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0화 〉봄개학 (190/201)



〈 190화 〉봄개학

"학교에는 나 여친 있는 거 소문내지 말아줘."
"아, 일부러 숨기고 있던 거였어?"
"응."

식사 도중에 아버지가 김하늘과 신재준보고 사귀는 사이냐고 물어봤다.

<"아뇨.">

김하늘이 아니라고 해서 다행이었다가,


<"재준이, 여친 있어요.">

뒷말을 듣고 몸이 싸해졌다.


'지금 생각해도 개같네, 진짜.'

겨우 자신을 '정상인'으로 만들어줄 반쪽을 찾아냈다. 그런데 이미 임자가 있었단다.

'강제로 빼앗으면 되지.'

기미정은 여태껏 빼앗아왔다. 남의 구입한 것을 빼앗았고, 남이 얻어낸 것을 강탈했다.

'약하면 빼앗겨야지. 꼬우면 빼앗기질 말든가.'

기미정은 사고방식이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년일지는 모르겠지만 불쌍하네.'

신재준처럼 귀여운 놈을 빼앗길 테니까.

"알았어. 말  할게. 아, 우리 소화할 겸 바로 나갈까?"

기미정이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방은 누가 좀 들어줬으면 하는데."
"제가 들게요."

신재준이 신재희를 풀어주었다. 아까 전까지 신재희와 찰떡 같이 붙어있는 꼴이 종합선물인 것 같아서 보기 좋았었다.

'착하네, 우리 재희.'

딱히 신재희한테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데도 고분고분한 게 마음에 들었다. 겨우 사과를 했을 뿐인데, 이토록이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다니 놀랍기도 하면서 기뻤다.

'확실히 내가 남들한테 사과하는 스타일은 아니지. 남들한테는 죽어도 사과하질 않던 내가, 자신에게만은 사과를 해서 감동이라도 받으셨나?'

신재희는 맨날 자기만 보면 반항적인 태도였다. 설설 기면서도.


그런 신재희를 괴롭히는 맛이 일품이지만, 지금처럼 방심하는 모습도 좋았다. 저 방심하는 얼굴에 절망어린 표정을 그려놓고 싶었다.

신재희가 소주가 든 가방을 멨다. 그런 과정에서 소녀의 폭유가 크게 출렁거렸다.

'아, 시발. 만지고 싶다...'


기미정은 힐끔 신재준의 국부를 살폈다.

'한 손에는 젖가슴 주무르고, 한 손으론 신재준 불알 주무르고. 그럼 최고일 건데. 다 가져야지.'

기미정은 책상에 기대어두었던 목발을 짚고 일어났다.

"부축해줘?"


신재준이 기특한 물음을 던졌다.


김하늘과 신재희가 동의하지 말라는 듯 기미정을 노려봤다.


기미정은 그 꼴이 웃겼다. 그것 때문이라도 부축해달라고 할까 했다. 그때처럼 신재준의 몸을 느껴보고 싶기도 했고.


"괜찮아."


하지만 기미정은 거부했다. 일단 참아줬다. 너무 달라붙었다가 괜히 김하늘과 신재희의 경계심을 높일라.


'천천히 가야지.'

"아빠, 놀다올게."
"지금? 그럼 밤까지 놀겠네?"

지금은 밤 6시 20분을 조금 넘긴 상태였다. 신재준 일행이 이 집에 도착할 때부터 캄캄했다.

"이걸로 야식 사먹고 그래."

아버지가 건넨 카드를 받았다.

"그럼 놀다올게."
"안녕히 계세요. 잘 먹었습니다."

신재준이 인사했다. 김하늘과 신재희도 뒤따라 인사했다.


"응. 우리 미정이랑 친하게 지내주고, 앞으로도 자주 놀러와. 아저씨가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네."


기미정이 나중에 나오고, 다리가 멀쩡한 다른 애들이 먼저 내려갔다.

신재준이 내려가면서 자꾸만 위쪽을 흘깃거렸다. 목발 짚은채 계단을 내려오는 꼴이 아슬아슬해 보이는 걸까.


