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돈다발과 돌아온 원래 세계 (2)
루블리안의 말 대부분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동하니 꽤 빠르게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가자.”
내 말에 동료들이 알겠다며 동의했다. 마왕을 죽인 뒤 쉬지 않고 달려 그들도 피로가 쌓인 모양이다.
마을은 마왕을 토벌한 곳 가장 근처에 있어서 한산하고 초라했다. 그렇지만 우리를 알아볼 사람이 적어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기쁜 날이니까 다들 술 한잔 어때? 리안, 괜찮지?”
붉은색과 파란색이 혼탁하게 섞인 하늘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에게 다가가는 데드리언의 발걸음에는 흥겨움이 묻어났다.
술 마시는 게 그렇게 좋나. 그런 의문을 해소하듯 준비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마시고 죽을 작정을 한 건지, 마을에 있는 술이란 술은 전부 사서 온 듯 나무 탁상 위엔 술통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리안은 술 마신 지 2년 됐나?”
“맞아요! 그때 저 열아홉 살이라 안 먹겠다는 말을 듣고 놀랐었잖아요!”
열아홉 살이면 여긴 이미 성인이지만, 내 세계는 다르니까. 내가 굳이 대답해주지 않아도 그들은 알아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술안주를 씹으며 술을 들이켰다. 처음엔 무슨 맛으로 먹나 했는데 마시다 보니 다들 왜 저리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리안. 저 취한 것 같아요.”
한창 떠들던 중, 루블리안이 슬그머니 내게 기댔다. 루블리안의 주량을 아는 나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술고래인 주제에 몇 잔 마시지도 않고 취한 척이다.
“너 안 취했어.”
“으응. 취했는데?”
“안 취했다고.”
이렇게 말하니 루블리안이 취하지 않은 사람 같고, 내가 취한 사람 같았다. 몇 번 루블리안을 타이르며 비키라고 했지만, 그는 도통 듣지를 않았다. 결국 오가는 말씨름의 승자는 루블리안이 되었다.
취한 척에 뻔뻔함을 더한 루블리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듯했다. 적어도 나는 무리였다.
루블리안은 수작이 성공했다는 게 기쁜지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가슴팍이 그의 얼굴 때문에 묵직했다.
“리안, 리안.”
두 차례 이름을 부른 루블리안이 나를 눈에 담았다. 부드럽게 접힌 그의 눈꼬리엔 거부하기 힘든 애정이 아롱아롱 달려있었다.
순간 그 애정에 목이 콱 막히는 듯하여 주저하다 뒤늦게 입술을 뗐다.
“……왜.”
“제 이름도 불러주세요.”
“굳이?”
“네에. 굳이.”
루블리안이 칭얼거리며 가슴팍에 살살 얼굴을 비비다 뽀얀 얼굴을 들이민다. 이렇게 하면 불러주리란 걸 아는 듯이.
습관이 잘못 들었다. 처음부터 이런 스킨십을 받아주는 게 아니었는데. 확실하게 선을 지켰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루블리안의 청을 들어줄 터다. 늘 그랬듯이.
이렇게 생각하니까 내 습관이 잘못 든 것 같기도 했다.
“루블리안.”
“네에.”
“얼른 자.”
“으응. 리안이 같이 자주면 잘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헛소리하지 말고.”
나는 등 뒤로 팔을 뻗어 루블리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내 쪽으로 당겼다. 그러곤 손을 움직여 천천히 그를 토닥였다. 잔말 말고 자라는 뜻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멍하게 보던 루블리안은 그대로 굳었다. 평소에 먼저 접촉하지 않던 내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품에 안으니 당황한 듯했다.
“리, 리안?”
오죽하면 말까지 더듬을까. 약삭빠른 여우가 따로 없던 놈이.
그런 루블리안을 내버려 두고 술잔을 기울였다. 아쉽게도 그는 드문 모습을 빠르게 감추고 제 페이스를 되찾았다.
“리안이 굿나잇 키스까지 해주면 진짜 잠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먹잇감을 앞둔 짐승처럼 루블리안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언제 두른 건지 내 허리를 감싼 팔엔 힘이 들어간 채였다. 그런 루블리안에게 이제 떨어지라는 말을 하려던 때였다.
[시현!]
신의 음성이 머리를 강타하듯 울렸다.
‘왜.’
[정말, 정말 죄송한데요. 시간이 얼마 없어요. 시현이 가진 힘이 예상보다 강력해서…….]
뒷말을 잇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신의 음성을 더 듣지 않고 물었다.
‘몇 시간이야. 아니면 몇 분.’
[한 30분? 진짜 면목이 없어요. 미안해요…….]
이틀에 비교하면 더럽게 짧은 시간이었다.
즐겁게 술을 마시는 동료와 여전히 보드라운 얼굴을 들이미는 루블리안을 눈에 새겼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영영 보지 못할 얼굴이다.
“나 먼저 일어날게.”
조금 주저하던 나는 굿나잇 키스를 조르는 루블리안을 가볍게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던 터라 모두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동료들이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궁금한 게 있는 모양새라 먼저 말을 텄다.
“왜?”
“리안. 벌써 취한 거야?”
“어. 취했어.”
별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나 갈게.”
