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봄개학
1교시가 끝난 뒤, 쉬는 시간에 7반으로 향했다. 아침에 그랬듯 소희정과 김하늘과 함께.
7반 앞에 도착했다. 7반의 광경을 보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7반은 쉬는 시간인데도 조용했다.
남자애들은 그나마 대화를 하고, 웃기도 하는데. 여자애들은 누가 시킨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7반의 뒷자리에 기미정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팔과 다리에 깁스한 여자애가 기미정 뿐일 테니 헷갈리지 않았다.
이 교실이 조용한 이유를 짐작컨대, 여전히 기미정이 기강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일진 관둔다면서? 관둔 거 맞아?'
김하늘은 당당히 7반으로 들어갔다. 7반의 여자애들이 기미정에게 다가가는 김하늘을 보고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건들면 안 되는데.'하는 표정이었다.
"야, 기미정."
김하늘의 부름에 기미정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온통 울긋불긋 멍투성이였다.
"키킥, 푸하하! 너 꼴이 그게 뭐냐? 아, 개 웃기네."
"아놔... 김하늘, 뒈질래?"
기미정이 졸린 눈으로 김하늘을 노려보다가, 교실 뒷문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서있던 나를 쳐다봤다.
"재준아, 무슨 일이야?"
"할 말 있어서."
"들어와, 들어와."
난 그녀가 복도 밖으로 나오기 불편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남의 교실에 들어갔다.
내가 소속되지 않은 교실에 들어가는 건, 뭔가 기분이 불편해지는 게 있었다.
나는 7반 교실을 둘러봤다.
처음에 김하늘이 기미정을 깨우자 뜨악했던 애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쪽을 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재희랑, 하늘이랑 같이 가려고. 그 너희 아버님이 초대해준 거."
"김하늘도?"
내 말에 기미정이 되물었다. 김하늘이 톡 쏘듯 말했다.
"왜 안 되냐? 그리고 너 아침에 내 전화 씹었더라?"
"너 꼭 와야겠냐? 우리 아빠가 너 안 불렀는데?"
"왜? 가면 안 되냐? 나 가면 반갑게 맞이해주실 것 같은데."
기미정은 입술을 다물고, 김하늘을 노려봤다.
김하늘은 기미정을 약 올리듯 싱글벙글 웃으며, 기미정의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하늘아, 기미정한테 시비 걸러 왔니?'
나는 둘 사이가 험악해지기 전에 끼어들었다.
"하늘이도 같이 가도 되지? 너, 하늘이한테도 잘못한 거 있잖아."
김하늘은 어쨌든 따라오려고 할 것 같았고, 기미정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기미정은 역시 내 부탁을 들어줬다. 그러고는 나에게 살갑게 웃으며 물었다.
"날짜는 언제가 괜찮아?"
'얘도 나 좋아하나?'
나한테 도끼병이 생겼나. 나한테 잘 보이려는 여자애들만 보면 그런 의심이 들었다.
"재희는 오늘도 괜찮대. 아, 하늘이 너는?"
"나도 오늘 괜찮아."
"그럼 우리 아빠만 오케이하면 되겠네. 물어볼게. 아마 오늘 된다고 할 거야."
오늘 식사 대접 받을 수 있는지는, 나중에 연락 받기로 하고 7반에서 나왔다.
7반에서 멀어지자 마자 김하늘이 툴툴댔다.
"기미정,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
나도 기미정이 날 좋아하나 싶은 생각을 조금 하긴 했으나, 그런 생각해본 척 했다.
"기미정, 걔 평소에 소개팅 자주 한다며? 그냥 남자애라면 그냥 잘 해주는 거 아닐까?"
"흐음, 나도 저 년이 소개팅 같은 거 잘 나간다고 들었긴 한데..."
김하늘이 말을 흐리자, 소희정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김하늘하고 기미정하고 싸움나는 줄."
"나도. 하늘아, 그렇게 환자를 이기고 싶어?"
"아니, 걔는 깁스해도 전투력 안 떨어진다니까? 오히려 깁스가 무기가 되면 됐지."
3교시가 끝났을 때에 기미정으로부터 톡이 왔다.
기미정 [오늘 오라고 하네]
기미정 [저녁 6시에 어때?]
(나) [ㅇㅋㅇㅋ]
나는 신재희에게 톡을 보냈다.
(나) [오늘 기미정네 ㄱㄱ]
(나) [6시까지 걔네 집에 가면 될 듯]
신재희는 수업시간인지 톡을 바로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교실을 둘러보았다.
'교실에 수면제 뿌려놨나?'
강력한 히터와 굳이 잠에서 깨우지 않는 선생님의 태도에, 교실에서 자지 않는 학생은 몇 없었다.
'이래놓고는 4교시만 딱 끝나면 팔팔해져서 시끄러워지겠지.'
나도 수업 도중에는 피곤했다가 4교시만 끝나면 정신이 상쾌해지긴 했다.
핸드폰이 진동하길래 확인해보니, 신재희의 톡이 올라오고 있었다.
신재희 [ㅇㅋ]
신재희 [잊고 있었는데 나 어제 월급 나왓더라]
(나) [올]
(나) [처음으로 일해서 돈 버니까 어때?]
신재희 [언니한테 로또 좀 사라고 해야겠음]
"흐흫..."
복권이라. 신재희가 복권으로 불로소득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걸 보니, 영화관에서 제대로 일을 했긴 한 모양이었다.
'복권, 시발... 20살 때부터 25살까지 사봤는데 로또 4등조차도 되어본 적 없었지.'
난 그래서 복권을 싫어했다.
