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봄개학
'뭐하는 거야?'
김하늘은 황당했다.
체온을 녹여주겠다며 신재희를 껴안은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신재희가 잠결에 신재준과 입맞춤하고, 혀를 집어놓으려는 모습을 보자니 당황했다.
'미친...'
저게 친남매끼리 할 짓인가?
"...방금 신재희, 쟤 뭐한 거냐?"
"우리 남매는 원래 키스해."
태연하게 대꾸하는 신재준의 모습에 김하늘은 순간 말을 잃었다.
"남매끼리?"
"응, 이상해?"
"...혀까지 넣어?"
"그런데? 역시... 이상해?"
"보통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그럼 너 첫키스는..."
"남매끼리 하는 건 카운팅 안 해야지."
"그런가..."
엄지혜가 떠올랐다.
신재희의 절친인 엄지혜.
초등학생 시절 때에, 아직 신재희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을 때. 김하늘은 신재희의 절친이었던 엄지혜과도 논 적이 있었다.
뭐하다가 그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엄지혜가 쉽사리 믿기지 않은 말을 했었다.
그녀가 자기 오빠와 아빠와 키스한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혀까지 넣어서.
믿기진 않았지만, 거짓말하는 표정은 아니었고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싶어 그저 특이한 집안이거니 싶었다.
신재준이 밝힌 지금 발언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영 이상했다.
'지혜한테 그 말 들었떤 재희도 나처럼 놀랍다는 반응이었는데...?'
그렇다는 건 그때까지만 해도 신재준네 세 남매가 키스하진 않았을 거란 거다.
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그건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라는 것...
'와... 설마 지혜 얘기 듣고서 재준한테 키스해달라고 조르기도 한 건가?'
신재준은 조름을 허락한 거고?
게다가 신재준은 '남매끼리'한다고 했지, '재희하고'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신재연도 신재준과 혀를 넣고 키스한다는 건데...
'재연 언니... 그런 짓은 하지 못하게 말렸어야지... 도대체 왜 그걸 허락하고 자기도 그걸 하고 앉은 거야?'
'설마. 재희랑 재연이 언니... 재준이를 '남자'로 보고 있나...?'
만약 그렇다면 그건... 신재준에게 있어서 끔찍한 일일 것이다.
'빨리 재준이를 그 집에서 나오게 해야겠어.'
김하늘은 자신의 울타리에 신재준을 서둘러 들여놓을 것을 결심했다.
'임신해서... 결혼을 기정사실화하면, 우리집에 들어와서 살게 해야지. 새로 집 구해서 신혼집 구하면 돼.'
이제 보니까 신재준과 신재희가 서로 끌어안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쾌했다.
기미정의 집에서부터 이곳에서 술먹을 동안에 스킨십을 하던 둘이었다. 여태껏 친남매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방금 전 키스한 모습을 보곤 온갖 의심과 불쾌감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기미정이 돌아왔다.
"어디 갔다 왔냐?"
"옥상에, 담배피러."
기미정이 다가오자 담배냄새가 코를 찔렀다.
"옥상 열려있디?"
"어."
'둘이 어디 나간줄 알았는데... 아니, 둘이 나갔다왔겠지. 둘이 분위기가 묘하네.'
기미정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신재준을 좋아하는 듯한 눈.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김하늘은 그것만으로 기미정이 신재준을 좋아한다고 확신했다.
'재준이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나?'
기미정은 뭔가 후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고백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차이고 나서 차이고 난 다음의 표정 같았다.
'잘 차였네.'
김하늘은 자신의 추측을 확신하고, 기미정이 꼴 좋다고 생각했다.
* * *
술자리를 파하고, 기미정은 혼자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팬티가 젖는 것이 느껴졌다. 신재준의 정액이 질에서 새어나온 것이었다. 끈적끈적해서 찝찝했으나 신재준이 뿌린 아기씨란 걸 아니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태어난 이유는 신재준과 신재희를 두들겨 패기 위해 태어난 거야.'
지내기 따분했던 세상이었다. 자극을 얻기 위하여 패고 다니고, 찐따들에게 두려움을 샀다. 그럼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사는 게 재미없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신재준을 따먹은 것에 그녀의 세계가 뒤바뀌었다.
앞으로 그를 괴롭히고, 울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은 태어난 것이었다.
당장만 해도 그를 괴롭히는 수가 십여 가지 떠올랐다.
'시발, 개 좋다.'
신재준은 신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도, 신고하라고 하면 기죽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은 겁먹은 것이었다.
겉으론 강한 척하는 신재준이지만, 실상은 마음이 약해서 누군가에게 자신한테 강간당했음을 알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술기운에 실수한 건줄 알았는데... 잘 됐네.'
신재준의 육봉이 드나들었던 아래가 아직도 얼얼했다. 아직도 그의 것이 끼어져있는 착각도 들었다.
뭔가를 발견한 기미정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소지었다.
'저 시팔년들... 지금 재미난 짓을 하고 있네.'
폐건물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선 시내공원을 지나야 했다.
그 시내공원에는 일진 둘이 보였다.
기미정보다 1학년 선배인 여자들이었다. 올해 3학년이 될 일진들.
'원룸에서 함정 파놓고 기다리다가, 내가 안 오니까 시내에 흩어져서 날 찾고 있던 건가? 병신년들...'
둘은 기미정을 발견했다. 기미정을 손가락질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딜 손가락질이야. 부러뜨려야겠네, 시발년.'
