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루블리안과 원래 세계 (2)
“시현?”
내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 루블리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따라 여름날의 햇빛 같은 금발이 한쪽으로 움직이며 흐트러졌다.
시선이 머리에서 이마로, 이마에서 눈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새하얀 턱까지 보고 생각했다.
역시 얼굴에는 문제가 없다.
“그렇게 쳐다보면 제가 너무 부끄러운데요, 시현.”
신이 한 땀 한 땀 조각했을 듯한 입으로 저따위의 말만 뱉게 하는 머리가 문제지. 루블리안은 부끄러운 척을 하며 샐샐 웃음을 흘렸다.
“그럼 다시는 안 볼게.”
“으응? 왜 말이 그렇게 되지? 계속 봐요. 당신이 질릴 때까지.”
새초롬히 올라갔던 눈매가 접히며 부드럽게 풀렸다. 루블리안은 자신이 있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시현은 제 얼굴에 안 질릴 테니, 평생 봐야겠네요.”
“……너는 네가 늙어서도 예쁠 것 같아?”
“그 말은 제가 안 예뻐질 때까지 계속 곁에 있어 주겠다는 거네요? 이렇게 평생 곁에 있어 주겠다고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루블리안이 부러 수줍게 웃었다. 그의 눈이 느린 속도로 깜빡거렸다. 길고 촘촘한 금색 속눈썹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듯 팔랑였다.
“안 있어 줄 거야.”
“으응. 있어 주겠다고요?”
“안 있어 준다고.”
“네에. 평생 있어 주시기로 한 거예요.”
제멋대로 대답하는 루블리안 탓에 벽이랑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얘랑 뭘 하는 건지 현타가 왔다.
이리 뻔뻔하게 나오는 루블리안은 결코 말로 이길 수 없었기에 나는 이 주제를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말해.”
19년 전 과거로 가 신분을 만들고 왔다는 말에서 왜 평생 같이 있어 준다는 말이 나온 건지, 대화의 흐름을 읽을 수가 없었다.
“네에.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으음. 과거로 가서 신분을 만들고 주식이라는 걸 좀 사고 현재로 돌아왔고요.”
“……?”
주식을… 해? 상상치도 못한 언급에 당황했는데 이번엔 그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건지 루블리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여름이었다, 라는 문장을 붙여야 할 듯한 청량하고 맑은 웃음이었다. 그래도 루블리안의 외모에 면역이 있는지라 넋을 놓고 얼굴을 보진 않았다.
“아, 시현. 어떡하죠? 시현이 너무 좋아요.”
“……글쎄. 그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닌데.”
용사 시절에도 종종 루블리안은 내가 좋다는 고백을 해왔다.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과 확연히 차이 나는 행동, 눈빛, 손짓의 의미를 알려주듯이.
그런 행동이 나를 살렸고 체념하게 했고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끔 했다.
“이어서 말하기나 해.”
나는 지금이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돌아가야 할 사람을 덤덤하게 대할 수 있는 지금이.
“사랑 고백을 했는데 너무해요.”
루블리안이 살살 애교를 떨었다. 몬트리오가 옆에 있었다면 헛구역질을 했을 게 눈에 선했다.
“어.”
“그래도 어쩌겠어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데.”
그렇죠? 루블리안이 샐샐 웃으며 덧붙였다.
그에 반박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쳤다. 깊숙이 묻어둔다고 묻은 마음이 불쑥 머리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고, 그 말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말 돌리지 마.”
“으응. 알겠어요.”
“그래서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거야?”
“네에. 미래랑 과거랑 조금씩 왔다 갔다 하면서요.”
미친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대마법사들이 동경하는 시간 마법을 저렇게 쓰는 사람은 루블리안 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탐이 나긴 했다. 성공률 100% 주식이라니. 떠올리기만 했는데도 황홀하다.
“그 이후는 별거 없어요. 시현이 너무 보고 싶어서 빨리 돌아와 전학 절차를 마쳤거든요. 원래 대충 다른 학교에 있던 걸로 정신계도 조작했고요.”
정신 조작이라니. 이젠 어디에 태클을 걸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곤 지금 흘러나온 말 중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을 물었다.
“굳이 과거로 돌아간 이유는 뭐야.”
“그거야 시현이랑 평생 이 세계에서 살 건데 신분으로 문제가 되면 안 되잖아요?”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였다. 누가 보면 평생 같이 살아준다고 미래를 약속한 줄 알겠다.
한마디 하려는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했는데 신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니. 무언가 수상쩍음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는데.
