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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8)화 (8/112)

008. 루블리안과 원래 세계 (3)

지난번에도 여러 번 퇴짜를 놓고 끝내 합의를 봤었다. 결과물은 나름 괜찮았다. 묻은 피가 티 나지 않게 들어가는 색은 검게, 외형은 화려함을 좀 줄인 정도로.

‘내가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내놔.’

[목숨으로 협박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검은…… 여깄어요.]

목소리에 울음기와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루블리안이 아닌 사람의 울음은 내게 효과가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검을 손에 쥐고 신이랑 이야기하느라 내버려 둔 마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물이 계속 나한테 달려들며 뭐라고 하긴 했는데 듣질 못했다.

“그 검은, 우리 마왕님을 꿰뚫은 검…!”

마물은 내 검을 보고 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챙―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용사일 적 능력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신성력과 마력이 순식간에 수북이 차올랐다.

‘능력은 왜 풀어줘.’

마치 세계의 균형을 망가트린 원인을 나한테 없애게 하려는 듯해 기분이 더러웠다.

[시현이 상대하는 저 마물, 상급이거든요. 게다가 균열을 일으킨 원인의 힘이 미친 듯이 세서 풀어드리는 게 세계에 더 이로워요.]

균열? 균형이 무너졌다는 걸 저렇게도 표현하나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처리할 생각은 없으니까.

‘미리 말하는데 균열 일으킨 범인, 나는 안 잡아.’

[네?]

‘그리고 이 정도는 쉬운데.’

마법으로 나뭇가지의 성질을 고무와 같이 바꾼 뒤 손짓했다. 손짓에 따라 빠른 속도로 뻗어 나간 나뭇가지가 마물의 발을 묶었다. 그 틈을 타 마물의 뒤로 이동해 신성력을 실은 검으로 마물의 핵으로 보이는 곳을 찔렀다.

푹 소리와 함께 검은 피가 튀겼다. 흰색 교복이고 내 얼굴이고 안 튀긴 곳이 없다. 나는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그러나 지워지긴커녕 뺨에 검은 피가 번진 듯했다.

더 만져봤자 번지기만 할 것 같아, 지금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절대 정상적으로는 보일 수 없는 상황이다.

[역시 시현이에요! 수고했어요!]

‘그럼 난 간다. 이건 당신이 알아서 치우고.’

죽은 마물을 발로 툭 건드리며 말하자 신은 당황스럽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왜, 왜요?]

‘뭐가.’

[지, 진짜 그냥 가시려고요?]

‘어. 범인 잡을 생각 없어.’

빼돌릴 생각은 있어도. 나는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없다고 찾으러 나오면 안 되는데.

저번에 혹시 몰라 만년필에 걸린 마법을 풀어 위치를 찾을 방도가 없다는 걸 알지만, 초조했다. 손에 땀이 찼다. 나는 뒤로 손을 움직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루블리안을 내 손으로 죽이거나, 루블리안이 죽는 꼴을 볼 생각은 없었다.

[왜, 왜요? 마왕을 잡은 시현만이 균열을 일으킨 범인한테 비빌 수 있단 말이에요…!]

저 말을 해석하면 내가 루블리안을 잡지 않는 이상, 루블리안이 죽을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용사였던 게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루블리안이 이지를 잃어 욕망에 삼켜져도 죽이지 못할 테니… 적어도 루블리안이 죽을 일은 없을 터였다.

‘난 싫다고 했어.’

[……진심이에요? 시현, 많은 사람이 고통받을 수도 있어요. 저도 제가 해결하고 싶긴 한데 마왕을 잡을 때 말했잖아요.]

‘신은 인간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거?’

[네. 그거요. 사실 남들보단 능력치가 뛰어나 개화할 수 있는 사람은 좀 있는데 다 시현보단 약하고 경험도 전무해서…….]

신이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여러 가지 방안을 고민해봐도 내가 해결해주는 방법밖엔 없다는 속뜻을 읽었다.

따지자면 우위는 내가 점하고 있다. 신이 세계를 버리려고 하지 않는 이상, 내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니.

‘잡으면?’

[네?]

‘균열범을 잡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냥 돌려보내 준다면 루블리안을 데리고 올 의향이 있었다. 루블리안이 돌아갔을 때 느끼는 내 기분은 고려대상이 아니었기에, 그를 돌려보내는 것이 그가 이 세계에 남아 위험한 혈전을 치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으음. 조금 애매해요.]

‘왜?’

[직접적으로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은 걸 보니 욕망에 삼켜지지는 않은 것 같은데, 시현이 죽인 마물 말고도 다른 마물이 대량으로 넘어왔거든요. 약간 의도적으로 균열을 이용해서 데려온 것 같기도 해요. 다 용사를 죽일 생각이 만만이라…….]

‘나를?’

무언가 이상했다. 루블리안이 의도적으로 내게 증오감을 품은 마물을 데리고 왔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일주일 전에 이쪽 세계로 넘어와,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이 거짓일 확률은 낮았다. 그러니 루블리안은 마물을 데리고 올 시간 자체가 없었다.

루블리안이 아니라 다른 놈이 넘어온 건가? 그런데 왜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기 전 현상은 일어나지 않은 거지? 머릿속이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찼다. 물음이 끊이질 않는다.

