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봄개학
신재준은 여자 무서운 줄 몰랐다. 그리고 마음이 약했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기미정을 집에 들여보내주고, 쉽게 부축도 해주고 그런 것이겠지.
맨날 겉으로는 센 척하지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억지로 두르고 있는 허장성세에 불과했다.
외모부터가 수많은 여자들을 매료시켰는데.
신재준을 더 잘 알게 되면, 신재준의 그러한 갭을 알게 될 테고. 그 갭은 여자들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사로잡을 것이었다. 그를 보호하고 싶게끔 만들었다.
또한 항상 여자들을 몰고 다니는 꼴을 보면, 어디 한 곳에 가둬서 독점하고 싶게끔 만들었다.
'하아... 단독주택 하나 사고, 그 지하에 감옥 만들어다가 재준이 가두고 싶네, 시발.'
그 상상에 기미정은 아랫배가 부르르 떨렸다.
'우리 재희도 가두고. 그럼 사회에서 동성애자라고 손가락질 받을 필요도 없을 거잖아? 개좋네.'
그녀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깁스를 한 정강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오른손의 네 손가락을 잡고 있는 반깁스도.
손가락은 붕대를 풀어서 씻을 수 있는데, 다리의 깁스는 풀지 못해서 짜증났다. 간지럽기도 하고, 냄새가 나기도 했다.
깁스가 물에 젖으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오늘처럼 재수없게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함박눈이 쏟아지면 봊 됐다. 악취와 곰팡이, 피부에 습진이 생길 수 있다고 들었다.
아픈 건 둘째치고, 깁스가 젖지 않게 신경쓰는 게 짜증났다. 다리가 간지러운데 긁지 못하고 참아야하는 것 역시 짜증났고.
'이름이 뭐더라? 신재준의 누나, 그 시발년... 날 이 꼴로 만든 대가로 네 동생들이 어떻게 되나 지켜봐라.'
/ / /
"아, 시발. 갑자기 비 볼라 오네."
안유리는 친구들과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에 미간을 좁혔다.
"야. 나 집 간다. 너희끼리 놀아라."
"아, 왜. 너 빠지면 3:3 미러전 못한다고."
"미안미안."
그러고서 안유리는 집으로 빨리 걸어갔다.
비를 맞으면서 갔다. 이미 교복이 젖기도 했고, 우산 가격이 너무 비쌌기에 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집에 쌓여있는데 뭣하러 사나, 심정이었다.
젖은 교복이야 하루 동안 선풍기 쐬게 해두면 다 마를 것이고.
핸드폰을 들었다. 비에 젖어도 생활방수가 된다니까 괜찮겠지.
동생 중에 나이가 1살 더 많은 안유진에게 전화 걸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언니, 왜?]
"너 집이냐? 장패드 밖에 널어놨는데. 안에 좀 들여놔."
마우스 장패드를 사뒀다. 그런데 공장 냄새가 많이 나서 바깥에 널어뒀다. 젖은 빨래도 아니니까 겨울에 바깥에 내놔도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나 집 아닌데. 친구네서 노는 중.]
"아. 알았다."
그 다음에는 안유진보다 1살 어린 안유은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유은아, 너 집이야?"
[응.]
"베란다 보면 마우스 패드 긴 거 널려있거든? 그것 좀 안에 들여놔주라."
[알았어.]
"그리고 택배 하나 안 왔냐?"
[어? 아니?]
"알았다."
[언니, 지금 집에 올 거야? 나 배고파.]
"어, 갈 거야. 기다려."
[빨리 와~]
"휴..."
안유리는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아직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 중요한 택배가 올 것임을 아까까지 까먹고 있었다.
문자함을 보니, 오늘 12시~16시 사이에 택배가 도착할 예정이라는 문자가 보였다. 아침에 확인했는데 방과후 시간인 지금에와선 까먹고 있었다.
'유진이나 유은이한테도 들키면 쪽 팔리지.'
