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봄개학
신재준은 소주를 잘 마시지 않았다.
신재희는 그럭저럭 마셨다.
기미정은 김하늘의 자존심을 슬슬 건드리며, 죽어라 마시게 만들었다.
물론, 그만큼 자신도 마시게 됐지만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주량을 잘 몰랐다. 5병을 혼자 마셔도 취하지 않았었다.
가져온 소주가 모두 5병.
혼자 다 마셔도 취하지 않을 양이었기에, 기미정은 김하늘을 찍어누를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기미정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주가 3병째 바닥을 보였는데도 김하늘의 등허리는 꼿꼿했고, 두 눈은 힘이 있었다.
기미정은 일이 그르칠 것 같아 올라오는 조바심을 숨기고 말했다.
"너 좀 세다?"
"너도."
김하늘이 취하긴 했는지, 두 눈을 부릅 뜨고 있긴 했다. 저거 다 일부러 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란 거 다 보였다.
'그래도 김하늘, 완전 꽐라되기 전에 술이 모자를지도 모르겠는데. 그럼 재희한테 술 사오라고 시켜야 되나? ...아.'
신재희한테 셔틀 시킬 경우, 겨우 '일진회 탈퇴자'라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호감이 싹 깍일 지도 몰랐다.
'나와 친해지려는 게 셔틀로 부리려는 것이었네.'하는 인상을 심어주어선 안 됐다.
'첫 인상부터 망가지면 곤란하지. 그러면 어떻게 한다...'
기미정은 평소 잘 쓰지 않던 '잔머리'를 쓰려니까, 답답함이 들었다.
그럼에도 성욕을 위해서 인내하고 잔머리를 쥐어짜냈다.
술이 다 떨어지면 술사러 나서야겠다. 그러면 마음 약한 신재준이 자기가 대신 사온다고 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술을 뚫을 수 있는 구멍가게를 아는 건 신재희였고, 자기 오빠가 이 밤에 술 사러 나가는 걸 싫어할 신재희가 알아서 가려고 하지 않을까...
기미정은 그렇게 희망회로를 돌려봤다.
신재준이 오징어 안주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천천히들 마셔라. 빨리 안 먹어치우면 누가 잡아가냐?'
한 모금 정도 마신 것 같은데, 핸드폰 플래시로 비추는 얼굴이 새빨갰다.
'술에 약한가 보네. 잘 됐다.'
다만, 신재희는 아직 멀쩡했다. 일진 애들끼리 먹는 술자리에서 신재희는 제법 잘 마시는 편이었다.
'에이씨. 그러고 보니 김하늘 만이 문제가 아니었잖아. 신재희도 꽐라로 만들어야 하는데...'
기미정은 자신의 계획이 잘 흘러가지 않고 있음에 답답했다.
처음부터 뭔가 꼬였다. 원룸방을 못 쓰게 된 것부터 말이다.
역시 자신은 머리 쓰는 건 별로였다. 때리고, 빼앗고, 공포를 줘서 겁에 떨게 만드는 게 낫지...
'아, 시발. 생각해보니까 나 지금 상태로 찜질방도 못 가잖아.'
자연스럽게 찜질방에 가도록 유인해서 신재희의 알몸을 보고 즐길 생각이었는데... 자신의 몸 상태를 깜빡 잊고 있었다. 팔다리의 깁스 때문에 평소 샤워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 시발.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김하늘, 이 년부터 조지고 보자.'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5병이 결국 바닥이 났다.
'좋았어.'
김하늘은 고개를 푹 숙인채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개쉽네. 술이 다 떨어진 게 문제지만.'
신재준도 소주잔으로 치면 3잔 정도 마셨는데, 졸려운지 신재희의 어깨에 고개를 대고 눈이 깜빡깜빡했다.
"오빠, 여기서 자면 얼어죽어."
신재희가 자신의 어깨를 으쓱거리며, 신재준의 머리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신재준의 눈이 뚜렷해지며, 고개를 바르게 세웠다. 잠이 올락 말락한 졸린 눈으로 기미정을 보며 말했다.
"미정아, 하늘이 좀 깨워. 다 먹었으니까 가자."
