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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1)화 (1/112)

001. 돈다발과 돌아온 원래 세계 (1)

여기저기서 피비린내가 났다. 황폐해진 땅에서 거대한 마왕이 숨을 거뒀다.

마왕이 쓰러지는 소리는 마치 용사 생활의 끝을 알리는 것 같았다.

그토록 염원하던 일을 이뤄 모두가 기뻐할 때 나는 진심으로 웃을 수 없었다. 오히려 숨통이 콱 죄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이 세계에 남고 싶을 정도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년이란 세월 동안 정이 들어서였다

“리안. 왜 그래요?”

알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뻐하지도 않고 멍하게 이 상황을 보는 내가 이상했나 보다.

하긴 이상할 만도 하지. 마왕을 죽이려고 하던 사람이 죽이고 기뻐하지도 않으니. 속으로 자조했다.

[시현. 돌아갈 때가 왔네요! 그간 고생 많았고 정말 고마웠어요!]

반갑지 않은 신의 음성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알리는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그에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약하게 좌우로 저었다.

‘시간 좀 줘. 말은 하고 가야지.’

속으로 신을 떠올리며 말했다.

[네.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건 알아주세요. 마왕이 죽었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나도 알아.’

“다들 수고했어.”

이 말을 정말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돌아가고 싶던 집이 이렇게 그립지 않아질 줄도 몰랐다. 더불어 이곳에 남아 살고 싶어질 줄도.

미련이 남기 시작할 땐 차라리 빠르게 마왕을 잡으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토벌하면 할수록, 끝이 보일수록 더 남고 싶어지기만 했다. 더 늦출 걸, 늦게 토벌할 걸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에이~ 리안이 가장 수고했지!”

“맞아요! 리안이 없었으면 이 세상 멸망했어요!”

“너는 그런 말을 왜 이렇게 해맑게 하는가! 큼, 뭐…… 너랑 같이 마왕을 죽일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모두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웃음소리가 사라지질 않았다. 이젠 익숙해진 피비린내를 맡지 않아도, 징그럽게 생긴 마물을 보지 않아도 되니 그럴 만했다.

“리안.”

루블리안이 내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는 눈을 둥글게 휘며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

“마왕은 죽었고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됐는데 뭐가 문젤까.”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루블리안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귓바퀴에 숨결이 닿았지만, 3년 동안 겪어 무던하게 넘길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얘가 날 놔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을 토로하려 했지만, 글쎄. 지금 내 옆에 달라붙은 루블리안과 기뻐하며 왁자지껄 떠드는 동료들을 보니 굳이 말해야 하나 싶었다.

분위기를 망칠 게 자명한 데다, 마지막은 웃는 얼굴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별거 아니야.”

유일하게 내 불안을 알아차린 루블리안에게 대꾸했다. 고민 끝에 나온 답이었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곧 돌아가게 될 예정이란 걸 알아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작은 편지 하나 쓸 시간이 없겠냐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네에. 리안이 그렇다면 이번만 속아줄게요.”

쓸데없이 예리하다. 루블리안에게 시선을 한번 줬다가 허리에 감겨 있는 팔을 털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동료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왔다.

“얼른 돌아가자.”

좀 거리가 있는 곳에 묶어둔 말을 쓰다듬었다. 말에 올라탄 나는 남은 말들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말뜻을 알아들은 동료들이 하나둘씩 말에 올라탔다. 루블리안만 제외하고.

“루블리안.”

“마왕을 처리할 때 말이 사라진 것 같은데. 리안이랑 같이 타면 되겠네요. 그쵸?”

사실상 ‘그쵸’가 아니라 ‘그쵸오’였다. 말꼬리를 늘리며 도톰한 애교살을 끌어모아 눈웃음치는 게 여우가 따로 없다.

“어? 저 아까 루블리안이 말 풀어주는 거 봤, 읍읍!”

알리의 입까지 마법으로 막는 걸 보니, 저 말은 사실이 틀림없었다. 함께 타겠다고 말을 풀어주다니. 루블리안다워서 할 말을 잃었다.

“쟤가 거짓말한 거예요. 같이 타요, 리안.”

루블리안이 되지도 않는 거짓을 입에 담으며 쪼르르, 소리가 날 법한 움직임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내 손가락을 잡곤 애교스럽게 웃는 모양새에 한숨이 나왔다. 저 꼴이 귀여워 보였다. 나도 제정신은 아니다.

‘내가 최대로 버틴다면 며칠이야.’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하루에서 이틀 아닐까요?]

‘알겠어.’

이틀….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 넘어가 줄까. 이후에 만날 일도 없을 테니 이번 한 번쯤은 괜찮을 거다. 사심이 들어간 합리화를 마치고 고갯짓을 했다.

타라는 의미를 바로 알아챈 루블리안은 내 뒤에 올라탔다. 루블리안이 나보다 키가 더 크니 어쩔 수 없었다.

“리안.”

“왜.”

“으응. 그냥. 좋아서?”

어깨가 간지러웠다. 코로 추측되는 살갗이 목에 닿았다. 뒤를 보진 않았지만, 루블리안이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젠 다들 뭘 할 거야?”

데드리언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선뜻 답하지 못하는 나와 다르게 알리와 몬트리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부모님 농장에서 일하려고요!”

