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돈다발과 돌아온 원래 세계 (3)
눈을 뜨자 보이는 건 허름한 여관방이 아니었다. 익숙한 듯, 낯설게 느껴지는 하얀 천장이었지. 습관적으로 마법을 쓰려다, 체내에 마력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작 3년뿐이었는데도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드는 오묘한 기분에 몸을 조금 뒤척였다. 얇은 이불이 마찰하여 부슬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마치 어젯밤,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난 것처럼 이불까지 덮은 상태였다. 왠지 모르게 움직이기 싫어, 나는 고개만 돌려 3년 만에 마주하는 방을 눈에 담았다.
침대 옆, 서랍 위의 책갈피가 꽂힌 책과 물병. 고장 난 탓에 완벽히 닫히지 않는 옷장. 의자에 걸린 흐트러진 겉옷. 3년 만에 본 방은 조금은 낯설었지만, 변함없었다.
도리어 3년 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활감이 가득하여,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동안 이곳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게 몸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던 중 문득 그들이 쪽지를 발견했을지 궁금해졌다. 한 줄밖엔 적지 못했으나, 못 봤다면 좀 아쉬울 것 같았다.
잠시간 이제는 만나지 못할 동료들을 상기하는데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만년필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의식을 잃기 전 쥐고 있던 게 만년필이긴 했다. 그렇지만 보통 의식을 잃으면 손에 힘이 풀리지 않나? 황당하기 짝이 없다.
조심스레 만년필에 새겨진 이니셜을 매만지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쉽지만 더 생각해봤자 이미 끝난 일이다. 그러니 현재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애써 상념을 지워버리곤 현대인의 필수품, 핸드폰을 먼저 찾았다. 다행히도 구석구석 찾을 필요 없이 핸드폰은 항상 놓던 곳에 있었다.
8:20
시간과 날짜를 보니 얼른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도 모자랐다. 징징 울리는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꾼 뒤 옷장을 열었다. 3년 만에 보는 교복은 여전했다.
하긴 바뀐 건 없을 테다. 나만 제외하면.
다시금 3년이라는 시간이, 여기선 흐르지 않았다는 걸 느낀 나는 잠시간 멍을 때리다,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 무얼 챙겨야 할지 잠시 멈칫한 것만 빼면 3년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아.”
나가기 전 시야에 들어온 책상 위에는 통장, 카드, 비밀번호 등이 적힌 메모지가 놓여있었다. 용사 행세를 하고 얻은 대가였다.
나는 그것들도 챙겨 가방에 넣은 뒤 방 손잡이를 돌렸다. 모두가 나간 듯 집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서 학교로 가던 중 핸드폰을 켰다. 오랜만에 보는 등굣길은 꽤 생소했고 3년 동안 어딜 가든 루블리안이 따라다녀서 그런지 혼자 있는 지금의 적막이 어색했다.
벌써 느껴지는 루블리안의 부재에 속이 울렁거렸다. 한번 숨을 크게 들이켠 나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핸드폰 상단에 띄워진 대화창이었다.
[♥톡 좀 봐 개 같은 친구야ㅗ^^ㅗ♥ 4]
대화창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한결같은 방 이름이었다. 이리형과 박시찬이 멋대로 바꾼 방제를 다시 바꾸기 귀찮아 여태껏 내버려 두고 있었다.
드래그하여 읽지 않은 대화들을 차례차례 읽어내리자, 나를 가지고 내기하는 메시지들이 보였다.
[박시찬]
?
ㅁㅊ 백션 안 옴 오전 8:10
[김민식]
ㅈㄹ ㄴ
농담도 좀 그럴듯한 거로 해야지
개노잼; 오전 8:11
[이리형]
ㄹㅇ ㅋㅋ 오전 8:11
[박시찬]
ㅈㄴ 억울하네
만원 빵 ㄱ? 오전 8:12
밑으로 내려갈수록 만원 빵을 해서 진 김민식의 울부짖음과 박밑김-박시찬 밑 김민식- 등으로 김민식을 놀리는 대화가 이어졌다.
