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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화 〉봄개학 (191/201)



〈 191화 〉봄개학

"미쳤냐?"


기미정의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없었으면 하는 여자, 김하늘의 목소리.


"지금 뭐라고 했냐?"
"그 몸으로 싸우겠다고?"

기미정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남에게 걱정을 사는 게 싫은 사람이었다.


"너한테 걱정 받을 정도로 약한 상태는 아니야."

기미정의 대답에 이번엔 신재준이 걱정하는 낯으로 말했다.

"7명은 모여있던데..."
"그게 보여?"

기미정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가지 마. 칼 들고 다니는 여자도 있었어."
"초능력이라도 있는 거야, 뭐야?"

기미정은 어이없다가도, 신재준이 자신이 싸우길 원칠 않아 저런 쌩뚱맞은 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3학년에 어떤 또라이가 나이프 들고 다니긴 했지.'

그 여자는 소녀원에 들어가기는 싫은지 싸울 때, 칼을 꺼내 사용하진 않았다.


'칼은 그다지 신경  쓰이는데... 공간이 위험하긴 하네. 비좁은 방에서 여러 명이 몸무게로 짓눌러오면... 나라도 어떻게 못해.'

안전을 위해서라면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신재연에게 참교육을 당하기 이전이었다면, 함정인 게 뻔해도  같이 성을 내며 돌진했을 것이었다. 성격 많이 죽었다.

'게다가 이 흐름을 망칠 수는 없지.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기미정은 달려들어서 박살내고픈 충동을, 스스로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붙여 잠재워버렸다.


"그럼 자리 옮기자."
"오늘은 그냥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냐."
"김하늘, 좀 닥쳐."


신재준과 신재희에게 술먹이고 이런저런 일을 해볼 기회인데, 김하늘이 훼방을 놓자 열 받았다.


"아니, 시바. 걱정하는 건데  정색하고 그러냐."
"니한테 걱정 받으면 기분 더럽거든?"
"야, 니들 싸우면 나 그냥 간다?"

신재준이  마디 하자, 기미정은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마음에  드네...'

누군가에게 아쉬워서 져줘야 하는 상황...

아직 신재준이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하는 거다.


기미정은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이 관계를 역전시켜서, 말 잘 듣는 아이로 만들고 싶었다. 가끔씩 카악질 해대는 것까진 귀여우니까 허용.


기미정은 속마음을 정리하고, 신재희를 핑계삼기로 했다.

"재희 좀 봐. 술 마시고 싶어서 가방 메고 걸어다녔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되겠냐?"


김하늘이 신재희를 쳐다봤다. 신재희는 술을 마시고 싶은지 입술을 혀로 핥았다.


"하아... 그럼 어디로 가는데?"
"있어. 먼지가 많이 쌓였긴 해도 괜찮겠지."
"일진 애들이 술담배 하려고 모이는 곳이면 별로지 않나?"
"일진 애들도 모르는 곳이야. 갈 거지?"


기미정의 물음에 부정의 대답은 들어오지 않았다.

기미정은 목발을 움직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애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날 헛걸음하게 만들어? 나중에 두고 보자고.'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려서 안주거리를 구입했다. 기미정은 아버지한테 받은 카드로 계산하려고 했는데, 김하늘이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하자 그러라고 했다.


"혹시 상자 남는 거 있으면 받아갈 수 있을까요?"

기미정이 여대생으로 보이는 편의점 알바생에게 존댓말로 물었다.


"이거 밖에 없는데..."
"감사합니다."


편의점 알바생이 2개의 라면박스를 창고에서 꺼내왔다.

기미정은 목발을 짚어야했다. 상자를 들고 다니기 힘들었다. 그걸 안 신재준이 라면박스를 받으려고 하니, 김하늘이 나서서 대신 받았다.


편의점 뒤쪽의 골목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착한 건물 앞에서 신재희가 중얼거렸다.


"여긴..."


신재희가 아는 건물이었다. 폐빌딩. 저번 달 초에 신재희를 팰 곳이 어디 없나 찾아보다가 발견한 장소였다.


기미정에게는 신재연에게 짓밟혔던 경험이 있는 이 갈리는 장소였다.


'여기 오는 거 개짜증났는데... 여기서 신재연, 그년한테 복수한다면  기쁘겠지.'

수치를 당한 곳에서 설욕을 갚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주차장은 먼지 장난아니니까...'


"위층으로 올라가자."

폐빌딩의 창문틀이 모두 빠져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들어가지 못한 내부는 캄캄했다.


김하늘과 신재희가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빛을 밝혔다.


신재준이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는 걸까. 계단을 오르는데 한 손으로 신재희의 손을 꼭 잡았다.

'남매 세트, 아... 개꼴리네.'

기미정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랫배도 마찬가지였다. 급하게 가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가능하다면야 오늘 끝장을 보고 싶었다.

적당히 3층까지 올라갔다가, 빌딩 안쪽의  가게로 들어갔다. 원래는 옷가게였는지   쪽에 마네킹이 쌓여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을 닮은 것이 수북하게 쌓여있으니 으스스한 느낌이 났다.

"상자 깔아."
"하다 못해 부탁조로 좀 해라."