심지어 다른 세계의 이가 이 세계엔 없는 마력을 썼는데 세계가 잘 굴러가기만 했다. 뭔가 잘못됐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여태 루블리안과 입씨름을 한 탓에 느지막하게 깨달았다.
내가 놓친 게 있나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만한 건 없었다.
생글 웃는 낯인 루블리안은 뭔가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물어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뭐든 다 말해줄 법한 루블리안은 가끔 중요한 것을 고의로 말하지 않았다.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이걸 추궁해야 하는지, 혼자 힘으로 알아내야 하는지 갈팡질팡했다.
루블리안을 힐끔 보니, 그는 그저 한결 풀어진 얼굴을 할 뿐이었다. 누구는 누구 때문에 이토록 고민하는데, 정작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속 편한 새끼.
그때였다. 갑자기 온몸에 스멀스멀 기분 나쁜 게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이하리만큼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마물이다. 이건 분명히 마물의 기척이었다.
“시….”
루블리안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한 손으로는 검지를 치켜올려 내 입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지만, 뭘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루블리안은 뺨을 붉게 물들이며 눈을 빛냈다. 마치…… 박시찬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애교를 보던 표정과 흡사했다.
저 기척을 못 느꼈을 리가 없는데도 얼굴이나 붉히는 태평한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문제는 그게 또 귀여워 보였다는 거다.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 했는데.
쪽. 손에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루블리안은 예쁘장한 얼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달을 그리며 웃는 눈만 보일 뿐인데 심장이 덜컹였다.
“이럴 상황….”
“시현. 마물이 이 세계로 넘어왔어요. 그리고 한 마물이 꽤 화가 났나 보네요.”
정신 차리라는 타박을 내뱉기도 전에 지루하단 눈빛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상황에 맞지 않게 어쩐지 태연한 반응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으음. 이건 저도 예상 밖의 상황이라…. 우선 나갈까요?”
“아니, 넌 여기 있어.”
머리가 복잡했다. 세계의 균형이 무너질 낌새가 보일 때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 그러나 내가 돌아오고 일주일간 그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세계의 균형이 무너졌지? 심각해진 내 표정에도 여유를 잃지 않은 루블리안이 여상하게 물었다.
“왜요?”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면, 당연히 신이 나타나니까.”
너 죽을 수도 있어. 뒷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내가 루블리안을 죽이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내가 그랬듯 신이 다른 세계에서 ‘용사’를 찾아올 수도 있었다.
“제가 걱정돼요?”
“그걸 말이라고 해?”
되물은 내 말이 달아 못 견디겠다는 듯 루블리안이 몸을 배배 꼬았다.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이라는 걸 알면서 저리 구는 것도 능력이었다. 저 생각 없이 해맑은 놈 때문에 내 속만 더욱 타들어 갔다.
“기척 최대한 죽이고 있어. 다녀올 테니까.”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빠르게 뒷문으로 학교를 나섰다. 예상에도 없던 무단 조퇴가 찍히게 생겼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나에겐 내 미래보다 루블리안이 우선이었다.
신은 분명 나한테 먼저 올 터였다. 마물을 처치하기에 제격인 사람이 ‘용사’인데다, 나는 용사였던 경력이 있으니까.
나는 역할 정도로 더러운 기척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괴상하게 생긴 반은 마족, 반은 마물 형태인, 반마반물형 마물이 보였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한낮, 이 주변에는 의아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용사! 우리 마왕님의 복수를 하러 왔다!”
그렇게 말한 마물이 턱을 쭉 올리고는 기세등등한 포즈로 콧김을 크게 내뿜었다. 시야에 오직 하늘만이 담길 만큼 치켜올린 고개에, 반마반물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다. ……반마반물의 지적 수준이 이렇게 낮았나.
선제공격을 하기엔 지금 내겐 무기가 없었다. 언제까지 저러나 보고 있으니,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마물이 ‘기습 공격이다!’라고 외치며 내게 검을 겨눴다.
원래 세계로 돌아오면서 단련하기 전의 몸으로 돌아간 탓에 전처럼 몸이 잘 따라주진 않았지만, 기본적인 운동 실력이 좋아 반사적으로 검을 피할 수 있었다. 멍청한 지능과는 다르게 찌르듯 들어오는 검은 꽤 날카로웠다. 풀어졌던 긴장감이 빠르게 조여졌다.
