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2화 〉봄개학 (162/201)



〈 162화 〉봄개학
"그럼 가봐."

박슬기가 떠나라고 하자, 여학생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박슬기는 고개를 올렸다.


'겨울비가 오려나?'

날씨가 아침부터 흐렸다. 먹구름으로 하늘이 가려져있었다.

겨울 날씨 치고 따듯한 날씨였다. 이러면 눈이 안 내리고 비가 내릴 가능성이 컸다.

'우산 안 가져왔는데.'


적게 내리든지, 진눈깨비 형태로 내리든지 했으면 싶었다.





명령을 받았던 녀석은 3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에게 다가왔다.

"하, 하고 왔는데."
"오, 그래? 안 했으면 반죽이려고 했는데."
"..."
"따라나와 봐."

궁금했다. 신재준이 어떤 말을 하며 거절했을지.


1층으로 내려와 인적이 없는 학교 뒷편으로 향했다.

"뭐래?"
"공부에 집중하겠다고 아무하고도 사귈 생각 없다고..."
" 킥킥, 하긴. 너 같은 새끼가 고백하면 사귀기 싫겠지."


'아무하고도  사귈 거라... 좋은 태도네.'

항상 같이 다니는 김하늘이나 소희정과도 아무런 사이도 아님을 유추해낼  있었다. 또한 신재준이 여태껏 다른 여자하고도 사귀지 않았음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럼 동정이겠네... 어?'


"하. 왜? 시발 내 말 때문에 꼽냐?"
"아, 아니..."


박슬기는 눈앞에 찐따가 표정관리를 못하자 그녀의 목을 한 손으로 조였다.

"윽...!"
"눈 깔아, 샹년아."
"미, 미안..."

눈을 깔며 저자세를 보이자, 박슬기는 코웃음 치고 목을 놓아주었다.

"꺼져."


박슬기의 축객령에 여학생은 학교 건물로 도망치듯 들어가버렸다.

수업 시작의 시작을 알리는 학교 종이 울려퍼졌다.

박슬기 역시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볼에 찬 물이 닿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빗물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오네."


4교시 수업은 기분 좋았다. 신재준에게 여자친구가 없고, 아마 그의 형편상 '성공'하기 위하여 공부에 몰두해 연애 한   해본  같았기에.

동정이 분명할 테고.

확률적으로 동정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되자 기분 좋았다.

그리고 신재준이 공부를 잘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골빈 남자들보다 '성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서, '학년 2등'이라는 실적도 내고 있는 신재준의 모습이 자신의 첫 남자친구로 적합해보였다.



/ / /




4교시가 끝나고 김하늘과 소희정이 내 자리로 모였다.

"저번 쉬는 시간 때 어떻게 된 거야? 뭐래?"


김하늘이 궁금하단 얼굴로 물었다.

저번 쉬는 시간 때, 처음 보는 여자애가 와서 진지하게 할 얘기 있다고  불러냈다.

장군님도 딱히 아무런 위협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고 해서, 안심한 상태로 그녀가 할 말을 들으러나갔다.

따라나가면서 고백 받으려나 예상했는데, 예상한 그대로 고백받았다.


"고백 받았는데 거절함."
"용기있네. 바보 같지만."

내 옆자리의 나예성이 그 이름 모를 여자아이를 평가했다. 그애 본인한테 이름을 듣긴 했는데 까먹었다. 별로 인상적인 여자애도 아니어서.

나는 속으로 나예성의 말에 동의했다. 딱히 외모나 재력, 능력이 빼어난 사람이면 모를까. 자신을 처음 인지한 사람에게 대뜸 고백이라니. 무슨 자신감인 걸까?


"흐음... 이해 못할  없는데..."

소희정이 중얼거렸다.

사실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짚는 심정으로 고백하는 거겠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차이고, 그렇게 차라리 속시원해질 생각도 있을 테고.

"야. 니들이 어둠의 자식들이냐?   켜."

종례시간이어서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먹구름으로 날씨가 어두웠는데, 교실의 전등을 꺼두고 있어 어두침침한 편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전등을 켜자, 교실이 환해졌다.

"보충 수업이라고 튄 사람 없지? 저 빈 자리 누구지?"
"고미혜요."
"아, 그 녀석, 또 땡땡이 쳤나?"
"쌤. 미혜, 화장실 갔는데요."
"빨리 오라고 해. 우리도 빨리 집에 가자."


남학생들도 그렇고, 평소 고미혜와 그 친구들을 무서워하던 찐따 여학생들도 고미혜 자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빨리 와야 하교를 하니., 모두 한 마음이 된 것이었다.


나는 운동장쪽 창문 바깥을 쳐다봤다.

4교시 시작부터 내린 진눈깨비였다. 그것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고미혜의 친구가 핸드폰을 두드리더니 말했다.


"쌤. 미혜, 똥 싼다는데요. 그냥 우리끼리 먼저 끝내면 안 될까요?"


'고미혜, 그 돼지년... 땡땡이 쳤나보네.'

분명 고미혜의 친구가, 고미혜의 땡땡이 걸리려는 걸 커버 치려는 것일 듯했다.