둘은 다가왔다. 기미정도 목발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 기미정 찾았다. 여기 시내공원이야."
서로 가까워지자 전화를 하는 목소리가 잘 들렸다.
전화를 하지 않고 있던 쪽이 기미정의 뒤로 돌아갔다.
"어, 미정이랑 얘기하고 있을게."
전화를 건 쪽은 기미정의 앞을 막았다.
앞뒤가 막힌 상태.
'내가 다쳐서 볼라 만만하게 보이나 보네. 킥킥...'
웃던 기미정은 정색했다.
'하아... 시발. 재준이 따먹고 기분 개 좋았는데... 시발년들이 기분 잡치게 만드네.'
마침 바로 옆을 지나가는 여대생 무리가 있었다. 'Seongyeon University' 잠바를 입고 있었고, 모두 몸이 다부져있었다. 경호학과 아니면 유도나 태권도학과 같아 보였다. 성연대학교는 무도대학으로도 유명했다.
성연체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운좋게 옆을 지나가는 그녀들은 완전히 제3자일 확률이 높았다. 만약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딱 봐도 환자로 보이는 기미정을 도울 확률이 높아보였다 ..
기미정은 그걸 알았지만 그녀들에게 조력을 요청하지 않았다.
여대생 무리는 지나쳐갔다.
"언니들, 나랑 얘기할 게 있으시다고?"
"어. 잠깐 저 벤치 가서 얘기할까?"
"좋죠."
"킥킥, 다 눈치깠지? 그래도 튀거나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마라. 나중에 뒈지기 싫으면. 지금 순순히 따르면 말로 끝낼 거야, 말로."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흐흫... 그래?"
기미정은 두 목발에 무게를 실고, 다리가 아픈 척 걸었다.
평소 약한 척을 싫어하던 그녀였으나... 이런 나약한 척으로 상대방을 기만하는 게 즐겁다는 걸 깨달았다. 신재준 덕분이었다.
"여기 앉아."
선배 일진이 지정한 장소는 공원의 화장실 건물 앞쪽이었다.
벤치에 앉자, 두 선배 일진이 등 뒤에 서서 지켰다.
기미정은 입에 담배를 물었다. 뒤이어 스스로 라이터를 붙이려는데, 뒤에서 선배 일진 하나가 라이터를 내밀어 불 붙여주었다.
"큭큭큭..."
'이 년, 이거. 영화 봤나?'
자신을 봊 패기 위해 이 지랄하면서, 봊 팰 당사자에게 담배불을 빌려주는 짓거리를 하다니. 깡패 영화를 많이 본 것 같았다.
기미정이 웃음이 비웃음인 걸 알테지만 뒤에선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맛있게 담배를 폈다.
'지금 것도 맛있는데... 아까 핀 식후땡이 인생 최고로 맛있었지.'
기미정은 밥을 먹고 난 뒤 식후땡을 찾는 스타일이었다.
'신재준'이라는 별미를 먹은 뒤, 폐건물 옥상에서 폈던 식후땡은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영화 찍냐, 병신아?"
기미정은 흠칫 했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신재준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선배 일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씹!"
기미정과 눈이 마주친 여자는 놀라서 한템포 늦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기미정은 깁스한 손을 들어서 막았다. 반깁스라도 딱딱했다.
방망이와 부딪친 충격이 깁스를 통해 부러진 손가락뼈으로 전달돼 아찔한 통증이 느껴졌다.
'시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왼손으로 바디블로우를 먹였다. 감정이 실려있었다.
"컥!"
"이, 이 개년이!"
다른 한 명이 기미정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지만, 동체시력이 뛰어난 기미정은 그 주먹을 여유롭게 1cm 간격으로 피해냈다. 그리고 깁스에 감싸진 손날로 반격했다.
퍽!
깁스 손날에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맞은 일진이 기절해서 쓰러졌다.
"다친 거 아니었어?! 속였구나?!"
"뭐래, 븅신이."
기미정이 방망이를 든 여자에게 레프트 훅을 날렸다. 턱을 맞고 기절해쓰러졌다.
"아놔... 뒤통수 까이고 뒤질 뻔했네. 킥킥..."
그래, 인정한다. 방금 전에는 자신도 너무 방심했다.
시내 공원은 야외였다.
시내 공원을 둘러싼 인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도 아예 없진 않았고, 차는 끊임없이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 기미정은 방심했다. 과격한 짓은 하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다만, 화장실 건물이 가리고 있어 사각지대였다.
그 사각지대를 노리고 일진녀들은 퍽치기를 강행하려고 했다.
"덕분에 살았다, 재준아.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나 보고 싶어서 왔어?"
신재준이 시내공원 입구에 서있었다.
김하늘과 신재희도 데려왔나 싶었지만, 그 혼자 뿐이었다.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헐떡임은... 라꾸라꾸침대에 누워서 그의 허리놀림을 받던 그 순간을 상기시켰다.
"보였어..."
"보여? 뭐가? 아... 너 진짜 '신기'라도 있는 거냐?"
원룸에 찾아갔을 때에도 신재준은 그 원룸방 안에 수많은 일진이 있다고 중얼거렸었다.
그 말을 모두 믿기진 않았는데, 불길하게 아무도 없어야할 원룸에서 불빛이 보이자 그 원룸에 들어가지 않았다.
허나, 지금처럼 예비 3학년 일진들이 자기를 치려고 난리치는 걸 보면... 또한 자신의 위기를 알아채고 뛰어온 것을 보면... 신재준의 '신기'는 제법 믿을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