원래 세계에서는 매몰 비용, 그러니까 회수불가능한 복권에 쏟은 돈을 당첨금으로 회수해내고 싶어서 끊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는 복권 시작하지도 말아야지.'
어차피 당첨되지 못할 게 뻔했다.
핸드폰이 또 한 번 진동했다.
정수린 [오빠... 저 언제까지 오빠 못 봐요...?]
'장군님이 위기신호 보내주실 때까지 안 볼 거란다.'
나는 정수린의 톡을 팝업 메시지로만 확인하고, 그녀와의 톡방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신재희와의 톡방에서 톡 메시지를 올렸다.
(나) [너 첫 월급 받았잖아]
(나) [누나한테 내복 선물해]
신재희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선물이 되겠네]
신재희의 말이 공감돼서 나는 피식하고 말았다.
이 추운 겨울에 집에서 보일러를 꺼두고도 팬티바람으로 지내는 신재연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내복 선물은 적절하지 못했다.
(나) [손목시계라도 선물해]
'신재준'이 작년에 알바해서 번 돈으로 신재연에게 지갑을 선물한 상태였다. 가끔 보면 신재연은 그 지갑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갑이나 손목시계 모두 신체 가까이에 두고 쓰는 도구였다.
신재희 [ㅇㅋㅇㅋ]
"재준아."
김하늘이 내게 다가왔다.
"응? 왜?"
"잠깐 나랑 얘기 좀."
"그래."
웃고 있길래, 난 따로 긴장 안 하고 복도로 따라 나갔다.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애들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서 싸움 났다고 소문이 나야 떠들썩해지는 겨울철의 복도였다.
"따라와."
"응?
김하늘은 웃고 있던 얼굴을 싹 정색하더니 내 손목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보지가 간지러워졌나? 왜 이리 급하지?'
저번처럼 기숙사 겸 식당 건물로 데려갈 줄 알았더니 그러지는 않았다.
인적이 드문 학교 뒷편. 그녀가 비릿하게 웃더니 내 볼을 꼬집어 당겼다.
"누구랑 톡하길래 그렇게 좋았어?"
"아, 놔라."
힘을 주지 않아도 살이 집혀서 당겨지는 건 아팠다. 내 뺨을 잡아늘리던 김하늘의 손을 떨쳐내고 대답했다.
"재희랑 한 건데."
"보여줘."
"뭐? 톡 나눈 거 보여달라고?"
"어."
난 미간을 찡그렸다. 이 핸드폰은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톡을 보여줄 수 있긴 했지만, 핸드폰 검사를 한 번 허락하면 계속 검사하려고 굴 것 같아 허락할 수 없었다.
"하늘아, 선 넘지 마. 아란이 누나도 안 하는 폰 검사를 네가 하겠다고?"
으득.
김하늘이 이를 갈았다.
'네가 화나면 뭐 어쩔 건데.'
나에겐 장군님이 있었다.
"나랑 너랑 떡치는 거... 맨날 '우정 섹스'한다고 하지만, 나 결국 네 세컨이지 않냐?"
"하아... 우린 그냥 친구야."
"봊 같네, 시발!"
김하늘이 그렇게 말하더니 산방지턱의 벽을 주먹으로 힘껏 갈겨버렸다.
진심으로 빡쳤는지 풀파워였다.
'병신인가...'
벽과 부딪친 김하늘의 오른손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김하늘을 오른팔을 늘어뜨렸다. 밑으로 내린 손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하늘아, 손 좀 봐봐."
내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들어올리려고 하자, 그녀는 팔을 휘둘러 한 번 튕겼다.
"걱정돼서 그래. 좀 봐봐."
내가 그렇게 사정해서야 팔에 힘을 뺐다.
김하늘의 손허리와 맞붙어 있는 손가락뼈가 보였다. 피부를 찢어져 뼈가 하얗게 드러나있었다.
"아씨..."
보는 내가 오금이 저리도록 아파보였다.
"당장 병원가자."
"이 정도면 그냥 빨간약 바르면 나아."
"너 병신이야? 뼈가 드러났는데, 무슨 빨간약을 발라. 바르긴."
"뼈가 드러났다고...?"
아, 그랬다. 김하늘은 벽에다가 진심 펀치를 날린 다음에, 손에 난 상처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팔을 늘어뜨렸었다.
"자, 장난이지?"
"하아... 봐봐."
난 그녀의 손을 위로 슬쩍 들었다.
그제야 김하늘이 자신의 손 상태를 확인했다.
"헐..."
"에휴... 따라와."
'양호실... 닫았겠지. 양호선생님 방학이라 안 나왔을 테니. 그래도 가볼까.'
"양호실 가보고, 닫았으면 교무실 가자. 선생님한테 차 태워달라고 하게. 아, 그리고 이거 쥐고 있어."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갈색체크무늬의 손수건이었다. 김하늘의 상처 부위에서 피가 계속 새어나와 그녀의 손과 팔을 적시고 있어, 피를 흡수해줄만한 게 필요했다.
그녀가 손수건을 쥐자, 줄줄 흐러던 피가 손수건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거 더러워져도 돼?"
"괜찮아."
'아란이가 선물로 준 건데... 쓸 일에 쓰는 거니까.'
나는 김하늘을 데리고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교무실과 같은 층에 양호실이 있었는데, 양호실이 가까웠고, 응급처치 할 수 있으면 하려고 여길 먼저 찾아왔다.
"이런. 닫았네."
"재, 재준아. 내 손 고쳐지겠지?"
"당연히 고쳐지지, 멍청아. 에혀..."
왜 분노 조절을 못 해가지고 스스로를 다치게 만드나.
나는 김하늘이 걱정되면서도, 김하늘의 미련한 행위에 짜증이 났다.
그녀를 교무실에 데리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