[네. 시현을요. 게다가 이게 강제로 열린 균열인 것 같아서…… 아. 균열은 제가 설명한 적이 없었네요. 균열은, 헉. 안 되는데!]

균열이란 걸 설명하려던 신이 경악했다. 외마디의 비명이었으나, 머릿속에서 울리는 탓에 눈을 찌푸렸다. 손으로 옆머리를 짚으며 소리를 내지르는 이유를 묻자, 신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우선 다른 마물부터 죽이고 이야기를 더 하면 안 될까요? 어떻게든 마물 주위에 사람이 없게 주위에 가면 공포심을 느끼게끔 하고는 있는데. 최대한 빨리 없애는 게 좋아서요. 시현, 제발 도와주세요! 나중에 원하는 소원 하나 들어드릴게요! 제발요!]

‘뭐든?’

[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저러는지. 신이라기엔 너무 순수하고 바보 같았지만, 나는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이 내비게이션처럼 마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조금 전 죽인 마물보다 귀엽게 생긴 동물형 마물이 있었다. 참고로 코뿔소를 닮았다.

크르릉.

아까는 반마반물이라 말이 가능했지만, 동물형은 짐승의 울음소리밖엔 내지 못한다. 콧김을 빙자한 독성 기체를 거세게 뿜는 마물을 보며 눈동자에 신성력을 둘렀다.

마물의 핵은…… 저기네. 발을 한 번 구르자 마물 아래로 마법진이 펼쳐졌다. 마법진에서 두꺼운 사슬이 나와 마물을 감싸 구속했다. 마물이 마법진에 반응할 겨를도 없이,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반마반물형보다 동물형이 훨씬 멍청했기에 수월했다. 신성력으로 창을 만든 뒤 마물의 핵이 있는 곳으로 던졌다. 창이 꿰뚫은 곳에서 검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마물의 움직임이 멎었다.

또 옷에 피가 묻었다. 나는 얼굴에 튄 피를 대충 닦고서 신이 이끄는 대로 마물을 하나하나 처리했다.

루블리안은 숨어서 따라오고 있는지, 간간이 내게 신호를 보냈다. 신에게 들킬까 봐 노심초사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학교에 얌전히 있으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 끝이지.’

[네. 이제 끝이에요! 제가 마물이 뭉텅이로 모여있는 걸 발견하면 바로 추적할 수 있게 조처를 해놨거든요. 직접적인 개입이라 페널티는 조금 있지만요….]

‘페널티?’

[네. 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설명을 제대로 못 했는데, 직접적인 개입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에요. 불가능하면 어떻게 공포심을 느끼게 했겠어요. 이게 가능하긴 한데, 페널티 없이 개입하려면 상부에서 허가가 나야 해요.]

신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근데 그 허락이 되게 박해요. 곧 세계 멸망이 도래하지 않거나, 막을 만한 인재가 있으면 허락을 안 해주거든요. 아마 시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상부의 허락 없이 제가 마왕을 죽였으면 전 영영 소멸했을걸요.]

넌더리가 난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아무래도 상부에 허가 요청을 했다가, 반려된 적이 많은 듯했다.

‘나 이제 간다.’

들을 건 다 들었다. 이만 자리를 뜨려고 하자, 신이 빠르게 반응했다.

[네?! 규, 균열범은요?]

‘안 잡아.’

얼른 루블리안을 챙겨 원래 세계로 보내야 했다. 이 짓을 벌인 게 루블리안일 확률은 극히 낮았지만, 루블리안이 이곳에 있어도 될 존재라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헉!]

신이 말을 이으려던 도중 루블리안이 신호를 보낸 곳에서 거대한 마력이 감지되었다. 그 순간 찢어지는 폭발음과 함께 건물 옥상이 터졌다.

“루블리안!”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루블리안을 불렀다. 심장이 미칠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저런 조잡한 폭발에 당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나 불렀어?”

놀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데, 귀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하지만 이건 루블리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비슷하지만, 좀 더 농후하고 어른스러운 음성이었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엔 내가 사랑하는 색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게 뭐야. 물러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루블리안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응시했다.

“흐음. 자기야. 얼빠진 얼굴이 조금 웃기긴 한데 정신 차리지, 그래?”

“…누구야, 당신.”

내 물음에도 남자의 얼굴에는 즐겁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화사하게 웃는 루블리안과는 다르게 농염하고 어딘가 자극적인 웃음이었다.

남자는 내 손에 있는 검을 보더니, 재빠르게 빼앗아 던지고 짓밟았다. 이렇게 쉽게 부서질 물건이 아니었으나, 검은 남자의 가벼운 발길질에 산산조각이 났다. 사실 유리로 만들어졌나 싶을 정도였다.

남자는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한 적 없다는 듯 우아하고 여유롭게 내게 다가왔다. 무도회장에서 들을 법한 느린 곡조의 선율이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이는 움직임과는 다르게 거센 손길이 내 턱을 잡아 올렸다.

“윽.”

짧은 신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남자는 그런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뜻 모를 짙은 눈을 마주하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뒤집히듯 아파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거칠게 내 턱을 놓은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선홍색 입술을 위로 끌어당겼다.

“아아. 모르는 척하는 거면 기억이 날 때까지 재미 좀 볼까 했는데…… 아니네. 아쉬워라.”

그러고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댔다.

하나는 확실했다. 이 새끼가 균열범인 동시에 저 건물을 날려 먹은 새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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