김하늘에게 명령하자, 김하늘은 투덜거렸다.

"봊까."
"하아... 환자를 때릴 수도 없고."
"내가 이 상태에서도 너 발라. 맞짱 깔까?"
"너희 왜 자꾸 싸우냐. 그리고 굳이 꼭 여기여야겠어? 마네킹 때문에 무서운데."

신재준이  주위를 무서워하며 신재희를 부적처럼 껴안는 꼴이 귀여웠다.


그냥 발이 가는 대로 들어온 가게였는데, 잘 선택한 것 같았다.


김하늘이 상자를 펼쳐다가 접히는 부분을 따라서 찢었다. 먼지가 쌓인 바닥에 앉기 위해 깔기도 하고, 안주와 소주를 올리기 위해 깔기도 했다.


신재준과 신재희는 몸을 바짝 붙인 상태로 상자 위에 앉았다.


김하늘과 신재희의 핸드폰 플래시 만이 이 어두운 장소를 밝혀주는 빛이었다.


기미정은 어둠이 마음에 들었다.  어둠을 가르고 귀신이 오든, 노숙자가 오든, 범죄자가 오든.  누가 오든지 간에 자신이 제압할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어서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재준이랑 재희 끌어안으면 딱 좋겠는데.'

목발을 내려놓고 앉으려고 하는데, 김하늘이 도와주려고 했다.

김하늘 따위가 자신의 몸을 건드는 게 싫어서 정색하고 거부의 몸짓을 보여줬다.


네 명 모두 술안주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소주를 든 가방 속에는 종이컵도 있었다.

김하늘이 소주 한 병을 따고 종이컵의 밑바닥이 찰 정도로 조금씩 따랐다.

"난  먹을 건데."

신재준이 거절하자, 김하늘이 소주병을 뒤로 내빼려고 했다.


"그냥 받아두기만 하지?"
"그럼 그럴까... 애들아, 빨리 마시고 나가자."
"킥킥, 왜 무서워?"
"고소공포증처럼 생리적인 거라..."
"그럼  번 술 마셔봐. 공포증도 잊게  걸?"


기미정의 말에 신재준은 결심했는지 자신 몫의 종이컵을 들었다.

그러자 술병을 들고 대기하던 김하늘이 밑바닥을 채울 정도로 따랐다.


"그럼 건배."
"짠."

네 명의 사람이 종이컵을 부딪쳤다.


첫 건배라서 그런지 신재준도 종이컵에 입을 댔다.

'마신 건가? 아니면 그냥 입술에 묻히기만 했나...'

바닥에 깔린 라면박스 위에 내려놓은 핸드폰 플래시는 조명을 위로 비추고 있어서, 종이컵 내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신재준은 천천히 요리하고, 우선 김하늘부터 조져야지.'


"김하늘.  마셨냐?"
"아니, 반 정도 남았어."
"알쓰냐?"
"잘 먹는 편인데."
"그럼 빨리 먹어. 집 갈 때, 재희가 들고갈 가방이 가벼워져야 하지 않겠냐."

가방에는 소주가 5병 있었다.


기미정의 '알쓰냐?'는 말에 김하늘이 자존심 자극을 당했는지 종이컵 안에 든  모두 삼켰다.

그런 김하늘에게 신재준이 떡볶이맛 과자를 하나 집어서, 직접에 입에 넣어주었다.

'왜 나는 안 주냐.'

그 꼴이 보기 안 좋았다.

기미정은 소주를 자작해서 종이컵에 따랐다.


벌컥벌컥 쏟아진 소주가 종이컵 반을 채웠다.

김하늘이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초반부터 그렇게 달리게?"
"난 술 세거든."

기미정은 소주병을 김하늘 앞에 내려놓았다.


김하늘은 그에 질세라 자신의 컵에도 소주를 종이컵의 7할 정도 채웠다.

그리고 5할 만큼 찼던 기미정의 컵에도 소주를 더 따라 7할을 맞췄다.

'이 년이?'

그렇게 술을 따르니 소주 1병이 벌써부터 동이 나려고 했다.


"기미정, 나랑 옛날처럼 친하게 못 지내겠냐? 아까 재희한테는 친구하자고 하드만."
"...그럼 나보다 오래 버텨봐."


기미정이 컵을 들자 김하늘도 컵을 들었다. 둘은 건배를 하고 그래야만 하는 규칙이 있는 것처럼 종이컵에  소주를 원샷으로 해치웠다.

입부터 시작해 목구멍을 소독하는 독한 느낌에, 기미정은 표정을 찡그렸다.


그런 그녀 앞에 과자가 내밀어져있었다.

신재준이 귀여운 얼굴을 들이밀며, 과자를 하나 내밀고 있었다.

기미정은 피식 웃고  과자를 받아먹었다.

"아, 씁..."
"꽐라되지 말고 적당히 해."


김하늘이 표정을 잔뜩 구기며 괴로워하자, 신재준이 김하늘에게도 과자를 내밀었다.

'김하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쳐 마시고, 뒈져.'


주량은 DNA의 영향이 컸다.

기미정의 어머니는 주량이 센 편이었고, 그 딸인 기미정도 주량에 자신있었다.

김하늘의 주량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신보다 세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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