'힘 풀린 눈도 꼴릿하네, 이 놈... 그리고 이대로 갈 수는 없지.'
"아직 과자 많이 남았잖아. 이건 다 해치워야지."
술만 빨리 퍼마시다보니, 안주는 절반도 줄어들지 않았다.
김하늘의 돈으로 결제한 안주들이었다. 신재준은 남이 사준 안주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가긴 미안했는지, 떠나자는 말을 재차 하진 않았다.
"맞다, 재희야. 미안해. 김하늘하고 내가 술 다 마셔버렸네."
"괜찮아요."
"아냐, 아냐. 내가 사올게."
기미정은 간신히 짜낸 계획을, 신재희에게 술을 사러 나가게 하기 위한 시도를 해봤다.
"어딜 가. 그만 마셔. 안주나 해치우자."
'쯧... 역시 내 생각대로 안 되네.'
기미정의 희망회로는 신재준이 대신 술 사오겠다고 나서고, 그에 신재희가 대신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희망회로는 처음부터 타버렸다.
기미정은 과자를 몇 번 주워먹다가,
'행동으로 해보자. 이래도 같은 소릴 하겠어?'
이 술자리를 파토내기 싫어서 목발을 짚고 일어났다.
"기미정, 어디 가."
"술 사러."
"그 몸으로? 하아... 그냥 내가 갈게. 넌 기다려."
"아, 오빠. 앉아. 내가 갔다올게. 술 어디서 살 수 있는지도 모르잖아."
"아, 나 미성년자지..."
"술 취했냐...? 그럼 제가 다녀올게요."
'킥킥. 됐네? 나도 머리 쓰면 된다니까.'
신재희가 일어났다.
"오빠, 핸드폰 플래시 켜놔. 난 내 폰 가져갈게."
신재준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플래시를 켰다.
신재희가 건물을 떠나기 시작했다.
신재준은 어둠이 무서운 듯, 플래시로 환한 부분만 쳐다봤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가냘픈 소년이라...
그런 소년을 강제로 취하는 역할은 분명 나쁜 년일 것이다. 기미정은 이대로 나쁜 년으로 돌변하고 싶었다.
그 충동을 억지로 억눌렀다.
'김하늘은 뻗었고, 신재희가 떠나서 신재준이 혼자 깨어있는 상태지만... 지금 신재준은 제정신이란 말이지. 아직은 건들면 안 돼.'
이럴 때일수록, 신재준을 섣불리 건들지 말고 신뢰를 쌓아야했다. '술 취했다고 해서 건들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했다.
기미정은 조용히 과자를 집어먹었다.
신재준도 과자를 집어먹으며 물었다.
"하늘이는 어떻게 하지?"
기미정은 흘낏 고개를 푹 숙인 김하늘을 보았다.
'저러다가 깨면 목에 담 와있겠네.'
"깨우든지, 재희한테 데려가라고 해야지."
"아, 나중에 안 깨어나면 아란이 누나라도 불러야겠다."
"아란이 누나?"
"아, 내 여친."
"누나면... 고3?"
"아니, 성인인데..."
'아, 시발. 성인이면 이미 신재준 다 따먹은 거 아니야?'
기미정의 유니콘 기질이 불길한 추측을 하며, 불쾌하게 만들었다.
"미정아... 이것도 학교에서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신재준이 부탁하듯 말했다. 그의 사근사근한 말투에 불쾌한 심정이 더욱 강해졌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이미 딴 여자한테 따먹혔을 거라 상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기미정은 바보처럼 겉으로 표현해내진 않았다.
"안 말해, 안 말해. 나 말할 친구도 없어."
"흐흫... 왕따네."
"그러게. 일진짓하면서 지낸 게 지금 생각해보니 허무하네. 나중에 성인이 되면 누가 나랑 계속 연락을 주고 받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
사실 봊찐따 같은 년들과 사귀고 싶지도 않고, 평생 알고 지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건 모두 신재준에게 점수를 따려는 개수작이었다.
"그럼 하늘이랑 친구해. 싸우지 말고."
"흐음... 너랑도 친구할 수 있어? 그럼 될게."