그나저나 마왕의 복수라니. 내가 이렇게 충성심이 강한 마물을 남겨뒀을 리가 없다. 마왕을 토벌하면서 마왕의 수족이란 수족은 다 죽였던 걸로 기억한다.
왜 살아있지? 심장을 찌르려는 듯 훅 들어오는 검을 피하며 유심히 마물을 관찰했다. 저렇게 징그럽게 생긴 놈을 잊을 리도 없기에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내 기억에 너 같은 마물은 없는데.”
검이 훅 들어올 때 몸을 뒤로 내뺐다. 검이 몸에 스친 적도 없어서 그런지 반마반물형 마물이 씩씩거리며 분함을 표출했다.
“기억에 없다니……! 이 김제로님은 늘 마왕님의 곁에 있었다고!”
조롱이라도 당했다고 생각하는지 마물이 흥분해 검을 더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러나 너무 정직한 궤적을 그리던 검이 조금 더 난잡하게 움직일 뿐이라 피하는 건 쉬웠다. 황실 검술 교본이라도 뺏어 배웠나 싶을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내가 골리는 구도가 돼버렸다. 딱히 그 구도에 반감은 없기에 나는 검이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하며 마물의 정체를 파악했다.
내가 죽인 마왕은 인간이 이지를 잃고, 명예와 돈이란 욕망에 지배당해 마왕이 된 터라 충정을 바치는 자가 많지는 않았다. 전체 마족 중 7분의 1과 마왕이 직접 창조한 마물 정도.
마계의 모든 이들이 아닌 것만으로도 수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들을 제외한, 여태 살아있고 마왕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복수까지 할 만큼 친밀한 놈을 생각해내면 됐다.
……근데 내가 어떤 놈들을 죽였더라. 게다가 늘 마왕 근처에 있었다면 안 죽였을 리가 없는데.
기억이 희미하다. 마왕도 그렇게 기억에 남는 편이 아니었으니, 그 밑에 애들 또한 그럴만했다. 기억이 나는 몇몇이라곤 정성스럽게 허튼소리를 했던 놈들뿐이고. 기억을 되짚어도 영 모르겠다는 내 표정을 읽은 듯 마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왕의 어깨 위에 있던 수하다!”
“……아. 그 솜털.”
한껏 약이 올라 부들거리는 외침에 그제야 흐릿하게 잔상이 떠올랐다. 옷의 일부인 줄 알았는데 마물이었나. 시커먼 솜털이 어깨에 달린 걸 보고 신은 마왕은 패션 감각도 떨어진다고 했었다. 신도 마물이라고 말을 안 했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소, 솜털이라니!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그 솜털이 저 근육 덩어리에 끈적한 액체 괴물이라니. 재창조된 수준이었다.
“무시냐!”
“아. 어.”
[무시냐는데 어느 누가 그렇게 대답해요!]
머릿속에서 웅웅 말소리가 울렸다. 이럴 수 있는 자는 신밖에 없다.
‘왜 이렇게 일찍 와.’
[지금 돌려 까는 거죠! 저도 사정이란 게 있었단 말이에요……!]
전혀 아니었다. 좀 더 늦게 오길 바라고 말했던 건데 혼자 지레짐작한다. 찔리나 보다.
‘검이나 줘.’
하지만 아니라는 답을 주진 않았다. 그런 친절을 베풀 필요도, 이유도 없었으니 말이다.
[알겠어요. 세계의 균형이 갑자기 무너진 이유라든가, 하고 싶은 이야긴 많은데 그건 나중으로 미룰게요.]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균형이 무너진 원인이 루블리안이라는 걸 알기 전에 어디로 빼돌려야 하나 싶었다. 아니면 죽을 미래가 선하다.
물론 아직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낮은 확률로 살아서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희망을 품는 것은 멍청한 일이었다.
그런 상념은 섬광이 번쩍인 듯한 환한 빛과 함께 나타난 검에 의해 사라졌다. 눈앞에 나타난 검은 황금색 이펙트가 둘러져 있었다. 이펙트 못지않게 외향 또한 눈에 띄게 화려했다. 누구 취향일지 뻔한 이 검은 내가 원래 쓰던 게 아니다.
‘원래 내가 쓰던 검 어딨어.’
[이번 검은 어디가 마음에 안 드세요?]
‘지나치게 반짝여. 그리고 원래 쓰던 검이 편하고 좋아.’
[그렇지만 그건 너무 칙칙하잖아요. 자고로 용사는 화려하고 멋진 검을 쓴다고요!]
그랬다. 신은 룩에 진심인 룩덕이었다.
그에 이용되는 건 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