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봄개학
"뭐래. 너 진짜 도끼병 심하다."
"흐음, 그렇다고 하자."
잠깐 생각해보니 박슬기가 도끼병이 생길만 했다.
원래 세계로 따지면 딱히 친하지 않던 여자가 남자의 집에 따라오란 얘기에 순순히 따라온 것이었다. 게다가 그 집에서 샤워까지 하고, 그 남자의 방에서 무방비하게 자기 까지.
'내가 계속 '잡아 먹어달라'고 굴긴 했구나...'
오히려 박슬기가 날 건들지 않은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박슬기는 성욕이 왕성한 나이였다. '신재준'은 어떤 여자라도 발정케 하는 외모를 지녔고.
그런 '신재준'이 '잡아 먹어달라'고 구는데 참은 걸 보면, 박슬기는 꽤나 인내심이 강한 듯했다.
'하지만 그토록 인내심 강했던 아란이도 날 따먹게 됐지.'
박슬기는 어떻게 요리할까.
마침 좋은 재료가 있었다.
고의인지, 실수인지, 어쩔 수 없던 거였는지 모르겠으나, 가정부 아저씨가 주신 재료였다.
나는 박슬기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너 밥 먹고 바로 자면 살찐다?"
"걱정마, 살 안 찌는 체질이라."
"그렇긴 한 것 같네 너 엄청 가볍더라. 불 꺼줄까?"
"끄지 마. 어차피 금방 일어날 거라."
"그래."
앞으로 내가 보여줄 것은 박슬기가 잘 봐야했다. 그러려면 불을 켜두는 게 좋을 듯했다.
'1... 2... 3...'
나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597... 598... 599... 600.'
나는 잠결에 발기한 것처럼, 좀 전에 본 박슬기의 엉덩이 밑살과 팬티를 떠올렸다.
난 대충 10분 동안 뜸을 들였다. 그리고 잠결에 더워서 그런 것처럼 이불을 치워버렸다. 마침 그녀의 방이 데워져 더운 편이기도 했다.
미끼를 던졌다.
박슬기가 아무리 인내심이 강하더래도, 노팬티 상태의 대물자지가 바지부터 셔츠까지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노라면 넘어오게 될 게 틀림없었다.
박슬기는 배그를 하는 듯 키보드와 마우스 클릭 소리, 그리고 헤드셋에서 새어나오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물고리를 낚는 강태공의 심정으로 느긋하게 기다렸다. 조바심 가지면 될 것도 안 된다.
"하아... 시발. 핵쟁이 새끼들, 아오."
박슬기는 핵을 사용하는 유저한테 당해서 죽게 된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핵 사용자를 만나 죽어서 화가 났을 텐데. 설마 내가 뒤에서 자고 있는 걸 신경써서 그런 걸까. 매너가 있었다.
'게임 끝났으니 슬슬 날 뒤돌아보겠지?'
마우스의 소리도, 키보드의 소리도. 모두 조용해졌다.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웅장한 느낌의 BGM만 계속 되었다.
'게임 안 하고 있는 거 보니... 날 쳐다보고 있나?'
집도 좋고, 공부도 잘 하고, 외모도 반반한 여고생이 내 자지를 바라보며 흥분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자지가 한층 더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박슬기의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오. 온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박슬기의 행동을 기대했다.
박슬기는...
이불을 잡아서 내 목 아래까지 덮어주었다.
'최아란 과인가... 줘도 못 먹네.'
* * *
교복 세탁 및 건조가 완료됐을 즈음, 바깥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참 변덕스럽네요."
"저, 교복 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놀러와요. 아가씨가 친구 데리고 오는 거 처음 봐서 기뻤어요."
"아, 네."
나는 가정부 아저씨의 말에 대충 긍정했다. 그런데 박슬기는 부정하고 나섰다.
"얘, 내 친구 아닌데요."
"그럼 역시 친구가 아닌 애인?"
"아, 아니라고요... 야, 가자."
"배웅 안 나와줘도 되는데."
"누가 네 배웅간댔냐? 편의점 가려고."
"그러냐."
장우산을 펼쳐들고 밖으로 나갔다. 투두둑 하고 쏟아지는 눈이 우산을 때렸다.
"정원 예쁘네."
그새 쌓인 눈이 정원을 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하아..."
입김을 불자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뭐야. 담배 피는 흉내내냐?"
"그냥 아무 생각없이 입김 분 건데."
"담배 빌려줄까? 펴볼래?"
"왜? 너 취향이 담배 피는 남자냐?"
"그런 건 아닌데."
박슬기와 함께 정문을 나섰다.
기울기가 높은 언덕길도 얇게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미끄러울 수 있으니까 조심해라."
딱 봐도 방심하면 원치 않아도 썰매를 타게 될 삘이었다.
"계단은 없냐?"
"없어. 그런 거."
우린 조심조심하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너 안 춥냐?"
그녀는 집에서 입던 거에 외투만 걸치고 나왔다. 아래는 돌핀팬츠를 입고 있는데, 돌핀팬츠가 외투에 가려져서 하의실종 패션이 되어있었다.
