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봄개학
"연애는 무슨.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박슬기가 부정했다.
우리는 계단에서 내려와 1층 부엌으로 향했다.
양식이라고 해서 스파게티나 스테이크 같은 걸 생각했는데, 양식다운 양식이 차려져있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시고요."
가정부 아저씨가 부엌에서 나갔다.
박슬기가 내가 앉으려고 한 의자를 빼주었다. 이런 매너가 몸에 배인 걸까.
"고마... 헉!"
내 엉덩이를 의자가 받쳐줄 거라고 믿고 앉았는데, 박슬기가 의자를 뒤로 확 빼는 바람에 난 추락했다. 꼬리뼈부터 방바닥에 부딪치고 말았다.
"아놔. 야."
"킥킥..."
난 꼬리뼈를 어루만지며 일어났다. 박슬기가 뒤로 당겼던 의자를 잡아당기며 똑바로 앉았다.
"네가 애냐?"
"네가 괴롭히고 싶게 생긴 게 잘못이야."
"그건 또 뭔... 생전 처음 듣는 개소리인데."
"미안. 아팠냐?"
박슬기가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아, 치워."
그녀는 피식 웃더니 내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각자의 앞에는 포크와 나이프, 스푼, 그리고 앞접시가 놓여있었다.
"이건 카프리제.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를 슬라이스하고 발사믹식초 뿌린 거야. 샐러드랑 같이 먹으면 되고."
박슬기는 샐러드를 토마토 위에 뿌린 뒤, 토마토 밑에 있던 치즈와 함께 포크로 찍어서 베어물었다.
카프리제 라는 요리는 '신재준'의 기억에도 있었다. 어렸을 때, 해외음식 탐방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이것저것 먹어봤으니.
"나도 알거든."
나는 박슬기를 따라서 먹었다.
새콤한 토마토 밑에 고소하고 짭짭짜름한 치즈 맛이 느껴졌다. 아삭아삭한 샐러드가 신선한 맛을 더 했다.
'신재준'의 기억에만 있던 음식을 먹으니, '어디선가 먹어봤는데 처음 먹는 느낌이네?'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괜찮네. 나중에 아란이가 캠핑장 끌고 갈 때, 만들어 먹어야겠다.'
"그럼 이건 뭔지 아냐?"
내가 카프리제가 뭔지 안다니까, 박슬기가 새빨간 스프를 가리키며 문제내듯 물었다.
새빨간 스프에 국물에 늘어진 치즈와 반숙이 된 계란이 띄어져 있었다.
겉보기에는 매워보였다.
"에그인헬 이잖아."
"오... 알고 있네?"
"사람 무시할래?"
"킥킥, 무시하는 건 아니고. 먹자."
나는 반숙계란과 토마토소스와 함께 데워진 베이컨을 스푼으로 떴다.
토마토소스의 새콤달콤함과 치즈의 고소 담백함, 마늘과 양파의 향이 섞여 맛이 없을 수 없는 에그인헬이었다. 거기에 베이컨의 짭짤함과 석였다. 반숙된 노른자가 끈적지게 혀에 붙으며 풍미를 더했다.
바구니에 담겨져있던 바게트를 에그인헬의 찍어서 먹기도 했다. 바게트를 찍어먹는 편이 더 맛있었다.
구운 고기도 있었다. 야채볶음과 한 접시에 있던 돼지고기를 앞접시에 담아다가 조금씩 입안에 넣어 씹어먹었다.
박슬기는 배가 고팠는지 빠르게 먹었다. 입가에 토마토소스가 묻어났다.
나는 그냥 알려주고 넘어가거나 모르는 척하면 됐지만, 그녀를 꼬실 생각이어서 행동에 나섰다.
식탁 구석에 있던 티슈를 뽑아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누가 애인지 모르겠네. 너 원래 이렇게 입에 묻히면서 먹냐?"
내가 자신의 입가를 티슈로 닦아줄 거라 생각했는지, 박슬기는 손을 멈추고 고개도 멈췄다.
