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봄개학
'하... 내가 지 오빠한테 추근거릴까봐 경계하는 건가?'
"넌 일단 앉아봐."
신재준은 일단 기미정을 자리에 앉혔다.
"야, 신재준. 둘이 뭐하고 있던 거냐고."
"마네킹이 움직이는 것 같길래, 뭔가 싶어서 확인하러 가려고 했어. 근데 하늘이는 뻗어있고. 미정이는 거동이 불편하고... 그런데 내가 어둠공포증 있잖아. 미정이랑 같이 확인해보려고 부축해줬어."
"목발 있잖아."
'저 새끼가... 지금 내가 자기 오빠한테 찝적거려서 맘에 안 든다, 대놓고 표현하는 건가?'
기미정은 찌푸렸다.
단단히 혼내줘야겠다. 제발 놓아달라고 빌어도 저 젖탱이를 쥐어짜낼 것이었다.
"가까운 거리니까 거추장스럽게 목발로 걷는 것보다 내가 부축해주는 게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지. 아씨, 내가 왜 이걸 너한테 해명해야되냐."
신재준의 말에는 뒤로 갈수록 짜증이 묻어났다.
기미정은 남매 간의 갈등으로 괜히 이 자리가 파할까봐 걱정됐다. 격화를 말려야했다.
"재희야, 사오느라 고생했다. 같이 술 마시자."
"하아..."
신재희는 대답 대신에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저 새끼가... 이젠 이젠 만만하다, 이거지?'
기미정은 입술을 움찔움찔거렸다.
'하, 시발... 평상시였다면 우리 재희 얼굴 마사지도 해주고, 내장 마사지도 해주고, 다리 마사지도 해주고, 젖탱이 마사지도 다 해줬을 텐데. 아, 그걸 지금은 못하네. 시발.'
기미정은 이 분노를 마음에 담아두기로 했다. 나중에 되돌려주리라. 이자까지 쳐서, 몇 배로.
신재희는 똑바로 대답은 안 했지만, 구멍가게에서 사온 검은 비닐봉투를 내려놓으며, 자신의 자리 앉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의 옆에 깔려있어야할 신재준 몫의 상자 깔개가 없어지고, 그 상자 깔개가 기미정 옆으로 가있자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미정이 언니, 옆에 앉아있었냐?"
"하아... 재희야, 나 어두운 거 무서워하는 거 알잖아. 옆에 사람이 있었어야 했어."
"쯧..."
'싸가지 없는 년. 신재연은 자기 여동생 예절 교육은 제대로 안 하나 보지?'
신재준은 상자 깔개를 신재희의 옆으로 가자갔다.
신재희가 신재준에게 팔을 달라붙었다. 여태까지는 신재준이 먼저 신재희한테 스킨십을 하는 편이었는데.
'뭐야. 우리 재희, 설마 브라콤이었어?'
그래서 자기랑 바짝 붙어있자 삐쳤던 거였나. 귀엽네.
귀여워서... 둘 사이를 이간질 시켜보고 싶었다.
'서로가 나한테 사랑받으려고 몸부림치게 만들어야지.'
그게 기미정의 최종 목표였다.
신재희가 소주병을 한 번에 돌려서 까는 묘기를 하더니, 기미정에게 내밀었다.
기미정은 신재희가 손수 따라주는 것에, 살짝 기분 좋아졌다.
신재희는 소주를 종이컵의 밑바닥만 채우고 술을 빼려고 했다.
"재희야, 가득 채워. 가득."
신재희는 기미정의 말에 종이컵 가득 소주를 따랐다. 그러자 벌써 소주병 절반 비게 됐다.
기미정은 컵을 내려놓은 뒤, 자작하려는 신재희로부터 병을 빼앗았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만큼 따랐다.
그러자 벌써 소주 1병이 거덜났다.
"야. 이번엔 재희까지 꽐라 만들려고?"