한심한 작태에 루블리안과 몬트리오가 떠올랐다. 둘도 대화만 하면 이랬다. 순간 현실감이 훅 밀려들었지만, 별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그저 걸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였다. 다시 시간을 확인하니 8시 44분으로 예상한 대로 지각이었다. 학교에 들어서 제일 먼저 간 곳은 교무실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지각한 이들을 교무실로 부른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뭐 하다 늦었냐.”
“몸이 좋지 않아, 늦잠 잤습니다.”
“너 고3이다. 정신 차려, 이 녀석아.”
약간의 거짓이 섞인 말에 선생님은 짧게 걱정을 담은 잔소리를 하시다, 손을 휘적였다. 곧 수업이 시작하니, 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꾸벅이는 것으로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반으로 향했다. 핸드폰을 켜니 또 톡이 와 있었다.
[이리형]
오 백션 읽었다
백션 왜 안 왔냥 >.< 오전 8:47
[김민식]
ㅅㅂ
애교 빼 오전 8:47
[이리형]
힝
민식이 질투하니ㅠ
미안하지만 민식이는 내 취향 아냥ㅠ 오전 8:48
[김민식]
ㅅㅂ
ㄲㅈ;; 오전 8:48
[박시찬]
추민식 김하다 오전 8:48
마지막 대화까지 다 보고 나니 반 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김민식에게 향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이리형을 좋아하는지 몰랐네. 난 필요 없으니까 너 가져.”
“시발. 줘도 안 가져! 늦게 온 새끼가 말은 많네.”
김민식이 뾰족하게 눈을 떴다. 그래 봤자 용사일 적 본 마족이나 험하게 생긴 용병보다 눈매가 순해 전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3년 만이라 그런지 일방적으로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그래서 김민식에게서 떨어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무게가 느껴졌다.
일순 루블리안이 뇌리에 스쳤다가 사라졌다. 걔가 여기 있을 리가 없다. 살짝 고개를 트니 이리형이 어깨에 팔을 감아 내게 매달리고 있었다.
“백션 너무하네~ 어떻게 이렇게 귀엽구 깜찍한 날 김민식 같은 놈한테 넘기지?”
“아 시발. 애교! 작작! 하라고!”
“백션 쟤가 나 때려!”
리듬감 있게 때리는 김민식에게 탈탈 털리면서도 날 놓지 않은 이리형의 손을 떼어 냈다. 이어 이리형을 그대로 김민식에게 선물했다.
“미친. 백션 진짜 이러기야?”
“어.”
둘을 내버려 두고 뒤늦게 내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3년 만이라 가물가물할 법도 한데 늦게 와서 그런지 내 자리가 유독 눈에 잘 들어왔다.
“뭐야. 백션 왔네. 나 오늘 너 안 오는 줄?”
“박시찬.”
“엉?”
“우리 고3이다.”
한 문장에 박시찬은 모든 걸 이해해버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듯 부러 우는 척을 했다. 그런 박시찬을 보며 한마디 했다.
“그렇게 하니까 너 진짜 못생겼다.”
“허 참나. 난 이런 얼굴을 해도 멋있어. 내 별명 몰라, 백션?”
“축구광이었나.”
“아니거든! 내가 말이야. 우리나라 외모의 미래라고. 알겠어?”
박시찬이 가슴을 쭉 내밀며 당당하게 웃었다. 멋들어지게 보이려고 한 것 같았지만, 오히려 느끼하기만 했다.
“우리나라 미래 외모 망했네.”
“저 별명, 우리 엄마가 지어주신 건데.”
“…….”
“우리 엄마가 그렇게 말해줬다고 백션.”
꼭 동의를 듣고야 말겠다는 눈치였다. 박시찬도 내가 얼마나 눈이 높은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렇다는 말을 들으려 하는 거겠지.
하지만 탈룰라를 하기도 애매한 타이밍이 되어버렸지 않나.
박시찬에게 답을 주지 않은 나는 교과서를 찾았다. 옆 통수에 시선이 박히는 게 느껴졌으나, 용사일 때 더한 시선을 감당해서 그런지 딱히 박시찬이 바라는 말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짜 말 안 해줘? 와, 나 서운해지려고 그래.”
나는 시간표를 확인하고 1교시 교과서를 찾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1교시 선생님은 원래도 늦게 들어오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평소에는 선생님의 지각에 유감이 없었다. 그러나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는 박시찬이 귀찮아 오늘만큼은 일찍 들어왔으면 했다. 이미 지각이긴 하지만.