'아, 한  자빠져볼까.'


그러면 신재준이 그 연기에 깜빡 속아서  걱정해줄 것 같았다.

'원래 남한테 걱정 받는 거 싫은 성격인데...'


자존심이 센 기미정은 남한테 걱정을 듣는 것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러나 신재준에게는 걱정을 받고 싶었다.

'기만하는  재밌어.'


자신에게 깜빡 속아넘어가는 신재준을 보면 재밌었다.

빌라 현관 밖으로 나왔다.


캄캄한 겨울 밤을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다.


"그 아지트가 어디냐?"

김하늘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입고 있는 치마가 데이트에 어울리는 치마였기에 주머니가 없었다.

'이 새끼... 재준이한테 예뻐보이려고 꾸민 거네.'


아버지가 신재준과 김하늘보고 둘이 사귀냐고 물어본 까닭은 김하늘이 빡세게 꾸몄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기미정도 처음 김하늘이 화장도 한 걸 봤을 때, 둘이 데이트라도 하다 온 건가 싶었다.


"학교 앞, 원룸이야."


성연고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걸어서 15분 정도.


언덕길에서 내려가는 방법이 2가지가 있었다.


학교 쪽으로 향하며 완만한 경사길을 오래 내려가는 법.

가파른 경사길을 내려가 시내를 관통해 학교 쪽으로 향하는 법.


기미정의 상태 때문에 당연히 완만한 경사길을 이용했다. 대각선으로 학교로 향하는 것이라 거리상으로도  길이 더 짧았고.


"재희야."
"네?"
"재준이한테 들었어? 나도 일진 관둘 건데."
"예... 듣긴 했는데요."
"같은 탈퇴자끼리 뭉치자고. 일진년들이 까불지 못하게."


신재희가 자신에게 가시를 세워보이면, 신재준에게도 그랬듯 약한 척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약한 척하기도 전에 신재희는 이미 자신에게 감정이 풀린 듯했다.

그러면 차라리 '자신과 동병상련이며, 보호해주는 언니' 컨셉이 나을 것 같았다.

"예..."

'좋았어. 마지못한 대답 같긴 해도, 스스로 입에서 긍정이 나왔다는 게 중요하지.'


"근데 너 정말 일진 관둘 거 맞냐? 7반 너한테 기강잡혔던데."

기뻐하는 와중에 김하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짜증이 났다.


"다친  치료되기 전까진 일진회에 있으려고. 탈퇴하면 재희한테 그랬던 것처럼 린치하려고 굴 텐데, 그에 맞서 싸우려면 컨디션 올려둬야지. 계속해서 기강잡는 건, 괜히 일진회 탈퇴하려는 낌새 안 보이려는 거고."
"흠, 그냐?"


'그래, 시발아.'

사실 신재준과 신재희를 꼬시기 위해 일진회를 관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생각해보면 계속 일진회에 소속될 이유가 없었다. 여태껏 일진회에 소속된 것은  애들에게 두려움을 사기 위함이었는데...


'일진회가 무서운  아니라, 내가 무서운 거잖아, 그 찐따들은.'


일진회에서 나가도 두려움을 살  있을 거였다.

게다가 신재희도 일진회에서 나갔으니 일진회에 더더욱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요샌 일진회 년들도 나만 보면 설설긴단 말이지.'

작년에 시내 공원에서 조폭 3명을 동시에 묵사발시켰던 사건이, 일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진회 학생들에게도 공포를 사게 된 계기가 됐다.

'일반 학생인 나한테 일진회가 벌벌 긴다? 이런 그림도 나쁘지 않지.'


기미정은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신재연에게 깨진 것은 분하지만, 그 덕분에 신재준과 신재희에게 다가갈 구실도 생겼으니 말이다.



학교 근처에 도착했다.

학교 내리막길 바로 앞에 위치한 원룸 빌라로 다가갔다.


