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봄개학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선생님들은 각자의 컴퓨터로 사적인 일을 하기에 바빴다.
우리는 담임선생님의 자리로 갔다. 그녀는 HTS 프로그램의 주식 차트을 심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
그녀는 내 부름에 헐레벌떡 HTS 프로그램을 최소화시켰다.
"어, 어? 무슨 일... 헉. 김하늘, 너 손 왜 그래?"
"얘가 바보 같이 실수로 벽을 때려가지고 그래요."
나는 김하늘이 안타깝기도 하면서, 미련함이 짜증나 툴툴거리듯 말했다.
"야... 바보라니..."
"에효. 하늘이, 너 병원에 가야겠다. 마침 나 수업 없으니까 선생님 차 타고 가자."
그녀가 컴퓨터의 전원을 끄더니 지갑과 자동차 스마트키를 챙겼다.
"재준이, 너는 교실로 돌아가있고."
"네."
김하늘은 선생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도 갈 거다."
"뭐?"
"기미정의 집. 치료 받고, 나도 같이 갈 거야."
"아, 그래."
김하늘은 손이 저 모양이 됐는데도 기미정의 집에 동행하고 싶어했다.
'내가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재희랑 같이 가는 건데. 그래도 불안한가...'
김하늘에게 의부증 비슷한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 폰 검사를 시도한 것을 보니까 이전보다 더 심해진 듯했다.
'하늘이에 대한 미래시가 없는 게 아쉽네.'
'그 녀석'은 원래 세계에서 신재연과 신재희, 그리고 모친인 신연주에게만 당했을 뿐이었다.
김하늘과 소꿉친구 관계는 맞았는데,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고 사이가 친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성적으로 당한 것도 없었다고.
'그러고 보니 언제 한 번 태연시 가서 따먹혀봐야 하는데. 오석준의 집을 이용해야지. 봄 방학 시작되면 가야겠다.'
봄 방학까지는 멀지 않았다. 이번주만 다 보내면 방학 중 보충수업 기간이 끝이 났다.
난 교실로 돌아가서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톡을 하는 소희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검지를 세웠다.
소희정은 내가 다가왔음을 눈치챘고, 이번엔 당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내 손이 올려져있지 않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뭐야. 나 왔는지 알았어?"
"어. 김하늘은 뻘짓하다가 병원 갔나?"
"봤어?"
"알려주셔서..."
소희정의 말에는 주어가 빠졌지만, 누가 알려주셨는지 알 것 같았다.
'장군님이 알려줬나보네. 내가 장난 걸려고 한 것도 장군님이 알려줘서 회피한 건가.'
나는 소희정의 옆자리, 즉 지금은 비어버린 김하늘의 자리에 앉았다.
남의 자리에 앉으니 보이는 시야가 달라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 맞다. 너 어디까지 들었어?"
나는 소희정이 내 성벽을 장군님이나 무당 아저씨을 통해 알게 됐는지 모르는 지 궁금했다.
"응? 아..."
소희정은 내가 뭘 물어본 건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종이 울렸다. 4교시의 시작이었다.
소희정이 내 성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안 들으면 수업 내내 그게 신경쓰일 것 같았다.
"잠깐만."
나는 내 책상으로 가서 다음 수업 때 쓸 교재와 공책, 필기구를 챙겼다.
엎드려 자고 있던 나예성이 그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졸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뭐야? 이동 수업이야?"
"나 이번만 하늘이 자리에서 수업 받으려고."
"응? 그럼 김하늘이 내 옆으로 오는 거?"
"걔 병원 감."
"갑자기? 왜?"
"손 크게 다쳐서."
"허. 어쩌다가 그랬대?"
"장난치다가 벽을 세게 쳤다가 뼈까지 드러남."
"헐. 사고쳤구만."
사실 김하늘이 장난치다가 그런 건 아니고, 내가 한 '친구 선언'에 빡쳐서 그런 거였다. 그걸 사실로 말할 수는 없으니 대충 둘러댔다.
소희정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내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자, 그녀는 괜히 책상에만 시선을 집중시켰다.
나는 공책을 펼쳐다가 옆으로 밀어, 그녀의 책상을 조금 침범하게 만들었다.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하자?"
이제 곧 수업이 시작되니 필담하자는 얘기였다.
"어? 응..."
마침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옆에 자는 애들 좀 깨워. 자, 좀만 버티자. 지금 시간만 끝나면 집 가잖아."
수업이 시작됐다.
보충수업, 어차피 1학년 때 배운 것의 복습일 뿐더러 학생들이 학습 받을 의욕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도 의욕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은 선생님이 교재의 해설지를 읽어줄 뿐인 상태에 이르러있었다.
지금 수업은 듣지 않아도, 나중에 교재를 혼자 풀어보면 될 것이었다.
난 샤프로 공책에 적었다.
[나에 대해서 뭐라고 들었어?]
소희정이 내가 적은 것을 읽고 샤프를 움직였다.
[널 많이 좋아하신다고 들었어]
주어는 생략됐지만, 장군님이 날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겠지.
[그것 말고는 없어?]
[없어.]
그렇다면 안심이었다. 내 성벽에 대해서는 전해듣지 못한 모양이니.