"그닥."
언덕길에서 다 내려왔다.
"그럼 가라."
박슬기는 나한테 가라고 손짓해보이더니 외투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편의점 간다고 하더니. 집 밖에 나온 원래 목적이 담배 피우려던 것인 모양이었다.
'얘 꼬시려고 담배 배울까? 맞담배 피면 더 가까워질 지도. 에이... 뭣 하러, 그렇게 까지 해. 차근차근 꼬시면 되겠지.'
난 박슬기와 헤어져서 집으로 향했다.
길을 걷다가 몇 번이나 눈에 덮어져서 보이지 않던 빙판에 넘어질 뻔했다.
'아, 시발. 조심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진짜 장군님이 나 보고 박슬기 꼬시라고 기회준 건가? 이번에 걔네 집에서 딱히 '위험할 뻔한 걸 막은 짓' 같은 건 안 한 것 같은데... 아, 맞다. 대답을 못 들었네.'
신재연이 기미정을 이길 만큼 세니까, 그런 신재연한테 혼나기 싫으면 신재희를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그 경고를 받은 박슬기로부터 '안 괴롭힐 거다', '계속 괴롭힐 거다' 등의 대답을 못 들었다. 가정부 아저씨가 빨리 밥 먹으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말이 끊겼었다.
'어쩌지. 일단 재희한테는 말해둬야겠다. 당분간 또 백호수, 그 여자랑 붙어 다니라고.'
아니면 지금이라도 박슬기한테 돌아가서 확답을 받을까?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혹시 장군님의 힌트인가?
아니었다.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는데 핸드폰에 뜬 발신자는 [시발년]이었다.
바로 기미정이었다.
'잘 됐네. 애한테 말해서 신재희 못 건들게 조치 취하면 되겠다. 아, 그런데 일진회 나간다고 했었는데... 흐음, 아직 안 나갔겠지?'
"어, 왜."
[내 아빠한테 내가 너희한테 잘못한 거 말했어.]
"...그래?"
[하여튼 그러자니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네.]
"됐어."
[부탁할게. 좀 와주라... 내 아빠가 너희한테 미안해서 계속 신경쓰고 계셔.]
오늘은 이 여자, 저 여자한테 집 초대를 받는 날인 듯했다.
"흐음..."
위기 레이더인 장군님이 아무 것도 느끼게 해주지 않는 걸 보니, '함정' 같은 거는 아닌 모양이었다.
'기미정... 얘한테 따먹힐 생각없었는데 그때 보여준 나약해준 모습 보니까... 좀 동하긴 했지. 얘한테도 따먹힐까?'
난 기미정을 꼬시기 위해 그녀의 집 방문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바로 가겠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일단은 대답을 보류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 재희한테 한 번 물어보고."
[그래, 알았다. 그럼 끊을게.]
"야."
[응?]
"너 일진회 나간다며. 나갔냐?"
[아직. 몸이 낫고 나서 나가게. 그래야 보복해오는 거에 대응할 수 있으니까.]
"아, 그러냐. 마침 잘 됐다. 너 우리 누나 무서운 것 좀 일진 애들한테 알려."
[...왜?]
기미정의 대답이 좀 늦었다. 자신이 신재연에게 졌다는 걸 알리기 싫은 걸까. 자존심 상해서?
"박슬기한테 들었는데. 일진 애들이 재희를 건들지 않은 이유가 백호수, 그 여자랑 동행하니까 안 건든 거라며? 백호수가 성연고 일진 출신이라서. 재희가 일진들 때문에 아침마다 백호수랑 동행하는 헛짓거리 하는 거, 더는 보기 싫다. 그러니까 우리 누나 세다가 알려. 그럼 재희 못 건들겠지."
[박슬기, 그년이 너한테 그렇게 알려줬다고?]
기미정은 내 부탁의 내용보다, 내가 박슬기한테 정보를 얻은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어."
[너희 둘 원래 친했냐?]
"아니."
[근데 걔가 왜 그걸 알려줘?]
"몰라. 나한테 점수 따고 싶었나보지."
[하...]
"지금 나 비웃은 거냐?"
[아니...]
"어쨌든 알았냐, 몰랐냐? 나랑 재희한테 진짜 미안하다면, 우리 누나 무서운 거 일진 애들한테 알려라. 그래줄 거지?"
[후우... 알았다. 말할게.]
"그래, 그럼 끊는다."
박슬기한테 요구했다가 대답을 못 들어서 답답했던 거.
더 확실하게 내 요구를 수행할 수 있는 기미정에게 확답을 받았다. 그러자 속이 시원해졌다.
/ / /
기미정은 일방적으로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박슬기가? 그년은 왜 또 시발, 재준이한테 앵기고 있는 거지?'
그녀는 자신의 방 창문 바깥을 내다봤다. 아까는 장대비를 퍼붓더니 지금은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변화무쌍한 날씨였다.
