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봄개학
기미정은 달려가서 김하늘의 머리에 사커킥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신재준이 술 취한 여자 사람 친구의 스킨십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주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자신이 '술 취한 척' 굴면서 신재준을 얼마 만큼 건들 수 있을지 참고할 수 있을 거였다.
"아, 얘 술주정 왜 이래."
신재준은 단순히 투덜거리기만 했다.
'저걸 저렇게 넘어가주네...'
기미정은 곤약 젤리를 뜯어서 입속에 넣었다. 처음 젤리의 단물 때문에 달콤했으나, 금방 물컹한 식감만 남은 곤약만 남게 됐다.
신재준은 김하늘의 두 팔에서 벗어나려고 그녀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자고 있는 것인지 김하늘은 재차 신재준을 붙잡지 않았다.
김하늘의 다리가 마름모 모양을 그리며 접혀있었다. 말아올라간 치마였다. 검은색 팬티가 노출돼 있었다.
신재준은 남는 종이상자를 가져와서 김하늘이 누워있는 상자의 영역을 확대했다. 김하늘의 발목을 잡아당겨 펴주었다.
그리고 말아올려진 치마도 펴주고.
내려가 있던 김하늘의 외투 지퍼도 올려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자신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재희한테 연락했어?"
"뭘? 아... 음료수? 연락할게."
기미정은 신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언니.]
"재희야. 잘 샀어?"
[네.]
"다행히 할아버지가 계셨나 보네."
술담배가 뚫리는 구멍가게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번갈아가며 밤 10시까지 운영했다.
할머니가 있을 때는 뚫리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있어야 뚫렸다.
[도착했을 때 들여다보니까 할머니더라고요. 좀 기다려봤는데 교대하셔서 지금 사고 가는 중이에요.]
"아, 그래? 잘 됐네. 재희야, 근데 미안한데. 재준이 음료수 사와야겠다."
[아, 오빠 음료수요. 오빠가 뭐 마시고 싶대요?]
"재희가 뭐 먹고 싶냐는데?"
"콜라."
"콜라래."
[네, 그럼 다시 갔다올게요.]
'재준이한테 탄산음료랑 소주랑 섞어서 마시게 해야지.'
신재준이 술에 대해 잘 모른다면, 그걸 맛있다고 계속 마실지도 몰랐다. 탄산음료와 소주를 섞은 게 더 취하기 쉽다는 걸 모른채.
'그전에 재희부터 뻗게 만들어야겠네.'
신재희가 탄산음료와 소주를 섞은 폭탄주의 위험성을 경고할 가능성이 컸다. 술을 자주 마시는 일진이었으니까. 그 경고를 할 대상부터 없앨 작정이었다.
"..."
"..."
신재희와 전화를 끊자 침묵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김하늘의 일정한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과자를 와작와작 씹었다.
"헉!"
갑자기 신재준이 기미정에게 붙으며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기미정도 사람인지라 그런 신재준의 행동에 놀랐긴 했지만, 태연한척 물어보며 은근슬쩍 신재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 저기 마네킹, 움직였어."
"어두워서 잘못 본 거겠지."
"아, 아닌데. 분명 봤는데."
"잘못 본 것일 텐데. 어떤 사이코 새끼가 계속 저 마네킹 더비 속에 숨어있을리 없잖아."
신재준의 머리에서 샴푸향이 났다. 소주 2병 가까이 단숨에 해치우고 취하지 않았는데... 이 향기에는 취할 것 같았다.
성적 충동을 이겨내지 못했다.
기미정은 손을 신재준의 어깨에서 더 아랫쪽으로 내렸다. 가슴에 손을 댔다.
남자는 여자처럼 젖가슴이 튀어나와 있지는 않지만, 멸치가 아니라면 가슴살이 있긴 마련이었다.
손끝으로 그의 옷을 눌러보니 가슴살이 느껴졌다.
'송정호의 가슴 만져봤을 때, 아무런 감동이나 쾌락 같은 거 없었는데...'
송정호는 일진회에서 유명한 걸레였다. 담배 한 갑이나 과자 한 봉지에 자지를 세워주는 놈.
그가 끼를 부리면서 기미정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댄 적이 있었다.
그때 기미정은 남자의 가슴을 처음 만져본 것이었고, 그때부터 자신이 '남자 몸에 느낄 수 없는 몸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신재준의 가슴을 만진 순간은 달랐다.
'시발, 미치겠네...'
겨우 살 덩어리 중에 특정부위일 뿐인데, 그걸 만졌다고 그녀는 온몸이 흥분됐다. 손발의 전류가 튀고, 머리는 새하얘지며 짧게 절정을 느꼈다.
마구 잡이로 신재준의 가슴을 쥐면서, 그가 괴로워하는 신음을 내는 걸 보고 싶었다.
이게 바로 사랑.
"아, 근데 동물일지도 모르겠다. 겨울 바람 추워서 도망쳐온 거지. 길고양이나 개나 쥐나."
"확실히 그렇겠네."
"재준아, 내가 가서 살펴볼까?"
"아니..."
"그래도 계속 신경쓰일 거 아니야. 무섭고."
기미정은 은근히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가슴을 더듬었다.
"미정아, 그냥 내가 가서 확인할게."
"괜찮겠어? '어둠공포증' 있다며."
"그, 그렇긴 한데..."
신재준은 어둠 속을 바라봤다. 핸드폰 플래시가 닿지 않아 새카만 어둠 속을. 얼마 보지 못하고 눈을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어둠이 무서워서 어깨를 움츠린 어깨를 보니 새삼 남자긴 남자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같이 갈까?"
