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돈다발과 돌아온 원래 세계 (5)
이현의 손이 내 손등을 덮고 있었다. 전해지는 온기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간질거림에 손을 빼내니, 뼛속까지 발라먹을 듯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나는 조금 전의 이현처럼 시선을 마주할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무시하면 모를까.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나를 부르는 목청 좋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주인은 맨 앞자리로 밀려난 박시찬이었다.
“백션!”
“왜.”
“아니, 그냥 전학생이랑 오붓하길래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서?”
오붓하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뭘 어떻게 하면 이현과 내 모습이 정답게 보이는 건지. 나는 박시찬의 시력을 의심했다.
이 생각을 밖으로 꺼내면 양쪽 눈 다 1.5라고 난리 칠 게 뻔해,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그렇게 보여?”
생각에 빠져 뒤늦게 답하려던 때에 나긋한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다정을 담아 부드럽게 휜 눈과 한껏 올라간 붉은 입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현은 뺨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이며 기쁘다는 걸 온몸으로 드러냈다.
그런 이현의 모습 위로 루블리안이 겹쳤다. 나한테 미인계를 쓰겠다고 얼굴을 들이밀며 웃을 때도 저랬다. 저렇게 말갛고 새하얗게 웃었다.
보면 볼수록 똑같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쨍한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듯한 물빛 눈동자도, 빛 없이도 찬란한 금발도 똑같다. 또…….
“그으래애브여어~? 는 무슨! 백셔언! 이건 배신이야!”
나도 모르게 이현에게서 루블리안의 흔적을 찾는데, 이리형의 큰 목소리가 이를 벗어나게 했다. 그는 자기가 코알라라도 되는 줄 아는지 앉아있는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 덕에 이현과의 거리가 조금 벌어졌다.
“뭐가 배신이야.”
“낯가림 엄청 심하면서 방금 막 본 애가 하는 터치는 그냥 받아주고오~ 귀엽고 깜찍한,”
“끔찍한 이라고 빡대가리야!”
“악! 백션, 김민식이 나 때려! 이거 완전 학폭감인데 117에 신고해버린다!”
“아오! 해! 해봐, 이 새끼야!”
시끄럽게 서운한 걸 토로하는 이리형은 김민식에게 머리를 한 대 맞더니 왁왁 싸우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내 어깨를 감싼 팔을 떼어 내려고 하는데, 불쑥 뽀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현은 이리형의 팔을 떼놓은 것도 모자라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곤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내 어깨를 감싸는 팔을 한번 곁눈질하다 곱게 웃는 이현과 생글거리는 이리형의 신경전을 눈치챘다.
방금까지 이리형과 왁왁거리던 김민식은 관전에 돌입해있었다. 거기다 박시찬의 간식 가방에서 팝콘까지 꺼내는 게 아침 드라마를 보는 애청자가 따로 없다.
“전학생은 우리 백션을 ‘처음’ 봤으면서 왜 이렇게 달라붙지?”
“친해지는데 기간이 중요한가? ‘처음’ 본 전학생보다 못한 것 같은데, 너는.”
유순히 웃는 얼굴과 다르게 무척이나 도발적인 말이었다. 루블리안이 시비가 걸리면 하는 행동과 매우 똑같았다.
얼굴이랑 더러운 성질머리가 같아서 그런가. 전학생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현실 같았는데 지금은 현실감이 없었다.
루블리안과 함께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능을 치른다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교복을 입으면 잘 어울릴 거다. 그래, 딱 지금 옆에 있는 이현처럼.
막연히 상상을 해보는데, 어깨와 목 부근이 간지러웠다. 이현이 어느새 내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시현아… 내가 혹시 뭐 잘못 말했어? 한국말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어렵네.”
이어 시무룩한 목소리가 숨결과 함께 내 목 부근에 내려앉았다.
“와. 와……!”
그런 이현을 보며 이리형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턱 막힌 것처럼 탄성만 내뱉었다. 잠시 딴생각을 한 사이 호되게 당한 모양이었다.
김민식이나 박시찬도 이리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숭의 끝판왕을 보는 얼굴이었다.
“글쎄.”
“쟤 백프로 대화 안 들었다에 만 원 건다.”
짤막한 말 하나로 내가 이 둘의 신경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린 김민식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거기에 말을 얹어 해명하지 않았다. 할 이유도 없었고, 사실이기도 했고.
“자리에 앉아라.”
문을 열고 들어온 1교시 수업 선생님이 책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탕탕 소리에 세 명이 자리로 향했다. 마지막까지 이리형의 시선은 이현에게 닿아있었다.
원래도 친구한테 집착하는 애라는 건 알았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이현이 루블리안이랑 닮아서 나도 모르게 스킨십을 받아주는 것도 한몫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내 어깨에는 아직도 이현의 팔이 존재했다. 어쩐지 묵직하다 싶었다. 루블리안과 똑같이 생겨서 나도 모르게 여태 어깨를 내어주고 있었나 보다.
나는 빠르게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이현의 팔을 떼어 냈다. 루블리안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상, 말로 풀라고 하면 듣질 않을 테다.
“시현아.”
느릿한 음성이 귓가를 감아왔다. 루블리안 탓에 귓가에 숨결이 닿는 게 익숙해 큰 반응을 내비치진 않았다.
“왜.”
“나 싫어?”
그리 묻는 이현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절대 나를 싫어할 리 없다는 듯이.
허탈한 숨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러니까 자꾸 겹쳐보게 되는 거였다.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입을 꾹 닫았다.