'그년도 재준이 좋아하나? 애비, 시발."
핸드폰이 진동했다.
순간 설레었다. 추가적인 용건이 있는 신재준의 전화가 아닐까 해서.
하지만 발신자표시를 보고 실망했다. [모범생]. 기미정이 박슬기를 부를 때 쓰는 별명이었다.
"어, 범생아."
[뒈진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그릏게 브르즈 믈릈즈~"
[아, 시발년.]
기미정은 박슬기가 좋았다. 동성애적으로 좋다는 건 절대 아니고, 친구로서 좋다는 것도 아니었다.
박슬기는 물주였다. 일진들이 어디 놀러갈 때 숙소나 여비 같은 것을 통 크게 대주고, 특히 값비싼 양주를 먹고 싶어할 때 박슬기가 자신의 집에 있는 양주를 뽀려와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물주를 싫어할 리가.
'그렇게 일진들한테 돈을 펑펑 써대면서, 정작 돈 빌려주는 건 엄청 생색내요.'
"무슨 일로 전화했냐?"
[신재준한테 들었는데. 너 정말 걔네 누나한테 진 거냐?]
"어, 졌어. 완전 발렸지. 시이발, 킥킥. 볼라 세데?"
[그러냐. 알겠다.]
"야. 근데 너 언제부터 신재준하고 사이 좋았냐? 너 신재준한테 조언해줬다며? 백호수인가, 백수호인가. 그년하고 신재희 붙어다니게끔 하라고."
[...신재준이 너한테 벌써 그걸 말했다고? 너야말로 신재준하고 겁나 친한가 보다?]
"어."
[...조합이 시발, 이상하잖아. 언제부터?]
"내가 걔네 누나한테 씹발렸을 때부터."
[니 그때 머리 맞아서 뭐 잘못됐냐? 왜 그게 너랑 신재준이 친해지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건데?]
"몰라도 돼, 샹년아."
'이 새끼, 이거. 끈덕지게 묻네. 이 년도 재준이 좋아하는 거 맞네.'
박슬기는 자기한테 반항하는 녀석은 바로 내쳐서, 자신이 떨어뜨리는 꿀을 주지 않았다. 박슬기한테 반항하던 녀석은 다른 일진이 꿀 빠는 모습에 배 아파하다가 결국엔 박슬기한테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박슬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안유리도, 처음엔 박슬기와 맨날 치고 박고 싸우다가 박슬기가 흘려주는 꿀을 빨아먹으려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유리랑 저번주에 싸웠다지?'
학교에서 둘이 싸운 이유가 소문이 퍼져 있었기에 쉽게 그 싸움의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안유리가 시끄럽게 구니까 공부하는데 방해받은 박슬기가 조용히 하랬는데, 그럼에도 안유리가 씨그럽게 해서 박슬기가 빡쳐서 싸우게 됐다'는 소문이었다.
'안유리, 그년이야 옛날부터 '신재준, 따먹고 싶다' 노래부르던 년이었지. 그런데 박슬기, 이년... 저번주에 빡쳤던 거 '시끄러워서'가 아니라 '신재준 좋아하는데 신재준에 관련된 음담패설이 듣기 싫어서'였네.'
[하아, 어쨌든 알았다. 너 이번주에 돈 갚는다고 했다? 꼭 갚아라, 시발년아.]
"아, 갚을 거라고. 아, 맞다. 그래서 신재희 어쩔 거냐? 킥킥, 나 봊 발라버린 년이 걔네 언니라고? 신재희 밟을 거냐?"
[미쳤냐. 그냥 백호수 핑계대고 냅둘 거다.]
기미정에게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신재희를 때리는 건 자신이어야 했다.
"그래? 네가 학년장이니 네가 결정한 것에 따라야지. 끊는다."
기미정은 통화를 종료했다.
'인기 많네, 우리 재준이.'
기미정은 악력기를 쥐고 펴기 시작했다.
'안유리에, 박슬기에, 나까지. 아, 고미혜, 그 돼지년도 신재준 좋아하고. 시이발. 왜 그렇게 여자를 꼬시고 다녀, 시발놈아.'
진짜 어디 가둬둬야 할까? 다른 여자들이 아예 쳐다도 보지 못하게.
신재희가 딴 남자한테 보지를 쑤심 당하는 건 괜찮았다. 그런 상상을 해도 화가 나지 않았다. 대신, 신재희가 딴 여자랑 보지를 비벼대는 상상은 열 받았다. 그러나 신재희가 레즈는 아닐 테니, 사회에 풀어놔도 좋았다.
반면에 신재준의 경우는 시발이었다. 신재준의 자지가 딴 여자 보지에 따먹힐 걸 상상하면, 열불이 치솟았다. 그런데 그런 신재준의 자지를 노리는 여자들이 볼라게 많았따.
'김하늘, 그리고 그 누구지? 김하늘하고 같이 다니는 키 큰 년. 그 년도 신재준 자지 노리고 있겠지. 아나, 시발. 정조대라도 채우고 싶네. 개 같은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