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봄개학
'장군님, 꿈에서 떠봐주실 수 있어요?'
장군님이 사람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까지 읽을 줄 안다는 거 알았다. 또한 '내가 하는 짓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장군님에게 신재연의 마음속을 읽어달라고 한들, 그녀는 해주지 않을 게 뻔했다.
차라리 '꿈'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하면, 그녀가 내 말에 혹할 듯했다.
"여자 꿈에는 관심없는데."
안 되나?
'아, 그럼. 저랑 재연이 꿈을 연결 시킬 수도 있나요?'
"재준이, 네가 포함된 꿈이라면 볼만 하겠네."
'그럼 오늘 밤에 하죠.'
"좋아, 해볼까. 흐흫..."
역시 그녀는 관음증을 갖고 있었다. 내가 어떤 꼴을 당할지 관심이 많아보였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듯이, 차근차근 균형을 어거지로 맞춰봐야지.'
이참에 장군님을 이용해서 뽕을 뽑아야했다.
'최아란하고, 김하늘도 엮어볼까... 그 둘도 위험한 상황이니까. 서로 연락처도 갖고 있어서 언제 터질지 모르고.'
특히 장군님이 미래시로 보여준 게 있었다.
저번주, 김하늘과 기숙사 건물 화장실에서 섹스한 적이 있었다.
그때 노콘섹스를 거부하려고 했는데, 장군님이 미래시를 보여줘서 결국 질외사정을 하기로 한 뒤 노콘섹스 했었다.
<어째서인지 나와 김하늘, 최아란이 피시방에 함께 와있다. 두 여자는 롤을 하고 나는 그냥 인터넷 서핑이나 한다.>
<김하늘과 최아란이 피시방에서 주먹질하며 싸우기 시작한다.>
인상 깊은 장면이라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 그런데.
'장군님, 저번주에 보여줬던 장면이요. 진짜 미래 맞죠?'
"맞아.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일어났을 일이었지. 못 믿겠으면 예언하는 거 보여줘?"
'아, 아뇨. 믿을게요.'
소희정은 어렸을 때 '신재준'의 미래도 알아맞췄다.
<이 집에선 둘째가 불행을 피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고독했던 아이가 대신 돌아온다!>
소희정도 그런 예지 능력을 내는데, 소희정이 모시는 귀신은 더 신통하겠지.
'최아란은 날 억지로 취하고 있는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을 거야.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말이지. 내가 바람을 펴도 그 죄책감 때문에 참아낼까? 아님 폭주할까? 궁금하네.'
신재연의 반응을 확인하면, 그 다음엔 최아란의 반응 확인을 해보기로 했겠다.
'꿈'을 통해서.
'아, 만약 참는다고 해도, 참다가 폭발하는 경우가 더 위험하니까. 바람펴도 괜찮냐고 직접 물어봐야지.'
만약에 최아란이 세컨드를 만들어도 좋다고 한다면, 김하늘을 세컨드로 해서 사귀면 되겠다.
'김하늘도 나에게 있어 퍼스트가 못 되면, 차라리 세컨드가 되고 싶어하니까... 최아란이 오케이 하면, 김하늘을 정식으로 세컨드로 만들어야지. 둘이 갑자기 맞부딪쳐 폭발하지 못하게, 엮어둬야지...'
나는 무너지면 깨질 유리잔을 조심히 내려놓는다는 느낌으로, 관계를 정리해볼 생각이었다.
'수린이하고, 희정이는... 이대로도 괜찮겠고.'
신재연, 신재희, 김하늘, 최아란. 이 4명의 균형만 신경쓰면 됐다.
4개의 균형추를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것보다, 묶을 수 있을만한 것은 묶어서 신경 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균형추 2개 묶음만 신경 쓰는 게 더 안전할 것 같고, 내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 같고.
'일진애들하고는 엮이지 말자... 당장은 몰라도 나중에 좆 되니까.'
교복은 건조기에 돌려서 말렸다.
소희정의 집에서 피자를 먹고 나왔다.
"후우..."
장군님이 시일이 지나면 날 더 이상 지켜주지 않을 거라는 거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트레스에 위액이 역류해 아파왔다.
복권에 당첨된줄 알았는데, 꽝인 것을 안 기분이랄까.
차라리 장군님의 진의를 몰랐으면 가슴이 편했을 텐데.
아니지. 같은 동네, 같은 학교의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따먹혔다가 날 보호해주는 초자연적 힘이 사라지면... 그땐 진짜 망한다.
걸레라고 소문나서 얼굴 들고 다니기 민망해지는 건 정말 부차적인 문제였다.