신호등에 걸려서 걸음을 멈췄다.
옆에서 우산을 쓰고 있는 젊은 남자가 같이 기다렸는데, 그가 계속 안유리의 가슴을 힐끔거렸다.
그녀의 블레이저 안에 교복 조끼를 안 입었다. 비에 젖은 블라우스를 통해 빨간 브래지어가 비치고 있었다.
'내 빨통 빨고 싶나? 킥킥.'
안유리는 속으로 음침한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보행자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고 차가 멈추지 안유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고자 했던 이유가 장패드를 살리고자 했던 것이었다. 동생 안유은이 구한다고 했으니 급할 거 없었다.
속옷까지 모두 젖어 빨리 샤워를 하고 싶었다.
안유리의 집은 지은지 오래된 빌라였다. 따로 청소업자를 부른 적이 없어서 계단에 먼지가 쌓여있고, 껌딱지가 검게 변색돼 붙어있기도 했다.
각 가구의 현관문에는 열쇠집 스티커와 인터넷 광고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오늘 누군가 짱개라도 시켜먹었는지 짱개 광고지가 현관문마다 붙어있었다.
자신의 집인 5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의 꼭대기층. 매일매일 계단 오르내리기 운동을 하게 되었다.
'오, 쉣. 왔네?'
송장의 '택배 요청 메시지란'을 살폈다. 거기에는 '초인종 누르지 마시고, 현관문 앞에 놓아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안유리는 그 상자를 들었다. 무겁지 않았지만 다소 무게감이 느껴졌다.
현관문을 조용히 열었다.
거실 컴퓨터에 앉아 카트라이더를 하는 안유은이 보였다.
아직 10살 밖에 안 됐는데 게임 실력이 제법이었다. 드리프트가 끊이질 않고, 부스터도 무한하게 사용하며 내달리고 있었다.
안유리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현관문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을 밟을 때마다 철퍽거리는 젖은 양말이 불쾌했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일단 상자를 책상 아래 숨겨뒀다.
그제야 질척거려서 기분 나빴던 양말을 벗어버렸다.
"유은아."
"아, 언니 왔어?"
"장패드는?"
안유리는 거실 베란다 난간에 걸어뒀었다.
그런데 불투명한 베란다 창문 너머로, 장패드의 검은색 실루엣이 보이고 있었다.
"앗, 깜빡했다..."
"아오, 이 새끼가?"
"미, 미안해."
안유리는 두 주먹으로 동생의 양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악! 미, 미안하다니까!"
주먹을 떼자 안유은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안유리는 한숨을 내쉬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실시간으로 빗물에 젖고 있는 장패드가 보였다. 그것을 회수했다.
깨끗한 물에 대충 씻겨낼 작정으로 화장실에 던져뒀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에 들어갔다. 세 자매가 사는 집이라 집에서 브래지어는 따로 챙겨입지 않았다.
남자인 아빠가 있긴 했지만... 아빠니까 딱히 유두 가리개를 착용하는 매너를 발휘할 필요는 못 느꼈다.
화장실에 들어가 교복과 속옷, 양말을 세탁기에 돌려놓고 샤워를 했다. 그러고 나니 찝찝함이 싹 가셔 기분이 좋아졌다.
빗물에 젖은 장패드도 대충 물로 헹구고, 물을 털어 가지고 나왔다. 건조대에 말려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여동생 밖에 없으니 알몸으로 거실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상의는 노브라에 셔츠만 걸쳤다. 답답하게 옥죄이던 브래지어에서 해방되니 쾌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브래지어가 귀찮으면 안 입는 여자들이 많았다. 안유리도 그러고 싶었는데, 브래지어를 차지 않으면 가슴 모양이 망가진다는 얘기에 학교에선 사용하고 있었다. 유두가 상의에 쓸리는 기분도 별로고.
"유은아, 뭐 먹을래?"
"라면?"
"또 라면? 라면은 너 혼자 있을 때나 끓여먹어."
