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봄개학
장군님은 딱히 대답이 없었다.
나도 큰 기대를 안 했다. 장군님이 내 말을 잘 씹기도 하니까.
'뭐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그런데 여름도 아니고 겨울에 우산을 팔려나?'
멀리서 박슬기가 장우산을 쓴 채 다가오는 게 보였다. 다른 한 손에는 나 줄 것인지 여분의 장우산이 1개 더 있었다.
'아, 어제 눈 많이 왔지.'
눈이 많이 내리면 우산을 쓰기도 하니까 편의점에서 구비해둘만하겠다.
"자."
주차장 아래로 들어온 그녀가 여분의 우산을 내게 건넸다.
"이거 얼마냐?"
"1만 2천 원."
"겁나 비싸네."
나는 지갑을 열어서 돈을 꺼내려고 했다.
"됐어. 돈 안 줘도 돼."
"너한테 빚지기 싫어서 그래."
돈을 꺼내다가 내밀자 박슬기는 돈을 받았다. 그리고 나한테 장우산을 건넸다.
"맞다. 재희 대해서 조언해준 거. 왜 그런 거냐?"
난 박슬기가 나예성을 좋아하고, 나예성에게 가장 가까운 나부터 공략할 작정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짐작일 뿐이었다.
혹시 장군님이 박슬기 만나게 만든 건 이걸 제대로 알아내라고 인도한 걸까 싶었다.
"춥냐? 몸 떠네."
그런데 박슬기는 내 질문에는 대답 안 하고, 내 몸 상태에 대해 걱정하는 말을 했다.
날씨가 따듯해져 비가 내려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쌀쌀한 온도에 젖은 몸이 열을 빼앗겼다.
"너 감기걸리는 거 아니야?"
"괜찮아."
보통이었다면 집에 가보겠다고 말할 타이밍이었지만, 장군님이 인도하신 까닭이 신경쓰여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
박슬기는 바닥에 내려놔두었던 자신의 가방을 멨다.
"사심 전혀 없이 얘기하는 건데. 우리집 학교 근처야. 옷 좀 말리고 갈래?"
'이건가? 박슬기의 집에 침입하면 뭔가 캘만한 정보가 있는 건가?'
"이상한 짓 안 할 거지?"
"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집에 어른도 있어."
"그러면 그럴까..."
"그럼 따라와라."
우린 각자 장우산을 쓴채 빗속을 걷기 시작했다.
박슬기의 집이 잘 산다고 들었는데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학교에서 5분 정도 걸어 언덕길 앞에 도착했다.
기울기가 제법 큰 언덕길이었다. 후룸라이드처럼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길가에 쓸어두었던 눈은 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대부분 녹아 사라져있었다.
소희정의 집에 놀러갈 때도 그랬는데. 뒤에서 쫓아가니 나보다 위에서 걷는 박슬기의 팬티를 구경할 수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풀려서 그런지 그녀는 스타킹을 신지 않은 상태였다.
언덕길 정상에 도착했다. 담벼락이 높아서 집 내부를 구경할 수 없었다. 박슬기는 초인종을 눌렀다.
[네, 아가씨. 열어드릴게요.]
중년남자의 목소리였다.
"가정부?"
"응."
김하늘네도 가정부 같은 거 고용한 적 없었다. 박슬기는 얼마나 부자인 거지.
'최아란네 가족이 더 부자겠지만... 최아란은 혼자 독립해서 고급아파트에서 혼자 살아서, 부자라는 실감이 별로 안 갔는데...'
출입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계단을 올라가 보니 정원이 딸린 3층짜리 건물이 보였다. 바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걸 보면, 지하층도 있는 모양이었다.
정원에는 연못도 있었다. 살얼음이 껴있던 연못이 쏟아지는 때아닌 장대비를 맞으며 물방울을 튕기고 있었다.
우리가 현관문 앞에 도착할 즈음, 현관문이 열리며 인자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웬일로 남자분이랑 같이 오셨네요?"
"갑자기 비가 오잖아요? 다 젖은 게 추워보여서. 얘 갈아입을 옷 좀 준비해주시고, 얘 교복도 세탁해주세요. 전 2층에서 씻을 거니까, 쟤는 1층 욕실 쓰게 하고요."
"알겠습니다. 저 따라오세요."
"아, 예."
그 할아버지는 박슬기가 남자를 데려온 게 기분 좋은지 방실방실 웃고 계셨다.
"아, 제 부모님은 아직 안 들어오셨죠?"
"네, 아가씨."
그는 나를 1층의 욕실로 안내했다.
거실과 욕실 중간에 탈의실을 끼고 있었다.
탈의실에는 거울장과 헤어드라이기 따위가 준비돼있고, 옷을 담을 수 있는 선반도 준비돼있었다.
"추우실 텐데 샤워 먼저 하시면서, 욕조에 물 받으세요. 옷 벗어두시면 제가 세탁하도록 할 거고, 갈아입을 옷을 대신 두고 가겠습니다."
"아, 예... 근데 말 편하게 하세요."
할아버지한테 존대를 들으니까 불편해졌다.
"하하. 이게 다 돈 받고 하는 일이라."
"아, 네..."
직장에서 손님 대하듯 예의 갖추는 것이란 얘기인 듯했다.
그가 탈의실에서 나간 다음에야 젖은 교복을 벗었다.
팬티를 벗을 때 생각했다.
'갈아입을 팬티도 가져다주겠지? 새 걸로?'