"그럴까..."
신재준의 긍정적인 대답에 기미정은 아쉬움 마음을 삼키며, 신재준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을 뗐다.
신재준이 플래시를 켜둔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일어났다.
기미정이 일어나려고 하자, 그가 어깨를 빌려주었다. 기미정은 튕기지 않고 바로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그리고 그를 바짝 옆구리에 붙게 만들었다.
지금처럼 신재준이 옆구리에 바짝 끼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느껴지는 체온이나 냄새, 감촉... 모든 게.
앉아있을 때는 몰랐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니 팬티가 축축하게 젖어있는 걸 자각하게 됐다.
'하... 시발. 겨우 이 정도로 질질 싸는데, 섹스하면 얼마나 젖으려는 거냐.'
"잠깐 갔다오는 거니까, 계속 어깨 좀 빌려줄 수 있어?"
"괜찮아. 근데 이상한 사람이 숨어있으면 어떻게 해?"
"에이, 그럴 리 없다니까 그러네."
신재준은 걱정이 많았다.
기미정은 신재준의 부축을 받으며 마네킹 더미로 향했다.
신재준이 핸드폰 플래시로 마네킹더미를 비추었다.
"하아... 네가 좀 봐봐."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기미정의 몸쪽으로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귀엽네, 시발놈.'
기미정은 깁스한 팔을 신재준의 손목에 갖다댔다.
그녀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그 위에 올려진 핸드폰 플래시를 든 손도 함께 움직였다.
회색 먼지가 잔뜩 쌓인 마네킹 더미. 외부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의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먼지가 플래시에 의해 보였다.
혹시나 싶어서 자세히 살펴봤지만, 이상한 사람 같은 건 찾아낼 수 없었다.
동물 역시.
'아무것도 없어, 멍청아.'
한 번 놀래켜볼까?
"꺅!"
"헉!"
고음의 비명을 짧게 지르자, 신재준이 그녀를 바짝 끌어안으며, 가슴 사이에 머리를 묻었다.
진짜 놀란 건지, 신재준은 자신의 핸드폰을 날려버리기까지 했다.
핸드폰가 회전하면서, 플래시가 비추는 방향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먼지 많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플래시가 그대로 켜져있기에, 이 어둠 속에서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란 거였다.
"킥킥, 장난이야."
기미정은 자신의 품을 껴안은 신재준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가슴에 묻고 있는 좋아하게 된 남자애를 보게 되니... 자꾸만 그를 억지로 취하고 싶은 충동이 강해졌다.
'아직 아니야. 참아. 참아, 병신아...'
다른 여친이 있는 신재준이 자신과 만리장성을 쌓을 리가 없었다. 그는 술을 별로 안 마셔서 아직 제정신이었다.
그녀는 신재준의 엉덩이로 쥐기 위해 내려가려던 팔을 간신히 멈췄다.
"아씨, 놀랐잖아. 딴데서는 몰라도 어둠 속에선 장난치지 마. 진짜 무서우니까."
"킥킥, 알았어. 알았어."
신재준이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건지 몸을 떨어뜨렸다.
다시 그를 껴안고 싶었지만 참았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서...
'시발... 참는 거, 역시 나랑 안 맞아. 개 스트레스네...'
"미정아, 잠깐 가만히 서있을 수 있지? 내 부축 없어도."
"어."
신재준은 얼른 바닥에 떨어졌던 자신의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얼른 돌아와 기미정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부축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깜찍한 것...'
신재준은 모르는 걸까. 자신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을 유혹한다는 걸?
'둔하네.'
그러고 보니 신재준을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많아 보였다.
저기 저 뻗어있는 김하늘도 그랬고, 함께 몰려다니는 김하늘의 친구년도 그랬으며, 맨날 신재준 따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안유리도 그랬다.
'이런 식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들을 꼬시는 거구나?'
지금 신재준과 사귀고 있는 여자도, 신재준이 무심코 한 행동에 반했을 게 뻔해 보였다.
'내 것이 되면 집 바깥에 못 나가게 해야지...'
기미정은 말했다.
"아무것도 없더라."
"그래? 내가 잘못 봤나보네... 아, 일어나있기 힘들지? 돌아가서 앉자."
다시 왔던 몇 걸음을 몸을 돌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들려오는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에 멈췄다.
"미정아, 들려?"
"재희, 아니야?"
"그러면 부스럭 소리 같은 거 같이 들려야 하지 않아? 소주랑 콜라 산 거 비닐봉투에 담았을 거 아니야."
신재준이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 비닐 소리가 거리 때문에 안 들렸었나 보다.
"재희, 맞나 보네."
기미정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몸을 긴장시키기 시작했다.
일진 아지트였던 원룸방 주위에 감시꾼이 있어서, 혹여나 미행을 당하진 않았을까? 그렇게 들킨 이곳으로 일진회의 누군가 확인차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계단을 다 올라와 3층의 복도를 걷는 소리가 들렸다. 숫자는 1명.
몸이 병신이어도 1명 정도면 개박살낼 자신 있었다.
옷가게 출입구 밖으로 복도를 비추는 플래시 불빛부터 보였고, 곧 그 플래시를 든 주인공이 드러났다.
작은 키의 압도적인 크기의 젖가슴을 지닌 여자. 한 손에는 소주 5병과 콜라 1.5리터가 든 비닐봉투가 들려있었다. 신재희가 분명했다.
신재희는 핸드폰 플래시를 들어서, 신재준과 기미정을 밝혔다.
애인처럼 꼭 붙어있는 모습에, 신재희의 표정이 와그작 구겨졌다.
"왜 둘이 그렇게 붙어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