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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4)화 (4/112)

004. 돈다발과 돌아온 원래 세계 (4)

수업 종이 치자 내내 뒤에 서 있던 박시찬이 돌진하듯 달려들었다. 한 마리의 황소 같은 모습에 순간 내 주변에 빨간 망토라도 있나 싶었다.

“백션! 뭔 소리야, 그게? 농담이 아니라 진심?”

“어.”

“와 미쳤네. 살다 살다 백션이 좋아하는 사람도 생기고…….”

박시찬이 얼굴을 막 쓰며 감탄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고 건수를 물은 듯한 저 두 하이에나가 문제였지.

이리형과 김민식이 재빠르게 내 앞까지 당도했다. 미처 자리를 뜨지 못한 나는 바리케이드같이 서 있는 녀석들에게 갇혀버렸다.

“백션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누군데?”

“그건 나도 몰라. 누구야, 백션.”

괜히 말했다. 귀에 바람을 부는 둥 내 입을 열려고 하는 세 명은 날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셋을 무시로 일관하며 다음 교시 교과서를 꺼내자 박시찬이 교과서를 가져갔다. 이젠 책상에 있는 내 물품까지 하나, 둘 가져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건데 샀냐? R.S? 웬 이니셜?”

김민식의 손엔 남색 만년필이 있었다. 하필 가져가도 저걸 가져간다. 나는 김민식의 손에서 만년필을 빼 왔다. 그리고 담담히 세 명에게 말했다.

“내 물건 다 제자리로 돌려놔.”

화를 낸 것도 아닌데 세 명은 식겁해선 물건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아까 각이 몇 도였다면서 각까지 맞추는데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정리를 마친 후 셋은 합심이라도 한 듯 박시찬의 간식 가방을 털어, 내게 먹을 걸 쥐여주고 김민식의 자리로 향했다.

저 바보 같은 녀석들이 이상한 오해를 하는 듯했다.

_oOo_

“야 김민식. 백션 화난 것 같지 않아?”

“그런 듯. 조용하게 말하는데 그 속에 분노가 느껴지지 않냐?”

“그니까. 개무섭던데.”

이리형이 소름이 돋았다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평소라면 오버하지 말라고 할 김민식이 그런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김민식 또한 그럴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박시찬은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필기한 것을 돌아보는 백시현을 곁눈질했다.

‘역시 이상한데.’

고개를 다시 원상태로 돌린 뒤 그가 물었다.

“이리형. 오늘 백션 좀 이상하지 않아?”

“좀? 내가 매달리면 바로 쳐내는 게 정상인데 반응 느리더라.”

“시발. 그걸로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도 미친 거 아니냐?”

김민식이 책상을 치며 깔깔 웃었다.

“야 그만 쪼개. 진짜인 걸 어쩌라고.”

“내가 아니라고 했어? 웃긴다고 한 거지.”

김민식과 이리형이 투덕거리는 사이, 박시찬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백시현의 인간관계는 굉장히 좁았다. 사실상 그의 친구는 박시찬의 친구였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과 평소와 다른 분위기는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에이씨. 몰라 괜찮겠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상스럽게 다음 교시 교과서를 보는 백시현을 주시하던 박시찬은 머리를 박박 긁었다.

걱정하지 않으려던 박시찬은 자꾸만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백시현에 학교가 끝날 때까지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몰래 본다고 봤지만, 그 시선을 모를 수 없는 백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변했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_oOo_

원래 세계로 돌아와 지낸 지 일주일. 용사로 3년을 살았다는 게 꿈이었던 것처럼 원래 세계에 녹아드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져 고개를 드니 박시찬이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백션, 그거 들었어?”

내가 소문에 둔한 걸 알고 있으면서 묻는 이유는 뻔했다.

“아니.”

관심 좀 달라는 거였다.

내 부정에 박시찬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옆자리 의자를 빼 앉았다. 옆자리가 박시찬의 자리였으니 자기 자리에 앉은 거였다.

“오늘 전학생 온대. 우리 반에.”

“어, 그래.”

어차피 나와는 상관도 없을 이였다. 나는 1교시 교과서를 꺼내 오늘 나갈 내용을 눈에 담았다. 교과서 내용은 유익하기라도 하지, 박시찬의 말은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

“반응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어.”

“하긴……. 백션한테 내가 너무 큰 걸 바랐네.”

옆에서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탄하던 박시찬이 옷 중앙을 잡아 펄럭이고 있는 듯했다.

확실히 6월이라 덥긴 했다. 이제 기말만 남았다. 중간은 용사를 하기 전에 봤으니 이번 것만 잘 보면 됐다.

다시 생각하니까 더 이상했다. 기말밖에 안 남은 시점에 전학이라니. 의아하긴 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얼굴도 모르는 전학생보단 내 인생이 먼저였다.

“그러고 보니 미국인이라고 하던 것 같기도 하더라.”

“……미국인?”

“오, 글로벌해야 관심을 두는 거야? 듣기론 금발에 파란색 눈이라고 하더라고. 이왕 오는 거 여자였으면 했는데.”

박시찬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우리 반으로 오는 거면 남자가 확실했다. 남녀 분반이니 말이다.

금발에 벽안.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인물이 있었다.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며, 전학생일 가능성은 더욱더 없는 사람인데 왜 뇌리에 스쳤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닮은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개인 사정으로 전학을 오게 됐다고 소개를 하는 전학생은 루블리안과 미치도록 똑같았다.

세상에 저런 얼굴이 둘이나 될 수 있나? 세계가 달라서 신이 눈 정화하라고 한 명씩 내려준 것도 아니고.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생각하길 포기했다.