욕실에 들어섰다. 욕탕이 컸다. 4인이 함께 들어갈 수 있을 정도.
'욕탕이 이거 하나뿐이네... 물 펑펑 써도 되겠지. 부잣집인데.'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샤워기로 차가워진 몸을 데웠다.
거품칠한 뒤, 어느 정도 밑바닥이 채워진 욕탕에 들어갔다.
'하아... 좋다. 근데 박슬기네 집에 놀러오는 게 정답 맞나?'
욕조의 버튼이 있었다. 버튼 누르면 거품도 뿜어지고 그럴 것 같은데, 사용법을 모르니 그냥 냅두기로 했다.
'그런데 재력만 보고 선택한다면 최아란보다 박슬기가 나으려나? 최아란은 수많은 손자손녀 중에 1명이고, 박슬기는 바로 직계 딸이잖아. 그래도 명색이 CY그룹인데, CY그룹 핏줄이 나으려나.'
의미 없는 대결을 머릿속에 돌려본다.
어차피 또 다른 돈 많은 여자를 꼬실 생각이 없었다. 최아란 하나만 해도 벅차.
똑똑.
"네?"
"갈아입을 옷 두었으니까 입으시면 됩니다. 교복은 세탁하겠습니다."
가정부 할아버지는 탈의실에서 문너머로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목욕 중에 마실 거라도 갖다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가정부가 멀어지는 발걸음이 들렸다. 그리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도 작게 들렸다.
나는 뜨거운 물로 세수를 한 번 했다.
'아닌가... 장군님도 있는데 안심하고 박슬기도 한 번 꼬셔봐?'
백호수도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쉽사리 다가갈 생각이 없었지만 장군님이 지켜주신다면 한 번 따먹히는 것도 생각해봄직 했다.
백호수도 예뻤다. 왼쪽 볼에 칼빵 자국도 뭔가 매력 있어.
'엄지혜랑 소희정한테도 따먹히고 싶은데...'
해도 되나?
장군님 하나만 믿고?
할까?
"흐음... 하아..."
나는 뜨끈한 물속에서 고뇌했다.
여지껏 '균형'을 고민하느라 추가적으로 따먹힐 여자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군님, 설마 박슬기한테 따먹히라고 저 여기로 오게 한 거예요?'
나의 배후성에게 물어봤다.
좀 기다려봤지만 답이 없었다.
"흠..."
나는 입을 목욕물까지 담가서 공기를 냄뿜었다. 거품이 보글보글 일어났다.
그리고 손으로 슬쩍 내 자지를 어루만졌다.
새로운 여성들에게 따먹힐 떠올리니 그 기대감에 바짝 세워져 있었다.
'따먹히자. 그냥.'
균형 무너질 걱정 안 해도 되잖아? 장군님만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그동안 '균형'에 대해 신경쓰느라 바짝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사르르 녹아들고, 앞으로 갖게 될 여자들과의 섹스에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지금 당장은 나예성이 품절남인지도 모르고 헛된 짝사랑이나 하고 있는 박슬기부터 공략해볼까.'
이왕 박슬기의 집에 들어오게 된 거. 그녀를 꼬시기에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만약 지금 잘못 선택한 거라면, 장군님이 알아서 막아주시겠지. 아마.'
난 목욕을 마치고 배수구를 열어 욕조물을 빠지게 했다.
탈의실로 나가니 새 수건과 하얀셔츠와 검은 트레이닝바지가 준비되어있었다. 옷은 약간 사용감이 있어보이는데 잘 빨았뒀던 것인지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로 닦고, 알몸인 상태에서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옷을 입으려고 하던 차에 깨닫게 됐다.
'팬티가 없네? 실수하신 건가. 아니면 손님한테 제공할 팬티까지는 없는 건가.'
일단 바지를 입었다. 내 가랑이를 자세히 살피면 대물 자지의 모양이 보이긴 하지만, 색이 검은 색이어서 멀리서 보면 잘 안 보였다.
'괜찮겠네.'
박슬기를 꼬실 때도 노팬티인 게 효과적일 것 같고.
탈의실 거울장 옆에 사용한 젖은 수건을 두는 바구니가 있었다. 거기에 수건을 던져두고 거실로 빠져나갔다.
가정부 할아버지가 거실 소파에 앉아 독서를 하고 계셨다.
지금은 집안 가사할 게 없어서 저렇게 쉬고 있는 듯했다.
난 팬티에 관해서 물어볼까 하다가, 남자랑 팬티 관련해서 얘기 나누기 싫어 그냥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제 교복은 언제 세탁이 될까요?"
"아. 금방 됩니다. 건조까지 1시간 정도? 식사하시겠습니까? 출출하시죠?"
"아, 네."
아침을 안 먹는 편이었고, 공부하느라 두뇌가 에너지를 소모해서 방과후 점심시간 때만 되면 배가 무척 고팠다.
"양식, 한식, 일식. 어떤 것을 만들어드릴까요?"
'양식'을 제일 먼저 말한 거 보면, 내가 양식을 택해주길 바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양식이요."
"네, 알겠습니다. 학생은 2층에 올라가보세요. 아가씨는 빨리 씻으시는 편이라, 아마 다 씻었을 것 같네요."
그의 말에 계단을 올라갔다.
마침 내가 2층에 도착했을 때.
2층의 한 문이 열리더니 박슬기가 나왔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그녀는 이제 샤워를 끝낸 참인 듯했다. 몸에서 물이 흐르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알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