“백셔어언. 진짜 이러기야?”
“맞아! 진짜 이러기야? 귀염둥이 리형일 어떻게 저런 무시무시한 김민식한테 놓고 가!?”
“이리형. 넌 빠져. 나부터야.”
“엥. 리형이 어이없죠. 리형이가 먼저 백션한테 버려졌죠.”
이리형이 호시탐탐 내 어깨에 매달릴 기회를 노렸다. 덥게 달라붙는 이리형을 계속 밀어내며 나는 이 말 안 듣는 두 녀석에게 시달렸다.
3년 만이라 더욱 기가 빨린다. 이 난장판에서 남의 집 불구경이라도 하는 듯한 김민식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저 녀석이 일부러 히죽 웃고 있어 더 그랬다.
“김민식. 좀 말려.”
“업보잖아. 청산 잘해라.”
김민식은 전혀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즉, 지칠 줄 모르는 녀석들을 혼자 힘으로 떨쳐내야 한다는 거였다.
“하아. 먼저 멈추는 사람 매점 쏜다.”
“철이 없었죠. 리형이 백션을 괴롭혔다는 게~”
이리형이 재빨리 손을 놓고 물러났다. 곧이어 박시찬도 물러났지만, 늦었다.
“이리형, 먹고 싶은 거 정해놔.”
“아싸! 박시찬 개느리네.”
“일부러 한 박자 늦어준 거거든?”
둘이 욕을 빙자한 덕담을 주고받으려는 순간 앞문이 열렸다. 순식간에 이리형과 김민식이 제 자리로 향했다.
수업이 시작하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던 반이 점점 시원해졌다. 오랜만에 듣는 수업은 지루하고 따분했다. 그러나 손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어 잠들진 않았다.
[백션]
필기하는 노트에 이름이 쓰였다. 박시찬은 내가 보고도 대답하지 않자 샤프 뒤쪽으로 내 손등을 찔렀다.
[왜]
[여소 받으실?]
[아니]
즉답에 놀란 듯 잠시 대화가 끊겼다. 칠판을 보느라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대충 어떤 표정일지 예상이 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봐온 여파인 듯했다. 벌써 12년째 쟤를 보고 있다니. 생각하니까 징글맞다.
[왜? 너 내가 네 취향인 사람만 소개해 주는 거 알아서 거절 안 하잖아]
사실이었다. 징글맞게 오래 봐온 탓인지 박시찬이 소개해주는 이는 언제나 내 이상형에 부합했다.
[네가 소개해준 사람이랑 내가 사귀는 거 봤어?]
[그건 아니긴 한데 너 우선 받는 편이잖아]
[얼굴 보고 거절하려고 받는 거야]
전에 여소를 받지 않았다가 집을 알아내서 찾아온 사건이 있었다. 박시찬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그때 이후로 얼굴을 보고 거절하는 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뭣 하러 그렇게까지 했나 싶었다. 그땐 부모님이 중요했으니 그랬었나. 이제 와 생각해봤자 지금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라 상념에 빠지려는 걸 그만두고 펜을 고쳐잡았다.
[그리고 나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
“뭐?”
머뭇거림 없이 적어 내린 말에 박시찬이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반이 조용했던 탓인지 유독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말은 선생님께도 들릴 만했다는 거다.
“박시찬. 뒤로 나가.”
“아, 쌤! 한 번만 봐주세요. 저 수업도 되게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필기 검사할 때마다 새 책을 내는 놈이 말이 많다. 나가.”
매우 궁금해하는 박시찬은 결국 뒤로 나가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 날 노려보는 건지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내 입이 열릴 일은 없을 텐데. 담담히 생각을 이어나가다 마지막으로 쓴 문장이 눈에 걸렸다.
이제는 볼 일도 없는 사람인데 머릿속에서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필통 속에서 아침에 챙긴 만년필을 꺼내 습관처럼 이니셜을 문질렀다.
이젠 기억 속에서만 살아갈 사람이면서 내게 너무 큰 흔적을 남겼다. 미처 모르는 순간부터 조금씩.
그에 관한 생각에 빠지니 도통 수업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기분에 속이 울렁였다. 오늘은 이미 망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닫고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머리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지만, 필기만큼은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