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봄개학
'그때 약을 안 먹었으면 임신했을까?'
룸카페에서 나오고 곧 바로 약국에 들려 사후피임약을 구매했다. 그리고 신재준의 앞에서 삼켰다.
그거 먹고 10일 정도 뒤에, 사후피임약의 영향 탓으로 하혈이 심하게 났었다.
최근에 한 임신테스트기에서 한 줄만 나타났다. 임신을 피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봊 같네."
차라리 그때 임신했다면, 신재준을 최아란, 그 여자로부터 빼앗을 수 있었을까...
신재준은 착하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아이니까 그럴 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재준이는 그 여자가 재연이 언니 같으니까 사귄 거였지.'
신재준이 최아란과 사귀는 이유는 가벼웠다.
그는 자신의 누나를 좋아하고, 자신의 누나같은 여자가 이상형인데. 때마침 그 이상형이 나타나니 난생 처음 강한 호감을 갖게 된 것이고, 고백을 받자 쉽게 허락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신재준, 본인이 밝혔던 '사실'이었다.
신재준은 사귀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며 김하늘과 나예성에게 털어놓았었다.
'그때 피임 안 하고, 내가 덜컥 임신했다면... 그랬다면 재준이는 내 꺼였는데...'
으드득.
김하늘은 이를 갈았다.
그때 그 순간, 신재준에게 쿨한 모습을 보여준 게 잘못된 선택이 될 줄은 몰랐다.
차라리 나중에 사후피임약을 먹을 거라고 한 뒤, 먹지 말고 그냥 임신을 노려볼 걸 하고 지금은 후회 막심한 상태였다.
가능만 하다면 시간을 되돌아가 임신을 노리고 싶었다.
신재준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재준이... 이미 그 여자랑 했겠지...'
자신과 실컷 섹스 중인 신재준이었다.
최아란도 여자니까, 귀여운 남자친구인 신재준을 항상 따먹고 싶어서 찔러봤을 게 분명했다.
신재준의 성격이면 바람 피우는 것이 미안해서, '여자친구'인 최아란에게 쉽게 몸을 허락해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최아란과의 교제를 이어가는 게 나 때문일지도... 내가 억지로 자기를 취하니까, 보호막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좋아하지도 않는 최아란에게 붙어있는 거고.'
"아, 시발?"
지금 얼결에 한 추측이 왠지 그럴싸 했다.
최아란과 사귀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던 신재준이,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최아란과 연애를 지속하게 됐을까? 그 계기가 뭐였을까?
그 계기는 어쩌면... 자신이 어거지로, 지속적으로 범하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 빌어먹을 상황을 내가 만들어낸 거네. 시발.'
김하늘은 아예 그것이 사실일 거라고 확신해버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오늘 신재준에게 '친구 선언'을 들어버렸다. 세컨드도 뭐도 아니라고 신재준이 못을 박았다.
'만약 내가 그때 재준이를 덮치지 않았다면... 재준이는 그 여자와 사귀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고 바로 헤어졌을 거야... 하...'
그때 참았더라면... '친구 선언'을 듣는 게 자신이 아니라 최아란이 됐을 거란 생각에, 김하늘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너무나도 답답해서 주먹으로 내려치고 싶었다.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겠지.'
그 추측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아직 신재준은 최아란을 진심을 좋아하는 건 아닐 거였다. ...그래야만 했다.
'그럼 빼앗자. 임신해서라도.'
신재준의 정액을 받을 것을 생각만 하니, 저절로 허벅지가 조여들었다.
'재준이, 보러 가야지...'
김하늘은 침대에서 내려와 갈아입을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잠겨있는 책상 서랍이 눈에 띄었다.
붕대를 감은 손으로 자물쇠를 든채, 멀쩡한 손으로 열쇠를 돌렸다.
그 안에는 목줄이 들어있었다.
'애완인간 목줄 플레이... 장난식으로 시작해서, 점차 길들여보는 건 어떨까. 괜찮을 것 같은데...'
밖에 들고 다닐 물건은 아니다 보니, 서랍을 도로 닫고 자물쇠로 잠갔다.
/ / /
김하늘이 집에 왔다.
"아, 거기서 다이빙하면 어떡하냐. 아이고? 결국 죽었네."
"아씨. 좀, 조용히 좀 해봐. 집중 안 돼서 죽었잖아."
김하늘은 신재희가 롤하는 거에 훈수를 뒀고, 신재희는 귀찮아했다.
둘의 사이가 친해진 게 보기 좋았다.
'신재준'의 기억 속에서, 김하늘과 신재희가 저렇게 함께 노는 장면을 떠올리려면 중학교 초까지 거슬러가야했다.