나는 티슈로 그녀의 입가를 훔쳤다. 키스를 부르는 입술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싶어 아찔함이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다 닦은 나는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의 이마팍에 그 티슈를 탁 붙여버렸다.
"아니... 야!"
"흐흫... 복수다, 새끼야."
"허. 골때리네."
"내가 너한테 당했을 때 어떤 기분인지 지금 느끼나 보네."
박슬기는 이마에 붙은 티슈를 떼고, 새 티슈를 뜯어 자신의 이마에 묻은 소스를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먹을 걸로 장난치는 건 아니지 않냐?"
"먹을 거라니? 입가에 묻은 거 어차피 티슈로 닦아냈을 거 아니냐? 그럼 어차피 안 먹을 거였잖아."
박슬기가 먼저 유치하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내가 유치하게 맞받아치니 그녀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했다.
나는 다시 착석해 식사를 이어나갔다.
서로 장난 안 친지 3분 정도 됐을까.
이젠 식탁 밑에서 장난이 시작됐다.
박슬기가 발로 내 다리를 친 거였다.
내가 박슬기를 노려보자 그녀는 뭘 쳐다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지금 입안에 음식물이 있어서 말을 하진 못했다.
난 복수를 위해 박슬기의 다리를 툭 쳤다.
꿀꺽. 그녀가 입에서 우물거리고 있던 내용물을 삼키더니 말했다.
"오. 지금 나한테 선빵 날린 거지?"
그녀가 내 다리를 발로 쳤다.
이젠 내가 질세라 때렸다.
식탁 위는 조용한데, 아래에서는 서로의 다리를 치는 싸움이 벌어졌다.
발싸움 때문에 밥을 제대로 못먹을 정도였다.
"그만 때려라?"
내가 선빵을 맞았으니, 내가 때리고 그만둬야했다. 유치한 초딩 논리지만, '장난'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네가 먼저 나 선빵 때렸잖아. 네가 멈춰야지."
"뭔 소리야. 네가 먼저 나 쳤잖아."
"응? 뭔 소리야. 네가 먼저 쳤는데."
난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려다가 박슬기의 얼굴이 너무 당당해보여서, '정말 내가 먼저 친 건가?'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아, 어쩌면 장군님이 나 건든 것일지도.'
"풋. 흐흐흫... 뭘 그리 심각해져. 내가 먼저 친 거 맞아, 바보야."
"아니..."
깜빡 속아넘어갈 뻔했다.
포커페이스 잘 하네, 진짜.
"내가 왜 바보냐?"
"나 1등, 너 2등. 나보다 바보 맞잖아."
부정할 수가 없으니 속에서 짜증이 1스택 쌓였다.
"아씨. 꼴 받네. 다음 시험이 언제더라. 3월 모의고사 때 보자. 발라줄게."
"네가? 나를? 킥킥, 어디 한 번 노력해봐라."
식탁 밑 발싸움이 일단락되고 다시 식사.
그러다가 내 다리를 건드는 발이 또 느껴졌다.
"야. 밥 먹는데 건들지 마라."
"응? 뭔 개소리야."
그녀의 발은 내 정강이를 지나 무릎까지 올라오더니,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뭐지? 장난이 너무 심각한 거 아닌가?'
성추행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발 내려라."
"뭔 소리야 나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그녀의 발이 결국 내 자지에 닿았다.
난 고개를 숙여 내 다리 사이를 내려다봤다.
크고 작은 상처로 흉터가 많은 맨발이 보였다.
'아.'
그 맨발은 내가 눈을 깜빡거린 찰나,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렸다.
내 가랑이 사이의 바지가 눌린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장군님의 장난이었나보네... 깜짝이야.'
"뭐하냐? 지금 나 무섭게 하려고 연기하는 거?"
"...흐흫, 그래. 무서웠냐?"
난 그녀의 짐작이 맞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이렇지 않으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될 테니까.