"그럼 집에 있는 거..."
"기다려. 아, 맞다. 유진이한테 전화해서 집에서 밥 먹을 거냐고 물어봐."
"응."
안유리도 사실 자극적인 맛인 라면이 땡겼다. 하지만 라면은 건강에 좋지 않았다. 영양분도 밸런스있지 못하고. 동생에게 좋은 걸 먹이고 싶었다.
안유은이 통화를 끝내고 말했다.
"친구네서 먹을 거래."
"그래?"
어젯밤에 아버지가 끓여둔 참치김치찌개를 데웠다.
밥을 푸고, 주말에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반찬들을 꺼냈다. 김치, 열무김치, 멸치볶음, 메추리알 곤약 장조림.
그리고 조미김을 하나 뜯어서 식탁에 올려뒀다.
"유은아, 밥 먹어."
"한 판만~"
"맞고 올래, 그냥 올래?"
"지금 갈게..."
안유은은 달리던 카트를 멈추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상차림을 보고 싫은 표정을 지었다.
맛있는 반찬을 먹고 싶은데, 그게 보이지 않자 싫은 표정이었다.
"언니, 계란해주면 안 될까?"
"그래."
프라이팬을 달구고 식용유를 부었다. 계란 2개를 깨뜨려 약불에 올려놓은 뒤, 다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안유은은 마음에 드는 반찬이 없는지, 조미김에 밥을 싸먹기만 했다.
"메추리알도 먹어. 맛있어."
"응."
안유리가 먹으라고 하자 그때 메추리알을 한 번 먹고, 다시는 안 먹었다.
"멸치 먹어야 뼈 튼튼해진다."
멸치볶음을 젓가락으로 잡아서 동생의 쌀밥 위에 올려놨다.
먹기 싫은지 안유은의 표정이 나빠졌지만, 결국 밥 숟가락으로 밥을 왕창 떠서 멸치를 함께 먹었다.
"나 국물만 말아 먹을래."
"그래라."
안유은은 국그릇을 기울이며 숟가락으로 건지가 떨어지지 않게끔 막았다. 밥그릇에 빨간 찌개 국물만 흘러들어갔다.
안유리는 다 만든 계란후라이를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렸다. 그리고 계란후라이 하나를 동생의 밥그릇 위에 올려줬다.
안유은은 반쯤 익은 노른자를 터뜨리고, 밥과 잘 비벼서 먹기 시작했다.
"잠깐만."
"응?"
안유리는 그 위에 조미김 하나를 갈기갈기 찢어서 올려주었다.
안유은은 조미김을 다시 섞고는 크게 떠서 먹었다.
"맛있다."
"많이 먹어."
안유리에게 있어서 안유진과 안유은은 동생이면서도 딸 같기도 했다. 동생들이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맞벌이했기에, 안유리가 어린 두 동생을 업어키웠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식사하는 걸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소리가 있었다. 안유리는 그걸 경험하고 있었다.
"언니는 안 먹어?"
"먹을 거야."
안유리는 속도를 높여 식사를 시작했다.
샤워하고, 식사 차려주느라 깜빡 잊고 있었는데 어서 빨리 택배 상자를 뜯어보고 싶었다.
안유은이 집에 있기에 그 안에 내용물을 사용하진 못할 테지만, 일단 그 실물을 눈으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안유은, 네가 치워."
"알았어."
안유리는 식사를 다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커터칼을 찾아 택배상자를 감은 테이프를 갈라버리고 그 안에 내용물을 꺼냈다.
에어캡에 몇 번이나 휘감겨 있었다. 에어캡 뭉치 안에 들어있는 상품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의 성기를 본뜬 살구색의 자위기구인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굉장히 큰 사이즈였다. 비현실적으로 큰 대물자지 딜도.
'하아... 결국 사버렸네.'
학교에서 신재준이 낮잠 잘 때, 보여준 발기 자지를 떠올려 결국 지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