신재준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맞았다. 이번엔 신재희를 몰아쳐서 김하늘처럼 무너지게 만들 생각이었다.
신재희가 아무리 잘 마신다고 해도, 김하늘 정도일 것이었다. 소주 2병 즈음 급속하게 마시게 하면 뻗을 게 기대됐다.
'잠들면 맨살 한 번 만져봐야지, 시발...'
떡처럼 저 폭유의 맨살을 주물러댈 것이었다.
기미정은 웃으며 도발했다.
"천천히 마셔, 재희야. 천천히. 너 술 잘 못 마시잖아."
여자라면 누구나 주량에 대한 자존심이 있었다. 심지어 알콜쓰레기여도 말이다.
기미정은 종이컵 한 장 채운 소주를 원샷했다.
그러자 그에 질세라 신재희도 종이컵 한 컵을 채운 소주를 전부 마셨다.
"아씨, 시체를 또 만드려고 하네."
신재준은 양손에 각각 매운 새우깡을 하나씩 집어다가 양쪽으로 뻗었다.
기미정과 신재희는 과자를 받아먹었다.
"아, 오빠도 콜라 먹어야지."
"줘. 내가 따라마실게."
"오빠, 소주 타먹을래? 맛있는데."
"됐어. 그리고 그러면 빨리 취하잖아."
'응?'
기미정은 의외였다.
신재희가 쉽게 취하게 하는 소주 콜라를 자기 오빠한테 권한 것과 신재준이 소주 콜라가 쉽게 취한다는 걸 안다는 것. 둘 모두 의외였다.
"한 번 취해봐. 어차피 언니한테는 김하늘네서 자고 올 거라고 뻥쳤잖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취하겠어."
''언니'라면 신재연이겠지? 그리고 '김하늘'이라고 이름으로 불리는 거 보면... 킥킥. 뭐야, 김하늘, 신재희한테 개무시당하고 있었네?'
기미정은 조용히 정보를 하나하나 취득했다.
"하아... 그럼 한 번 말아봐."
"알았으."
신재희는 새 소주를 따고, 종이컵에 콸콸 따랐다. 3:1 비율로 섞었다. 소주가 3, 콜라가 1이었다.
'근데 쟤는 왜 자기 오빠를 떡이 되게 만들려고 하지? 아까까지는 날 경계했으면서.'
자기 오빠 때문에 경계심을 올렸으면서, 동시에 자기 오빠를 취하게 해 경계를 취약하게 만든 건 또 뭘까.
두 사안이 서로 격돌하는 모순적인 관계라서 좀처럼 이해 안 갔다.
'아, 몰라. 나야 잘 됐지.'
기미정과 신재희는 주거니 받거니 원샷 때리기를 달렸다.
신재준은 종종 신재희가 타주는 3:1 비율에 소주콜라를 마셨고.
'재희... 이 미친년, 킥킥...'
신재희가 빈 소주병을 내밀며 자신의 잔에 채워주려고 했다.
"빈 병이야, 바보야."
평소의 기미정이라면 '바보야' 대신에 '병신아'라고 했을 거였다.
"아... 예? 아닌데..."
"졸려우면 자. 얼어죽기 전에 택시 불러서 다 집에 돌려보내줄게."
기미정은 그렇게 말하며 신재준이 하는 행동을 곁눈질로 봤다.
신재준은 손끝에 감각이 둔해졌는지, 손톱으로 꾹꾹 누르며 술기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신재희는 그런 신재준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그녀가 입은 상의는 상자 깔개로 보호돼서 괜찮았은데, 상자 영역 밖으로 나간 하의는 바닥의 먼지에 더러워졌다.
"아, 야. 야. 자면 안 돼."
신재준은 좀 혀가 꼬부라지는 목소리를 내며 무릎을 흔들어댔다.
신재희는 그런다고 해서 깨어나지 않았다.
"재준아, 또 말아줄까?"