“현이라고 불러주면 돼.”

그렇게 말한 전학생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꼭 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입술이 바짝 말랐다. 저 시선에 담긴 애정이 너무나 선명하여, 여기에 존재할 리가 없는데도 전학생이 루블리안이라고 착각해버릴 것만 같았다.

“선생님.”

“왜 그러니.”

“저 자리에 앉고 싶은데 안 될까요?”

전학생이 콕 집은 곳은 내 옆자리였다.

“박시찬. 옮겨라.”

“네? 원래 제 자리잖아요!”

“전학생의 특권이다. 이참에 앞에 앉아서 졸지 말고 공부해라.”

마침 전학생이 원래라면 앉을 빈자리는 맨 앞자리였다.

박시찬은 몇 번 항의하다 팩폭으로 두들겨 맞고 자리를 옮겼다. 퍽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이었지만, 위로해주진 않았다. 다 자기 업보였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내 옆자리로 다가온 이현이었다. 그의 걸음걸이가 익숙했다. 투박하지만 우아하다는 모순적인 말이 허용되는, 루블리안만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긴 몸짓이었다.

“안녕, 시현아.”

평범한 인사일 뿐인데 애교가 가득했다. 자연스레 이현에게 루블리안이 겹쳐 보였다.

“안녕.”

인사를 안 받아줄 수는 없어 대답하자, 이현이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내 손을 붙잡았다.

이런 점까지 왜 똑같은 거지.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아졌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전학생이 루블리안이라는 의심이 크기를 키웠다.

“이현이야.”

손을 빼내려는데 불쑥 산뜻한 바람이 살랑이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낯간지러운 목소리는 내가 많이 들었던 목소리와 똑같아 익숙하기까지 했다.

“알아.”

“이름을 안 불러주길래 모르는 줄 알았어. 지금이라도 불러주면 안 돼?”

아양을 떨듯 이현이 눈웃음을 치며 잡은 손바닥을 살살 엄지로 문질렀다.

“……굳이?”

“으응. 굳이.”

이 대화 패턴도 똑같다. 이젠 내가 기억을 혼동하는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루블리안은 이 세계에 존재하면 안 됐다. 애초에 신의 도움 없이 세계를 이동하는 게 말이 되나. 아무리 마탑주인 루블리안이라도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현.”

“으음. 기왕이면 현아, 라고 해주면 좋겠는데.”

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샐샐 웃는 얼굴로 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루블리안이랑 똑같은 얼굴과 행동 때문인지 속절없이 시선을 빼앗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진 계속 깍지를 끼고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게 고집이 센 것까지 루블리안이랑 똑같다.

……얘 정말 루블리안인가?

의심을 점점 키우던 나는 혼자서 손을 풀려고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했다. 이현이 귀신같이 풀려고 하는 타이밍마다 손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항복 선언이라도 하듯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밖엔 없었다.

“현아. 손 놔.”

원하는 걸 얻어낸 이현이 고분고분하게 손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아쉽다는 눈길이 진득하게 머물렀다. 귀와 꼬리가 있다면 축 처졌을 모습이었다.

“너….”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이현의 행동이 루블리안과 너무나 흡사하여 무심결에 루블리안이냐고 물어볼 뻔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정말 없는데, 이상했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나?

이현은 노골적인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받아치듯 뚫어져라 보더니, 의자를 바짝 당겼다. 손끝과 손끝이 닿을 거리였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냐는 듯 이현에게 눈치를 주자, 이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행동이 자연스러운 게, 모른 척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듯했다.

“떨어져.”

“나 교과서 없는데. 같이 보자.”

이현이 책상 위에 있는 내 손등을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그걸 빤히 봤으면서 이현은 모르는 척 더욱더 진득하게 손등을 어루만졌다. 이어 반달로 눈을 휘며 되물었다.

“으응?”

상당히 익숙한 애교스러운 말투로.

“교무실에서 선생님께 받아와.”

하지만 거기에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루블리안과 미치도록 닮아서 한번 휘둘려주면 그대로 쭉 휘둘리게 될 거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지만 나 전학 첫날이라 교무실에 가는 길도 모르는데…….”

마치 교과서를 보여줄 게 아니라면 교무실로 안내해달라는 듯한 어조였다. 이현은 고개를 숙인 상태로 눈동자만 위로 굴렸다. 풍성한 속눈썹이 만든 차양 속에도 내가 사랑하던 색을 품은 눈동자는 눈부셨다.

잠시 넋을 놓았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현과의 대화가 익숙하다 느껴진 이유를 찾아냈다. 선택지에 결코 자신의 손해는 없는 게 루블리안식의 개수작과 같아서였다.

교무실로 안내하든, 교과서를 같이 보든 어느 쪽이든 이현에게는 이득일 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나와 함께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선생님이 교무실로 돌아갈 때 따라가라고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앞을 보니 조회는 이미 끝났는지 선생님은 자리에 없었다. 그건 내게 남은 방법이 두 가지뿐이라는 거였다. 다른 애들한테 안내해달라고 하라는 방법도 있긴 한데… 들어먹을 것 같진 않다.

“……그냥 같이 봐.”

끝내 이현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교과서를 통으로 내어주고 루블리안을 상기시키는 이현과 대화를 단절하고 싶었으나, 고3이었다. 교과서를 그냥 줄 수가 없었다.

내 허락에 이현이 의자를 조금 더 당겼다. 의자가 맞붙을 정도였다. 이 정도로 가까울 필요는 없어, 좀 옆으로 가라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미처 빼내지 못한 손등에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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