칭송받는 정령사면서 소박하기 짝이 없는 꿈이었다. 그런데 알리도 이제 알 때가 되지 않았나. 마왕을 토벌한 용사의 동료인 이상, 그렇게 평화롭게 살기는 글렀다는 걸. 알리의 꿈을 초 칠 생각은 없기에, 그 말을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공을 세웠으니… 황태자 자리를 노린다는 말이 나오겠지. 관심은 없지만, 형님을 골려볼까 하는 중이다.”

“몬트리오가 저렇게 성격이 나빠요, 리안. 앞으로 몬트리오 말고 저랑만 놀아요.”

“허! 내숭도 정도껏 하지. 여기에 네가 가장 성격이 나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몬트리오, 네 성격이 가장 나쁜 거 알아. 숨기려고 나한테 덮으면 안 되지.”

왁자지껄한 와중에 들린 ‘앞으로’라는 말에 다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세계에 내가 있는 미래는 없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루블리안은 쉽게 ‘함께’라는 미래를 그렸다.

“어이가 없군. 리안, 네가 봐도 이 녀석 성격이 가장 나쁘지 않은가!”

몬트리오의 외침에 찬물을 끼얹은 듯 단번에 흘러가는 생각 속에서 빠져나왔다. 내게 답을 구하는 것 같은데, 질문을 못 들었다.

“미안.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

“우리 중 이 녀석 성격이 가장 나쁘지 않은지 물었다.”

쭉 편 검지를 따라간 시선은 루블리안에게서 멎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루블리안은 억울하다는 눈빛을 하고서는 새초롬하던 눈꼬리를 한껏 축 내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바로 했다. 얼굴에 구애받지 않고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동료 중에서 인성이 가장 안 좋은 사람은 루블리안이었다. 미인, 미남은 얼굴값을 한다는 말이 오로지 루블리안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무관했다.

아닌 척하지만, 루블리안은 성격이 개 같았다. 나한테는 온순하고 연약한 강아지처럼 굴면서, 다른 이한테는 정말 말을 알아듣고도 무시하는 개새끼처럼 굴었다.

그 간극을 아는 사람이 동료뿐이라는 게 애석할 뿐이다. 승진 행렬에서 신이 내린 외모를 가진 사람을 본다면 우선 거리를 벌리라는 경고를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은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왜 고개를 끄덕여요? 리안이 보기에도 제가 성격이 나빠요……?”

그러자 어깨에 묻은 얼굴을 살짝 드러내며 처연한 얼굴을 한다. 루블리안의 긴 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그 아래 청명한 여름날을 품은 듯한 벽안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글쎄.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저 모습이 연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길 수가 없다.

나는 모호하게 대답하며 루블리안의 찬란한 금발을 쓰다듬었다. 곧 녹아버릴 것 같은 머리카락이 손에 감긴다. 루블리안은 투박한 쓰다듬이 뭐가 좋은지 눈까지 감으며 스멀스멀 입꼬리를 올렸다.

“리안이랑 루블리안은 그래서 뭘 할 건데? 나는 돈만 받고 튈 생각인데~ 더 이상 신전에 묶이기는 싫거든!”

데드리언이 목청을 높이며 시원하게 웃어 재꼈다. 머릿속에선 신이 자식 키워봤자 소용이 없다며 잉잉거렸다. 나는 신을 조용히 시키고 막연히 미래를 상상했다.

아마…… 돌아가선 공부나 하지 않을까 싶다. 고3인데다가, 공부를 3년간 쉬었으니. 기억력이 좋고, 밑바탕이 탄탄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재수하지 않았을까. 신 덕분에 돈 걱정은 없었으나, 갑작스러운 성적 변화는 미래에 여러모로 영향이 클 터였다.

상상을 끝내고도 나는 그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머릿속에 가득한 말을 꺼내려면, 돌아간다는 설명이 필연적으로 따라와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저는 리안을 따라다니다가 청혼이나 하려고요.”

능청스러운 말에 고개를 휙 돌렸다. 루블리안은 마왕을 토벌하러 다니면서도 타지 않은 하얀 뺨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인 채였다.

수줍기 짝이 없는 행태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옆에서 간간이 토하는 소리도 들렸다. 몬트리오가 역겹다는 눈빛을 루블리안에게 보내고 있을 게 뻔했다.

“제 청혼 받아줄 거죠? 그렇죠, 리안?”

“……종종 개 같다곤 생각했지만, 정말 개 소릴 지껄이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멍멍?”

“미친놈…….”

루블리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하며 멍멍 소리를 해댔다. 시선을 모으는 예쁜 외모와 별개로 저 사회악 같은 주둥이는 종종 닫아버리고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중 제일 순수한 알리는 ‘와! 개소리!’하며 해맑게 웃었고, 데드리언은 이 상황이 재밌는 듯 숨죽여 웃었다. 마지막으로 몬트리오는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저 중 몬트리오가 가장 정상이었다.

“루블리안.”

“네에.”

“입 다, 아니 그냥 닥쳐.”

저번에 입을 다물라고 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던 기억이 떠올라 말을 바꿨다. 루블리안도 그때를 떠올린 건지 귀에 입을 대곤 ‘입 다, 뒤에 뭐요? 말 안 해 줄 거예요?’라고 대답을 졸라댔다.

입술의 촉감과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젠 익숙해진 일 중 하나라 딱히 제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역시 입은 닫았으면 좋겠다. 나는 계속해서 대답을 재촉하는 루블리안의 입을 막았다. 루블리안이 그걸 기회로 삼고 쪽쪽 소리를 내며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춘 것만 아니면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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