신재연과 신재희는 폭주해서 날 어디 갈금할 확률이 높았다. 원래 세계에서 그러했듯.
평생 감금돼서 길들여지는 거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자유를 좋아했다. 그리고 일상에서 따먹히는 게 제일 맛있었고, 늘 새로운 여자를 원했다.
신재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어디야?]
"지금 집 가고 있어. 넌 집이야?"
[어. 지금 학교 끝난지 꽤 되지 않았나? 여태껏 뭐하고 있었던 거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마치 내 예전 여자친구 같았다.
"희정이랑 놀았어."
'그러고 보니 하늘이는 손 치료 잘 했나?'
소희정네 집에 있을 때에는 연락이 오진 않았다.
[희정이 언니랑? 뭐하고 놀았는데?]
"너 지금 내 사생활 캐묻는 거야?"
[뭐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피시방에 갔으면 피시방에 갔다, 이 정도의 대답 원했던 거거든?]
"그래, 코노에 갔다. 됐지?"
[엉.]
코인노래방은 피시방보다 더 잘 놀러가는 곳이었다.
나예성과 '신재준'이 컴퓨터 게임을 별로 안 좋아했기에 코인노래방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아, 맞다. 너 혹시 소문 들었냐?"
[소문?]
"안유리랑 박슬기가 오늘 아침에 싸웠는데, 결판 못 내가지고 학교 끝나고 맞짱 뜨러 가는 것 같더라고. 싸움 결과났을까 해서."
둘 중에 이긴 쪽한테 먼저 따먹히고자 생각했는데.
'하아...'
이젠 둘 다 그림의 떡이었다. 누가 이겼건 따먹히면 안 돼.
[안유리하고 박슬기가 맞짱 뜬 게 한두 번인가. 또 안유리가 이기겠지.]
"아, 역시 박슬기가 더 약하냐?"
[아무래도 박슬기는 두뇌파니까.]
"점심은 먹었고?"
[밥 해줘, 배고파.]
"아직도 안 먹었냐... 네가 차려 먹어."
[아, 그냥 기미정네 가서 먹을래. 2시간만 버티면 되니까.]
"그러든지."
나는 길을 걷다가 몸에서 나는 좋은 냄새에 흠칫했다.
'어제랑 또 교복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향이 달라졌는데... 재희는 또 개처럼 냄새 맡겠지.'
어제는 박슬기네 집가서 교복을 빨았다. 교복 냄새를 신재희에게 들켜서 '나예성네서 교복을 빨았다'고 변명했다.
오늘은 소희정네서 교복을 빨았다. 두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세제나 섬유유연제가 다르다보니, 어제처럼 신재희한테 '나예성네 섬유유연제'라고 속이기 뭐했다.
'장군님?'
난 습관처럼 그녀를 찾았다.
그러고서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장군님한테 엄청 의존했었다는 걸.
핸드폰이 지잉, 하고 진동했다.
장군님의 톡일 것 같았다.
(알 수 없음) [지나가는 여자 뒤에서 고추 꺼내봐]
"허..."
(알 수 없음) [내 도움을 받고 싶은 거 아니야? 네 여동생이 네 교복 냄새를 맡지 않도록 해줄게]
이제 더 이상 공짜는 없다는 것일까.
장군님이 보낸 톡방은 내 대답을 기다리는지 바로 꺼지지 않았다.
난 입력칸을 터지해서 답톡을 보냈다.
(나) [이 주위에 CCTV나 차 블랙박스 녹화 중인거 있나 확인 좀요...]
(알 수 없음) [없어]
이 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재개발을 앞둔 지역인데다가 겨울이기까지 했으니.
그런데 때마침 20대 초반의 여자가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길가에서 핸드폰을 보고 서있던 날 쳐다봤다. 여대생인데 겨울방학이라 데이트 가는 것일까. 진한 화장에 짧은 치마, 검은 스타킹 조합이었다.
그녀는 내 외모에 홀린 듯, 앞으로 걷는 와중에 고개가 내 쪽으로 고정됐다.
그러다가 더 이상 목이 돌아가지 않자,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에 걸어가는 여자 말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얼른 교복바지와 팬티를 내려 야외노출을 해버렸다. 추운 겨울 공기에 고환이 쭈그라들었다.
일탈했다는 것에 대한 배덕감에 쿠퍼액이 한줄기 주륵 흘러내렸다.
내가 이상한 짓을 한 기척을 느낀 것일까. 그녀의 고개가 뒤로 돌아오려고 했다. 나는 얼른 허리를 틀어 공개시켜둔 자지를 감췄다.
'됐죠, 이젠?'