중학교 때, 신재희가 일진이 되면서 김하늘과 사이가 소원해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친해진 것도 다 내 덕이지.'
둘 중에 문제가 있던 건 신재희 쪽이었다.
신재희는 사실 '신재준'를 좋아했다.
그래서 '신재준'과 가장 김하늘에게 질투와 시기, 갖기 시작했기에 둘의 사이가 소원해졌던 것이었다.
내가 김하늘이 아닌 최아란과 사귀는 데다가, 신재희에게 몸을 허락해주니까. 신재희는 더 이상 김하늘을 멀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었다.
'해결 방법이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결과만 좋으면 그만 아니겠어.'
내가 만들어낸 훈훈한 광경...
"아, 병신이냐? 로밍해줬어야지. 네가 꼈으면 이겼을 텐데."
"시발... 훈수 작작해라?"
"야... 너 언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일 줄 알았는데. 또 싸우네, 얘네.
'이 세계에서는 여자들이 게임 때문에 싸우네...'
다이아인 김하늘이 골드인 신재희에게 훈수를 둘 자격이 있긴 했다. 그래도 게임 실력 때문에 욕을 들은 신재희는 매우 큰 모욕을 느꼈을 것이었다.
"하늘아, 네가 먼저 잘못했어. 재희한테 욕 할래? 죽을래?"
"아, 미안, 재희야..."
"재희, 너도. 언니한테 욕하면 돼?"
"...안 돼."
"그럼?"
"미안, 언니."
나는 다시 관계가 나빠질 뻔한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데 성공했다.
아직 기미정네 갈 시간이 남아있었다.
두 사람은 계속 롤 삼매경이었다.
"오. 재희, 승급전이네? 열심히해. 난 입 다물테니까."
"...도와줘."
보통의 랭겜에서는 훈수를 바라지 않지만, 승급전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신재희는 김하늘의 오더를 받으며, 게임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고, 20분 정도 뒤면 슬슬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분 뒤에 가자."
"뭐? 아... 30분은 해야할 것 같은데..."
신재희가 전전긍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신재희의 어깨에 김하늘이 손을 올렸다.
"언니가 20분 만에 게임 이기게 해줄게. 너를 믿지 마. 나를 믿어."
'뭐라는 거야...'
헛소리를 찍찍 내뱉는 게, 김하늘은 어느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내 '친구 선언'에 극대노 해서 크게 자해해버리더니, 정신을 차린 걸까.
'그럼 다행이고...'
김하늘은 장담했던 대로 신재희의 승급전 1판을 20분 안에 끝내버렸다.
"재준아, 내 오더 실력 어때?"
관심도 안 가는 게임 실력을 어필해본들... 아무 감흥도 안 들었다.
"나 그 게임 잘 몰라. 슬슬 가자. 재희야, 컴퓨터 꺼."
5시 40분.
기미정의 집과 그녀의 어머님이 운영하는 정비소는 시내에 위치했다. 걸어갈 수 있었다. 미리 받아둔 기미정의 주소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10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아, 하늘아. 너 기미정네 집, 어딘지 알겠네?"
"알지."
김하늘과 기미정은 초등학교 때 베프였다.
'신재준'도 둘과 논 적이 몇 번 있지만, 기미정네는 안 가보고 정비소까지만 들렸었다.
지도 같은 거 안 보고, 기미정의 마중을 안 받고, 그냥 김하늘의 안내를 따라가면 되겠다.
"네가 길 안내해."
"오키."
이젠 비게 될 집을 문단속하고 나왔다.
날씨가 쌀쌀하고 음울하게 먹구름이 깔려있는 게, 뭔가 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기미정네 집에서 아무 일도 없겠지? 기미정네 아버님도 있을 건데... 문제가 생길 리 없을 거다.
/ / /
기미정은 식탁에 차려진 찜닭 한 점을, 익숙하지 못한 젓가자락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혹여나 젓가락에서 음식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신경쓰면서.
이런 일상 생활의 불편함 하나하나가 기미정에게는 스트레스였다.
'신재연...'
그 여자한테 이길 수는 없지만, 그 여자의 소중한 것들은 빼앗을 수 있을 거였다.
'신재준은 대충 속아넘어갔으니, 오늘은 신재희를 속이면 되겠네.'
기미정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흥분됐다. 다리가 저절로 떨렸다.
"미정아. 음식에 손대지 말랬지?"
"아, 하나만 먹었어."
기미정은 아버지의 잔소리에 툴툴거렸다.
"다리 떨지도 말고. 복 날아가."
그녀는 순순히 떨던 다리를 멈췄다.
아버지의 말에는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 따르는 기미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