"소콜? 콜!"
신재준이 평소보다 텐션이 올라가있었다.
취한 것이 분명했다.
'김하늘도 가버리고, 신재희도 가버렸지. 신재준도 취했고.'
기미정이 그리던 베스트 상태가 완성됐다.
이런 상태에서 소주가 1병이나 남아있었다. 그 병을 따서 소주 콜라를 말기 시작했다.
다 말았을 때. 신재준은 눈을 감고 고개가 슬그머니 떨어지려고 했다.
"재준아? 자니?"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 아니. 난 안 자. 하늘이네 가야지."
"뭐야? 그거 술먹을 핑계로 간다고 했던 게 아니라 진짜였어?"
"집 나오고서, 딴집에서 자긴 해야 할 거 아니야."
하긴 그렇긴 했다.
기미정은 신재준에게 소주 콜라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다리를 양옆으로 벌려서 팬티를 드러낸 채 코를 고는 꽐라년을 노려봤다.
'평소에도 저 년 집에서 자고 그랬나? 열 받네.'
신재준과 신재희는 자신의 것이었다. 김하늘의 집에 자고 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재준아, 짠하자."
기미정과 신재준은 건배를 했다.
기미정은 입술에 소주만 묻히며, 신재준이 소주 콜라를 원샷하는 걸 바라봤다.
본인이 취할까봐 마시는 척하는 게 아니라, 신재준이 저거 마시고 덜 취할까봐 걱정돼서 였다.
이게 마지막 소주였다. 나중에 써먹어야할지 몰랐다.
신재준은 마른 안주를 입안에 넣어 씹었다. 그틈에 기미정은 자신이 마시지 않은 종이컵을, 플래시의 불빛이 비추지 않는 어둠 속에 내려뒀다.
"아... 취한다... 후우우..."
신재준이 하얀 김을 길게 내뱉었다. 이 장소는 입김이 보일 만큼 추웠지만, 술 탓에 추운 게 안 느껴졌다.
그의 눈이 감길랑 말랑 했다.
"재준아? 졸려?"
"...아니..."
'좋아, 성공이다.'
기미정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 두 개 모두를 사냥했다는 기쁨이 들기 시작했다.
"근데 여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
그건 그거고, 신재준이 취한 김에 정보나 얻어보기로 했다.
"아란이 누나...? 음... 착했어..."
"'착했어'? 왜 뉘앙스가 지금은 나쁜 것처럼 들리냐?"
"흐흫..."
"재준아?"
"응?"
"내가 물어봤잖아. 똑바로 대답해줘야지."
"몰라. 안 말해줄래. 말해주기 싫어..."
신재준이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꾸벅하기 시작했다.
'여자친구와 트러블이 있나? 잘 됐네. 무슨 사유로 문제 생긴 건지 못 알아낸 건 아쉽지만...'
이젠 맛봐도 되겠지?
기미정은 깁스한 왼쪽 다리로 땅을 딛고 천천히 일어났다.
신재준은 앞에선 다리가 아픈 척, 목발 사용을 고집했지만... 지금은 취했으니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 기척에 신재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디 가려고? 화장실?"
'이런. 아직 제정신인가.'
"어."
'재준이와 재희가 내 화장실이긴 하지. 이제부터.'
기미정은 자신이 앉고 있던 상자를 가져오며, 신재준의 옆에 앉았다.
"화장실 간다며?"
"생각해보니까 아직 참을만 해. 그리고 너도 졸려우면 내 어깨에 기대. 내가 책임지고 너희들 김하늘네 돌려보내줄 테니까."
"흐흫... 널 어떻게 믿냐. 울집 엿보러오는 미친 여자를 믿겠다."
'허, 날 못 믿는다고 까놓고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취했네. 근데 '집을 엿보러오는 미친 여자'? 그건 또 뭐야?'
술 취해서 하는 헛소리일까? 아니면 정말 스토커라도 붙어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