(알 수 없음) [ㅋㅋㅋ ㅇㅇ]
(알 수 없음) [근데 방금 쟤 살색 보이긴 했나봐]
(알 수 없음) [진짜 살색 본 건데, 믿기지 않아서 그냥, 헛 것을 봤나 하고 넘어가네 ㅋㅋㅋ]
"후우..."
일단 신재희에게 교복에서 나는 향으로 지적받게 될 상황은 면한 것 같았다.
'앞으로도 계속 장군님한테 도움을 받으려면, 볼 거리를 제공해줘야하는 건가...'
여태까지 무상으로 도와준 건, 자신의 능력을 맛보기로 보여준 것 같았다. 미끼 상품 같은 것.
이쪽 세계로 넘어온 뒤로는 내가 여자들에게 떠받들리기만 했지, 여자의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해야하니까 되게 어색했다.
우리집은 소희정의 집과 별로 멀지 않았다. 걸어서 5분 정도였다.
금방 집에 도착한 나는 남의 집이 아닌 '우리집'에 도착하자 마음이 편해지는 것에 피식했다.
방에 들어와보니 신재희는 롤을 하고 있었다. 저 게임이 그토록 재밌는 걸까... 맨날 볼 때마다 롤을 하고 있었다.
"재희야, 기미정네 갈 거지?"
"어."
장군님의 덕분인지, 그냥 롤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건지. 신재희가 내 교복 냄새를 확인해보는 일은 없었다.
아직 기미정네 갈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사복으로 환복부터 하고 큰 베개 하나에 기대앉았다. 핸드폰을 꺼냈다.
김하늘에게 전화해볼까 하다가 혹시 안정을 취하고 있거나 하는 도중이면 민폐니까, 톡을 보냈다.
(나) [괜찮아? 손 잘 치료했어?]
그런 다음에 유튜브 영상을 보며 시간을 떼우자니, 김하늘로부터 답톡이 왔다.
김하늘 [사진을 보냈습니다.]
그녀가 보내온 사진은 네 손가락을 함께 붕대를 감은 사진이었다.
배경으로 찍힌 것은 침대 시트였다.
김하늘은 치료를 마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자거나,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던 듯했다.
나한테 빠른 연락이 없었던 걸 보면 아마 잤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이상했다. 평소의 김하늘은 내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치료가 잘 됐다는 사실 알려주려고 했을 테니까.
(나) [괜찮아?]
내가 다시 안부를 묻자 김하늘은 느릿하게 답톡을 보내왔다.
김하늘 [짐 한손으로 타자침]
(나) [붕대 감은 손도 걍 엄지 사용하면 되잖아]
이번에 아까보다 빠른 답톡이 왔다.
김하늘 [아 그러네 ㅋㅋㅋ ㅋㅋ ㅋ]
(나) [웃는 거 보니 괜찮은 모양이네]
김하늘 [아놔 ㅋㅋ 내 뼈는 처음 봐서 놀랐다구]
나도 사람의 뼈가 드러난 건 맨눈으로 처음 봤다.
떠올리는 것만 해도, 움찔하게 되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김하늘 [지금 너희 집 간다~]
김하늘은 기어코 기미정의 집에 따라오려는 모양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김하늘의 동행이 좋았다.
기미정이 신재희 뿐만 아니라 김하늘의 눈치를 봐서, 이상한 짓을 하지 않겠지.
(나) [ㅇㅇ 와]
김하늘 [혼자임?]
(나) [동생 있어]
김하늘 [아 걔 쫓아내 ㅋㅋ]
(나) [(만두가 인상을 찌푸리는 이모티콘)]
/ / /
김하늘은 킥킥 웃었다. 그저 신재준과 톡을 나누는 것뿐이고 별로 웃긴 얘기도 안 했는데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역시 재준이는 귀여워.'
그녀는 웃음을 짓다가 말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내가 계속 연락을 안 해서 걱정했겠지?'
처음에는 신재준이 걱정할까봐, 치료를 다 끝마쳤다고 바로 말하려고 했으나 멈췄다.
오늘 신재준이 했던 '친구 선언'이 괘씸해서 좀 걱정하게 만들어봤다.
'하루 종일 내 생각했을 거야. 후... 그렇게 생각하니 꼴리네.'
김하늘은 핸드폰 앨범 어플을 뒤적거렸다.
사진 한 장을 터치해 크게 키웠다.
교실에서 공부 중인 신재준의 옆얼굴 사진이었다.
공부에 열중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멋졌다. 또한 귀엽고.
김하늘은 붕대 감은 손을 아랫배에 올렸다.
첫 경험 때, 신재준의 소중한 씨앗들이 들이닥쳤던 그 부위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