이대로 가다간 이현을 볼 때마다 루블리안을 떠올릴 듯했다. 그 때문에 루블리안을 추억 속에 묻어두려는 것 또한 못하게 생겼다. 정말, 남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루블리안처럼.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대화를 이어나가다간 간이고 쓸개고, 주지 않아도 혼자 다 빼 가버릴 것 같다.
나는 이현에게 답을 해주지 않은 채, 교과서에 필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집중이 안 됐다. 옆에서 보겠다는 교과서는 안 보고 날 빤히 바라보는 이현이 문제였다.
“……그만 봐.”
“으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아까보다 발음이 조금 불분명했다. 옆을 흘겨보니 이현이 책상 위에 팔을 뻗은 채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의 말랑한 뺨이 짓눌린 채였다.
이현이 계속 날 보던 터라 눈이 마주쳤다. 얽힌 시선을 풀어내려는데 이현이 말했다.
“그만 듣고 나랑 놀아. 놀아줘.”
얼핏 징징거림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으나, 이현의 여유롭고 나긋한 목소리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토라진 아이를 살살 달래는 어른 같았다.
“수업이나 들어.”
틀었던 고개를 원상 복구시키고 이현 때문에 놓친 필기를 빠짐없이 채웠다. 집은 형광펜이 파란색이었다. 누구의 눈을 상기시키는 색이라 바꿀까 하다 그냥 쓰기로 했다.
이런 걸 신경 쓰는 것도 웃기다.
_oOo_
바로 옆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이마를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검고 긴 속눈썹은 촘촘히 내려앉아 그림자를 만들고, 그 그림자 속 연갈색 눈동자는 또렷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보지 말라고 했지만, 안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백시현이 ‘리안’으로서 존재할 때도, 자신의 시선은 한결같이 그를 향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 적당히 보라니. 야박하기도 하지. 루블리안은 입 밖으로 나올 뻔한 헛숨을 삼켰다.
루블리안은 시현에게 자신이 루블리안이라는 티를 더 낼지에 대해 고민했다. 이리 똑같이 구는데 시현이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이유를 꼽으라면, 자기의 고유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존재할 시 일어나는 일 때문일 터다.
고유 세계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을 할 시에는 총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는 가지고 있던 힘의 크기가 배로 커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속에 있던 욕망이 점점 커진다는 것이다.
그냥 듣기만 하면 나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지만, 힘의 크기가 커지면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는데 그땐 신이 나서게 된다. 신이 ‘용사’ 백시현을 불러 마왕을 처리하게 한 것처럼. 더불어 커지는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지를 잃고 욕망에 지배를 받는다.
해치운 마왕도 같은 경우였다.
다른 세계로 넘어온 이가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힘은 배로 커졌으나, 가난에 시달렸던 그녀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다. 결국, 욕망에 그대로 삼켜졌다.
‘멍청하긴.’
그 욕망 하나를 제어하지 못한 이를 비웃은 루블리안은 자신을 힐끔 보는 백시현에게 웃어주었다. 이어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보통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게 보편적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세계를 넘어온 이들 모두 다 욕망에 삼켜졌으니까.
‘그래서 나도 넘어오면 죽을 테니, 결코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들의 결말은 모두 죽음으로 직결되었다. 이지를 잃었으니 협상을 할 수도 없었고, 애초부터 신은 인간 세상에 개입하는 편이 아니었다. 자신의 고유 세계에 마왕이 생겨났을 때, 용사랍시고 시현을 딸랑 데려다 놓기만 한 걸 보면 답이 나왔다.
두 번째 이유는, 신의 도움 없이 세계를 건넌다는 게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서일 터다.
백시현이 ‘리안’으로 존재할 때, 시간 마법과 차원 이동 마법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이 나 있었다.
‘우리 시현이는 관심도 없었을 테지만…….’
마왕 토벌의 끝이 보일 때마다 백시현은 의식적으로 차원 이동 같은 마법을 멀리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블리안은 그가 자신의 고유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추측했다.
어쨌든 백시현이 ‘용사’로 존재할 때만 해도 그런 분위기였다. 절대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차원 또한 이동할 수 없는, 금기시된.
그러니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야 자신이 이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생각하는 것일 터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신의 도움을 받는 게 쉬운 일도 아니니.
‘나는 마법으로 해냈지만.’
루블리안의 눈매가 둥글어졌다. 자신감이 가득한 푸른빛 눈동자에는 여전히 백시현이 담겨 있었다. 특히, 그의 시선은 붉게 달아올라 원래 색을 알기 힘든 귀에 오래도록 닿아있었다.
시현, 본인은 모르지만, 그는 루블리안이 하는 스킨십에 한에서 피부가 붉어지는 편이었다. 루블리안은 그 사실을 정말 좋아했다. 몇 시간 내내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수업이 끝날 때까지 루블리안의 시선은 시현에게 머물렀다.
수업 종이 울린 후, 루블리안의 시선이 저절로 책을 정리하는 가지런한 하얀 손으로 옮겨졌다. 그 손은 거칠어 보이지 않았다. 용사로 지낸 세월이 거짓인 것처럼 그의 노력에 대한 흔적은 다 사라진 상태였다.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따라와.”
이건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두고 싶다는 티를 내면서, 자기도 모르게 나를 받아주고 있지 않았나. 아니면 확신을 얻으려는 걸까. 여러 의문이 샘솟았다. 그러나 루블리안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밝히는 게 좋겠지.’
선 밖으로 밀려나는 기분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루블리안은 짙게 웃었다. 사실을 털어놓으면 놀라 걱정할 백시현을 상상하기만 해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