마지막 인사를 무엇으로 할지 그간 고민한 시간 치곤 싱거운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루블리안에게 시선을 한 번 준 뒤, 복도로 나가 옆 방으로 향했다.
사람이 거의 없는 마을 여관답게 내부 역시 허름했다. 나는 삐걱거리는 침대에 앉아 짐 가방을 뒤적였다. 이윽고 손에 만년필과 수첩이 닿았다.
두 물건을 꺼내고 잠시 만년필에 시선을 두다 수첩에서 종이 한 장을 뜯어냈다. 그러나 막상 펜을 들고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안녕. 잘 있어. 그런 상투적인 인사를 떠올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애꿎은 종이만 난감하게 바라보는데 신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점점 짧아져서 미안해요……. 그런데 곧 이동될 것 같아요. 시현, 아까 말했듯 당신 힘이 너무 세요.]
손을 움직였다. 이어 다른 말을 더 쓰려고 할 때 실이 툭 끊어지듯 의식을 잃었다.
비로소 귀환이었다.
_oOo_
시현이 나간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그의 동료인 루블리안, 알리, 데드리언, 몬트리오는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꼈다.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던 주축이 사라졌으니 당연했다. 몸을 한차례 떤 그들은 옆 방에서 느껴지던 움직임이 더는 감지되지 않는 걸 알아차렸다.
“기척이 사라졌어.”
시현을 제외한 동료들이 방을 나섰다. 그들의 목적지는 시현이 묵는 방이었다.
“‘나 돌아가’라…….”
쉽게 열린 방 너머에서 휘갈겨 써 놓은 글씨를 찾아 읽은 루블리안이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루블리안의 눈치를 보는 데드리언과 알리 대신 몬트리오가 나섰다.
“리안이 돌아가리란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구는군.”
시현은 몰랐지만, 사실 신탁에 그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암시하는 말이 있었다. 용사에 초점을 맞춘 이들 때문인지, 그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고 그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극소수에 포함되는 게 용사의 동료였다.
“알지. 아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가니까 서운하기도 하고. 갔다는 사실도 마음에 안 들고.”
서슬 퍼런 안광은 형형했다. 루블리안은 쪽지를 매만지며 입꼬리를 올렸다. 굉장히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였다.
“그래도 상관은 없지.”
“뭐?”
“내가 리안을 따라가면 되니까.”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알리와 다르게 데드리언과 몬트리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런 셋은 안중에도 없는 루블리안은 계속해서 만진 탓에 번진 글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손길이 닿은 시현의 마지막 흔적이 마음에 드는 것처럼.
“너, 너 설마 세계를 뛰어넘겠다든가 그런 거 아니지?”
“진정으로 미친 게 아니라면 친우로서 말하지. 시도하려는 것, 당장 관둬.”
그렇다고 답하면 당장이라도 루블리안을 뜯어말릴 얼굴이었다. 알리 또한 데드리언의 말을 듣고 움찔 튀어 올랐다.
경악과 말림 속에서 유유히 웃던 루블리안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며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내가 왜?”
“뭐?”
“루블리안, 세계는 신의 관할이야. 차원을 넘다간 네 몸이 그냥 녹아버릴 수도 있어! 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아!”
“마, 맞아요! 그렇게 해서 만나러 가는 걸 리안이 바랄 리가 없잖아요…….”
루블리안의 눈길이 알리에게 닿았다. 시현의 부재만으로 달라진 분위기에 알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리안이 바랄 리가 없다……. 그렇지. 만약 리안이 차원을 넘는 게 어떤 위험을 감수하는 건지 안다면 말이야.”
시현이 알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알았다.
“그리고 내가 그깟 것 하나 계산 안 했을까 봐?”
태연한 말과 함께 시선이 데드리언에게 옮겨졌다. 루블리안의 눈과 마주한 그는 굳은 것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거짓이 아니었다. 루블리안은 시현이 다른 세계에서 왔단 걸 안 날부터 차원 이동을 연구해왔다. 오로지 시현과 헤어지지 않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마 전에 팔이 절단됐을 때…….”
뭔가가 기억난 듯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데드리언이 중얼거렸다. 절단이라는 말에 몬트리오와 알리의 시선이 멀쩡하게 붙어 있는 루블리안의 팔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정작 그 시선을 받는 루블리안은 느긋하게 창틀에 기댔던 몸을 떼어 냈다.
“알아서들 생각해. 난 리안이 날 두고 딴 새끼와 있는 꼴은 못 봐서 이만 가야겠거든.”
그러고는 자기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모습을 감췄다. 차원 이동을 한 건지, 순간 이동을 한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여기 있는 이들은 침묵 속에서 굳어있을 뿐이었다.
‘허…. 저 또라이 광견이 손수 목줄까지 쥐여준 놈을 순순히 놔줄 리가 없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몬트리오는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승전 행진도 그렇고 제 친우의 안위도 그렇고. 걱정되는 게 산더미였다.
그 가운데 가장 걱정인 건…….
‘리안이 저 미친놈을 또 감당해야 한다니.’
지옥 끝까지 뒤쫓을 광적인 모습을 본 터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지만, 몬트리오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알리, 데드리언. 정신 차려라. 하룻밤 자고 우린 바로 이동한다.”
눈 돌아간 루블리안을 하루 이틀 본 게 아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