐든 쟤는 그냥 루블리안 짭이다. 무례하고 강압적으로 구는 놈한테 지켜줄 예의 따윈 없었다. 그리 생각하며 삐딱하게 말을 뱉었다.
“안 그런데?”
반항스러운 대답에 머리를 잡은 손에 일순 힘이 실렸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나를 보며 눈을 가늘게 휘었다.
“자기야, 무슨 자신감으로 막 나가는 거야?”
말문을 여는 음부터, 끝맺는 음까지 한없이 단조롭고 나긋했다. 내가 자기를 이기지 못하리란 걸 확신하는 눈빛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질척였다. 몸 구석구석 진흙투성이가 덮인 듯한,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네 알 바야?”
대답과 동시에 신성력으로 단검을 만들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옆구리를 찔렀다. 마력으로 보호한 건지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벗어나 다시 숨어봤자, 그의 손바닥 안이다. 차라리 탐지 마법에 루블리안이 발견될 때까지, 정면으로 버티는 게 나았다. 다른 더 좋은 방안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걸 생각해내기엔 너무나 초조했으며 깊이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손에 땀이 잘 차지 않는 체질인데도 불구하고 손이 찝찝할 만큼 축축했다. 여름 한낮의 무더운 열기가 나를 덮쳤다. 평소보다 기운이 빠지고 몸이 무겁다.
온도 조절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시도할 때마다 저쪽이 파훼하니 문제였다. 마력은 마력대로 닳고. 기운은 기운대로 빠지고. 정신이 혼미했다.
“자기야, 그렇게 쓸데없는 발버둥을 해야겠어?”
그리 묻는 어투는 권위적이고 여유로운 느낌이 가득했다. 어쩐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것이, 뼛속까지 귀족인 이와 마주한다면 딱 이럴 터였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숨을 고르고 발을 굴렀다. 내 발밑으로 대규모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내 선택이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그뿐인 듯, 느슨한 입가는 굳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이건 별것 아니라는 듯.
“……알아차렸구나, 너.”
사실 대규모 마법진은 환상 마법으로 그려낸 가짜였다. 나보다 마력이 훨씬 웃도는 건 알고 있지만, 몇 초 되지도 않아 알아차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날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세계의 반은 날려 먹을 대규모 마법을 쓸 리 없다는 걸 알 테지만, 그는 맹세코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조금 전 가설처럼 미래에서 만난다면 모를까.
“당연한 사실을 왜 떠보듯 말해, 자기야.”
당연한 사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다른 대마법사도 한참 늦게 알아차리거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 환상 마법을 간파하는 걸 당연시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얼마나 터무니없이 강하길래 이게 가능한 건지.
마법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시간을 더 오래 끌려면, 신성력으로 검을 만들어 육탄전이라도 해야 할 듯했다. 신성력을 뭉치는 그 순간 탐지 마법에 루블리안이 걸렸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보니, 그도 누군가 접근 중이라는 걸 느낀 듯했다. 그가 나를 눈에 담으며 입을 열려는 찰나, 루블리안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루블리안은 뛰어온 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은 채 흐트러져 있었다.
“괜찮아요, 시현?”
따뜻한 온도의 눈동자가 나를 훑어내렸다. 그래, 짭이랑은 온도부터가 다르다. 비로소 진짜 루블리안이 왔다.
“응. 너는?”
“당연히 괜찮죠. 제가 좀 더 빨리 왔으면 당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루블리안이 나를 품에 넣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손이 일정하게 나를 토닥였다.
“그만해.”
“으응. 왜요?”
“긴장 풀리니까.”
미친놈을 앞에 두고 긴장을 푸는 건 전장에 무기 없이 나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루블리안은 그런 나를 보다 토닥임을 멈췄다.
[데리고 왔어요! 정확한 위치를 정확히 모르는 바람에 순간 이동은 불가능해서 뛰어올 수밖엔 없었지만요.]
‘…그럼 내가 한 질문은 못 들었어?’
[무슨 질문이요?]
‘아니야.’
아닌가. 미래에서 만났나 했는데. 만약 만날 미래가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저 미친놈은 지금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저쪽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거지?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자기는 날 너무 좋아하네.”
귀에 꽂히는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이가 상실했다. 내가 누굴 좋아해? 루블리안의 품에서 벗어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러길 기다렸다는 듯 그가 눈을 휘며 말을 이었다.
“그거야 자기는 루블리안을 좋아하잖아.”
“……?”
“나도 루블리안이니, 자기는 나도 좋아하는 거 아닌가?”
돌아버린 짭 루블리안이 지상에 내려온 악마처럼 유혹적으로 웃었다. 순간 뇌가 정지했다. 나는 무슨 헛소리지 싶어 차근차근 그의 발언을 정리했다.
하나. 백시현은 루블리안을 좋아한다.
둘.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어느 쪽이든 둘 다 루블리안이다.
셋. 고로 백시현은 저쪽 세계인 자기도 좋아한다.
……이게 무슨 기적의 삼단 논법이지? 아무래도 어느 세계의 루블리안이든 개소리를 제법 사람 말 같게 하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