"흐흫... 너 나 좋아하냐? 근데 꿈깨라. 나 여친 있으니까."
"...좋아하는 거 아니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마음에 들어."
"그래? 내가 그때 우리집에서 몸 녹이고 해준 게 감동이었나보구나?"
"그렇지..."
그때 부축해주던 신재준의 부드러운 몸이 아직도 방금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났다.
또 맛보고 싶었다.
미칠 것 같았다.
바로 옆이었다. 몇 cm 움직이면 그때 그 감촉을 맛볼 수 있었다.
기미정은 생전 잘 하지 못했던 '인내'를 하면서, 충동을 버텨냈다.
'그리고 재준이가 아직 자기 여친한테 연락한 것 같지는 않지? 여친한테 연락하기 전에 술 먹여서 제정신 못차리게 해야겠어.'
신재준의 여친이 오면 이 술자리가 파하고, 신재희와 신재준을 동시에 공략하는 기회가 물 건너 갈 게 뻔했다.
신재준이 불안한 듯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어둠이 두렵다는 것처럼.
기미정은 신재준이 어둠을 무서워해, 계속 신재희한테 붙어있던 걸 떠올렸다.
속으로 잘 됐다고 쾌재를 지르며, 겉으론 걱정하는 목소리를 냈다.
"왜? 어두운 게 무서워?"
"나 '어둠공포증'이 있어서. 혹시 알아?"
"처음 듣는 건데. 고소공포증처럼 생리적인 거라며?"
"응..."
신재준은 아예 눈을 감았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이 높은 곳에서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것처럼.
기미정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무서우면 내 옆에 와서 앉아. 아까 재희가 옆에 있을 때는 괜찮은 것 같더만."
'그냥 옆에만 앉아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 몸을 붙이고 있었지.'
옆에 앉히기만 하면 신재준이 스킨십을 해올 지도 몰랐다.
신재준은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깔고 앉아있던 라면박스 종이를 끌고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물리적으로 타인의 신체가 가까워지니 따뜻해졌다. 그리고 바위처럼 타인에게 마음을 안 열어주던 기미정의 마음도 녹아내렸다.
바로 옆에 앉아서 보는 신재준은 평소 때와 다르게 보였다.
특히나 어둠 속에서 작은 조명 하나만 의지한 채 신재준을 쳐다보니까 신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기미정은 신재준에게 더욱 빠져드는 걸 실감했다.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 짙은 눈썹과 긴속눈썹. 귀여운 외모인데도, 붉은 입술이 야해보였다.
입술을 덮쳐서 맛을 보고 싶었다.
"아, 재준이. 너 목 마르지? 재희한테 음료수 좀 부탁해야겠다."
"미정이, 너 의외로 상냥하다?"
"킥킥... 그래? 나도 나한테 이런 점이 있는 줄 몰랐다."
상상도 못 했었다. 자신이 나약한 척 연기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날 부를 때, '기미정'이라고 안 하고, '미정이'라고만 부르네.'
고작 호칭이 변했을 뿐인데, 신재준이 점차 자신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는 확연히 와닿았다.
"아, 하늘이 좀 눕혀줘야 겠다."
옆자리에 존재하던 체온이 곧 멀어져갔다.
따뜻함이 떠난 뒤에 추위는 더 강하게 체감되기 마련이었다. 기미정은 신재준이 떠나자 마음이 차가워졌다.
기미정은 김하늘이 누울 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신재준의 뒷모습을 못 마땅하게 쳐다봤다.
김하늘의 뒤에 상자를 깐 그가 김하늘의 어깨와 뒤통수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하늘아, 눕자."
김하늘이 입고 있던 치마는 짧았다. 상체가 눕게 되면서 하체가 편한 자세를 찾아 양옆으로 벌려지게 됐다.
그 치마 속으로 보이는 팬티에, 기미정은 질색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동성인 여자의 팬티는 보기 싫었다.
신재희의 것이면 몰라도.
"아."
그랬다가 신재준이 놀란 목소리를 내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뭐야... 저 시발년이?'
신재준은 김하늘의 두 팔에 끌어안겨져 있었다.
'저 년, 저거 깨어있는 게 분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