'저 원룸에서 김하늘부터 조진 다음에, 신재희랑 신재준도 조져야지. 신재준이 술 먹기 싫어했으니  됐어. 마지막까지 살려뒀다가 천천히 술 먹여서 요리를...'

"재준아?"

뒤에서 들려온 김하늘의 목소리에 앞서 걷고 있던 기미정이 멈췄다.


학교 근처부터는 기미정이 '일진회 아지트'까지 길잡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미정은 돌아서 신재준을 봤다. 신재준은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기미정은 신재준이 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기미정이 찾아가려고 했던 그 원룸 빌라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재준아, 왜 그래?"
"..."
"오빠?"
"..."


기미정은 다시금 신재준 쪽을 쳐다봤다.

'갑자기 귀신이라도 들렸나? 갑자기 왜 정신빠진 것처럼 가만히 있지...'


기미정은 지금 신재준의 상태에 조금 소름 돋았다.

"어째서 한 방에 우글우글 모여있는 거지?"
"...뭐?"


기미정은 놀라서 중얼거릭고, 고개를 홱 돌렸다.


원룸 빌라의 가구들에는 전등이 켜진 데와 그렇지 않은 데가 섞여있었다.


기미정은 신재준의 중얼거림을 허투로 듣지 않고, 일진회 아지트로 쓰이는 원룸이 어디인지 눈으로 가늠했다.


해당 원룸방은 전등이 꺼져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때마침, 방 안에서 슬쩍 불빛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커튼을 치고 있는지 약한 불빛이었는데, 확실히 눈에 띄었다.


"재준아? 혹시 '한 방에 우글우글 모여있는 방'이 어떤 방인지 말해줄 수 있어?"

기미정은 신재준을 시험해보고자 물었다.

"음... 2층의 왼쪽에서 3번째 창문..."


203호.

일진회의 아지트로 쓰는 원룸방이 있는 그곳이었다.


'신기라도 있나... 아니면 초능력? 어떻게 저 어두운 창문을 보고 '우글우글 모여있다'란 걸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재준의 시선 때문에 '비어있어야  방'에 누군가가 있음을 알게 됐다.


자신이 방금  불빛은, 분명 누군가의 인기척이었다.

"하. 시발. 설마 나 짓밟으려고 저기 함정 파둔 건가? 개새끼들."
"지금 뭔 얘기야?"

기미정의 혼잣말에 김하늘이 물었다.


김하늘은 웃기게도 신재준에게 묻지 않고 기미정에게 물었다. 더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 소리를 한  신재준이었는데도.

기미정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아지트 비워두라고 했는데... 방금 살짝 불빛이 보였어. 커튼 쳐두고,  꺼두고... 아마 날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한  같은데? 일진회 년들이."

'3학년들인가?'


안유리나 박슬기, 고미혜과는 썩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 번 같이 패싸움도 하고 시내를 놀러다니기도 하고 한 사이였다.

그 녀석들이나 후배 일진들이라면,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고 할  같지는 않았다. 녀석들은 분명 기미정에게 불만이나 서운한 점을 갖고 있는 갖고 있긴 하겠지만, 명분이 빈약했다.

반면에 올해 3학년에 올라가는 일진들... 그년들은 명분이 아주 명확했다. '1학년 후배한테 잡아먹힌 학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2학년이 될 일진들이 올해 3학년이 될 일진들에게 겉으론 존대말하면서도, 존경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면 기미정이 워낙 강했고, 안유리도 꽤나 셌으며, 박슬기는 공부 잘 하고 집안 배경까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안유리와 박슬기는 일반 학생들 앞에서는 1살 많은 선배 일진들에게 존중해주긴 했는데, 기미정은 달랐다.

일반 학생들 앞에서도 1년 선배인 일진에게 반말하거나 장난을 걸거나 했었다.


'마침 내 몸이 반병신 됐고... 내가 지네들, 3학년한테도 아지트 쓰지 말라고 경고하니까 야마 돌았나보지?'


"킥킥. 다 뒈졌어, 시발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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