그리고 무당 아저씨는 내가 장군님한테 기 빨린 것임을 알려줬을 때, 소희정을 방으로 보내놓고 나에게만 말했었다. 굳이 소희정을 듣지 못하게끔 했던 걸 보면, 내가 장군님한테 기 빨렸다는 걸 알리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소희정은 장군님이 나한테 성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거, 모르고 있겠네? 소희정한테 따먹히는 재미, 제대로 볼 수 있겠다.'
[아침조회 시작되기 전에, 나보고 너희집에 오라고 했잖아? 왜?]
아침조회 시작 전에, 소희정에게 집 초대를 받았다.
난 장군님이 날 맛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거니 싶긴 했으나, 소희정에게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었다. 무슨 이유가 튀어나올지 궁금했다.
[오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들었어]
[내가???]
[ㅇㅇ]
소희정의 집에 찾아가지 않으면 큰일난다, 라.
'농담으로 하신 걸까. 아님 진담으로 하신 걸까.'
[언제까지 가야 돼?]
[가능한 빨리?]
나는 시간을 가늠했다.
'오후 6시까지만 기미정네 가면 되니까, 여유롭게 5시까지는 시간 잡으면 되겠는데.'
[오래 걸려? 가서 뭐하는데?]
'가면 장군님한테 또 꿈속에서 기 빨릴 것 같은데... 흠.'
나는 소희정네 가면 뭘 하게 될지 짐작갔지만 모르는 척했다.
[글쎄... 나도 잘... 근데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 하시네]
[그래? 근데 너, 왜 처음에 안 말하려고 했어?]
소희정은 나한테 자기 집으로 오라고 말하길 어물쩡거렸었다. 내가 재촉해서야 말했다.
[이유도 제대로 대답 못하는데, 너한테 또 오라고 하기 뭐해서... 네가 우리집에서 이상한 현상을 겪기도 했고]
15인분 이상의 식사를 나 혼자 단시간 내에 해댄 그 이상현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 너희 집 안 가면 나한테 큰일 난다며]
[그렇긴 한데...]
[나한테 큰일 났으면 좋겠어?]
[아니;;]
소희정이 점을 4개 찍으며 세미콜론 2개를 만들어냈다.
[ㅎㅎ 농담이고. ㅇㅋ 갈게]
[ㅇㅋ]
나는 지우개로 소희정과 나눴던 필담을 지웠다.
그리고 보충수업의 수업을 들어보려다가, 흥미가 떨어지고 피곤해져서 그냥 잘까 싶었다. 다른 애들처럼.
다른 애들이 꿀 빨고 자고 있는데, 나 혼자 깨어있으니 뭔가 혼자 꿀 못 빠는 것 같아 손해보는 기분이었다.
'아, 이번 시간에는 소희정이나 가지고 놀면서 시간을 보낼까?'
나는 고개를 옆으로 엎드려서 바로 옆자리의 소희정을 관찰했다.
슬렌더한 체형이었지만 흉부의 굴곡은 만져보고 싶은 욕구를 일으켰다.
소희정의 얼굴을 자세하게 살피니 눈썹이 굵었다. 기강을 잘 잡을 듯한 스타일의 얼굴. 여군으로서 잘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아... 장군님 닮은 느낌이다.'
여태껏 장군님의 얼굴을 본 적은 소희정의 방에서 낮잠을 잤을 때, 그분이 내 자지를 빨았을 때 뿐이었다.
꿈속에서는 '여군 스타일의 미녀다' 싶었다가도, 꿈을 깨는 순간 기억이 상당히 증발해 버려서 장군님의 얼굴을 거의 잊고 말았다.
그래서 모르고 있었는데, 지금 소희정의 얼굴을 가까이서 살펴보니까 꿈에서 봤던 장군님의 얼굴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소희정의 고개가 내쪽으로 돌아오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컨택을 3초도 버티지 못하고, 소희정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나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짤이 기억났다.
나는 공책을 다시 펼쳐서 한 문장을 적고, 소희정에게 보라고 공책을 밀었다.
소희정은 내가 적은 문장을 눈으로 읽었다.
[이제야 여길 보네]
4교시가 끝나고 종례까지 끝나자 하교를 할 수 있게 됐다. 나예성은 급한 볼 일이 생겼다며, 나와 소희정을 내버려두고 빠르게 뛰쳐나갔다.
'데자뷰인가.'
예전에 소희정네 집에 놀러갔을 때에도, 나예성은 먼저 떠났었다.
나는 소희정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다가 물었다.
"또 장군님이 장난치신 거야?"
"그, 글쎄."
"저기, 희정아? 내 쪽 좀 똑바로 보고 말해줄래??"
"어? 어..."
내가 소희정의 앞에 서려고 하면, 그때마다 그녀가 고개를 자꾸 딴곳으로 돌렸다.
"너 왜 그래 갑자기?"
소희정의 눈으론 내 얼굴이 '오석준'의 얼굴이 섞여보인다고 했다.
'오석준'의 얼굴에 빠져서 날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이전에는 '신재준'에게 좋아하는 마음 없는가 싶더니 지금은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날 좋아하게 된 이후로도 소희정은 날 제법 편하게 대했다.
지금, 소희정이 보이는 날 똑바로 바라보지 않은 반응은 좀 갑작스러웠다. 소희정의 얼굴이 새빨개졌고, 계속 식은땀을 흘렸다.
'갑자기 왜 이러지? '이제야 여길 보네' 장난 때문에 내가 더 좋아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