"아씨... 연기 볼라 실감나게 하네. 좀 무서웠다."
'연기가 아니었고, 실제였으니까.'
그뒤엔 장난을 치지 않고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다.
배가 불렀는데, 쌀밥을 안 먹어서 그런지 뭔가 아쉬웠다. 역시 한국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치울까?"
"냅둬. 아저씨가 치우실 거야."
박슬기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네 교복 건조하고 있겠네. 올라가 있자. 피곤하면 또 내 침대에서 자든가."
"그럴까."
다시 한 번 무방비함을 드러내서 꼬셔보기 들어가볼까.
'음... 그런데 정말 박슬기를 꼬셔도 되는 건가? 장군님이 나한테 장난거는 거보면, 지금 상황이 심각한 게 아닌가 본데...'
어쩌면 장군님의 의도가 '더 이상 몸 사리지 말고 여자애 꼬셔라'인 것일 지도 모르겠다.
'와우... 만약 정말 그렇다면 포용력이 장난 아니시네... 내가 딴 여자 만나는 걸 도우시겠다는 거 아니야?'
하긴. 장군님과 함께 다닌 이후, 장군님이 내가 딴 여자랑 섹스해대는 것을 방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혹시 NTR성벽이라도 갖고 계신 건가...'
아마 그런 듯싶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천군만마라도 얻은 기분이었다.
"밥 그렇게 맛있었냐?"
갑자기 옆에서 박슬기가 물었다.
"응? 맛있긴 했는데. 왜?"
"너 지금 되게 기뻐보여서. 아니면 또 내 방에서 잘 수 있어서 좋아서 그래?"
그런데 그녀의 추측이 또 틀린 건 아니었다. 그녀의 방에서 자는 것으로, 그녀를 꼬실 생각에 기뻐하고 있으니.
"...역시 넌 도끼병 있는 거 맞는 것 같다."
나는 그런 속내를 숨기고, 그녀를 타박했다.
"식사 다 하셨어요? 디저트 갖다드릴까요?"
"신재준, 너 디저트 먹을래?"
"아, 아뇨. 저 자려고요."
"오... 아가씨, 피임은 잘 하셔야..."
아니, 이 아저씨가? 지금 내가 자겠다는 말을 섹스하겠다는 쪽으로 받아들였다.
박슬기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칭얼거렸다.
"아, 그런 사이 아니라고요. 얘는 그냥 잠만 잘 거예요. 진짜 잠."
"그렇군요."
가정부 아저씨가 뭔가 훈훈하게 나와 박슬기를 번갈아봤다.
마치 '너희 둘이 서로 좋아하는 거 다 보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만약 진짜 그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착각이었다.
나는 박슬기의 '몸'을 좋아하는 거 맞다.
하지만 박슬기는 나예성을 좋아하고 있을 테니 '서로 좋아한다'는 짐작은 오답일 것이었다.
"저 아저씨. 제 교복은 언제쯤 건조될까요?"
"한 30분 남았습니다. 낮잠 주무시면 다 돼있을 것 같네요."
나와 박슬기는 2층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돌핀팬츠를 입은 하반신...
팬츠 틈으로 팬티가 슬쩍슬쩍 보이고, 팬츠 밖으로는 엉덩이 밑살이 걸을 때마다 접히는 게 고스란히 보여 꼴렸다.
저 얇은 두 겹의 옷 밑에 보지가 있을 걸 생각하니 더더욱...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노팬티여서 발기하면 심하게 티날 게 분명했다.
난 시선을 내려 자극적인 걸 보는 걸 중단하며, 마음을 무념무상에 접어들게 만들었다.
"너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갛냐?"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박슬기가 좀 거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 얼굴이 빨갛다고?"
하긴 빨갈 수도 있겠다. 방금까지 그녀의 하반신을 보며 흥분한 상태였으니.
"왜? 아저씨가 우리 보러 커플 같다고 하니까 기분 좋았냐?"
아... 박슬기, 얘 도끼병 있는 거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