고미혜만 오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화기애애 했던 교실의 분위기가 싸악 가라앉았다.


여기서 담임선생님이 '고미혜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하면, 개좆같을 것이고.


선생님이 다른 선택을 하며, 하교 시켜주면 찬양받을 것이었다.

"하아... 고미혜 보고 20분 안에 교무실 오라고 해라. 자, 다들 자기 책상 밑에 쓰레기 주워. 집 가자."


찬양받아 마땅한 선생님이었다.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학생들의 인사가 다른 때보다 유독 크고, 밝았다.


나는 가방을 메고 일어났다. 맨날 같이 다니는 소희정, 김하늘, 나예성과 함께 교실을 빠져나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미혜, 그년은 똥쟁이네."


나예성의 말에 우리는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고미혜... 혹시 기미정이 물어보면, 맨날 괴롭힘 받고 있는 척하라고 말했었는데... 이젠 그걸 신경 쓸 필요없겠네.'

'신재준'을 좋아하는 게 분명한 고미혜였다. 기미정이 자기보러 날 괴롭히라고 했다며 남몰래 귀뜸을 해주었었다.


저번주에.

그리고 그런 고미혜의 호의를 난 완전히 잊고 지내고 있었다.

'돼지의 호의라서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나중에 살 빼고 미녀가 되어 나타나면 또 모를까.


우리는 진눈깨비를 그냥 맞으면서 하교를 했다.

학교에서 5분 정도 벗어났을 때, 소희정이 우릴 뒤돌아보더니 말했다.

"우리 같이  먹고, 시내에서 놀자."

나는 힐끔 김하늘을 쳐다봤다. 굳은 표정이 영 시내에서 노는 게 내키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랑 집에 같이 돌아가서 알몸으로 놀고 싶은데, 소희정이 방해하니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난 상관없는데."


나예성이 가장 먼저 동의했다. 김하늘은  쳐다봤다. 내 선택에 자신도 따르겠다는 듯.


'내가 시내에서 놀자고 하면, 다 같이 있을 땐 노는 걸 즐기는 척하다가, 단둘이 있게 되는 순간에는 삐진  해대겠지.'

그러면 나는 '세상에서 네가 최고야'라며 달래줘야할 거고.

'나도 아침에 재희 몸 달아올라서 정액마려운데... 그냥 집 갈까.'


"나는..."

내가 대답하려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장군님인가 혹시.'


내가 지금 뭐 잘못 선택하려는 건가요?

(알 수 없음) [당장 학교로 돌아가]


'뭐? 학교는 왜...'


내가 눈 깜빡하는 사이에 장군님이 보내주신 톡이 사라졌다.

"누가 톡 보냈냐?"
"아, 아니. 진동 울린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음."


나예성의 물음에 대답하며, 난 애들한테 말했다.


"나 볼 일 있어서 가볼게."
"뭐? 어딜?"

김하늘이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

난 웬만하면 김하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진 않지만, 저번에도 잘 통했던 핑계거리를 내뱉었다.

"데이트."


나예성이 김하늘의 한쪽 팔을 붙잡더니, 나한테 남은 손을 흔들었다.


"가라."

소희정도 슬쩍, 김하늘의 반대편 팔을 붙잡았다.

"아니, 니들 왜 날 붙잡는 건데?"

두 친구가 김하늘을 붙잡고 있을 때, 난 그룹에서 이탈했다.

5분 동안 걸어왔던 등하굣길을, 다시 5분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하아... 왜 여기로 돌아오란 거지? 알 수가 없네.'

'당장' 가라는  때문에 불안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학교는 언덕을 조금 올라야했기에  언덕길을 오르느라 숨이 찼다.

오는 길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하교하는 수많은 학생들을 거슬러, 혼자 등교했다는 것만 빼면.


"신재준?"
"하아... 하아... 박슬기?"

마침 학교 건물에서 나오던 박슬기와 마주쳤다.

"집에 가냐?"
"어? 어..."

박슬기는 학교 바깥에 나와있는 날 보고, 하교하려고 지금 막 나온 것인 줄로 생각하는 듯했다.

"집 어디냐? 가까워?"
"성연중 근처."
"그럼  10분 걸리겠네."
"그보다 5분 정도 더."


보통 같았으면 박슬기의 질문에 대충 대답했을 테지만, 난 박슬기를 만나게 하려는  장군님의 의도 같아서 순순히 대답했다.

'박슬기는 나예성한테 관심있어보이던데...  새끼, 설마 예성이한테 뭔가 저지르려고 계획하고 있나? 장군님은 나보고 그거 막으라고 보내신 건가?'


저번에도 박슬기는 나예성의 통화를 엿듣고 있었다. 스토커 같은 년.

난 경계의 눈초리를 박슬기한테 쏘아보냈다.

"내가 뭐 했냐? 왜 경계해?"
"일진 학년장이잖아. 우리 재희 괴롭히려는 년 중에 하나고."

기미정이 착해졌고, 일진회도 관둔다고 했으니 이젠 내가 경계해야할 건 박슬기, 안유리 같은 일진들이었다.

"흐음... 내가 조언도 해줬잖아. 그런데도 경계되냐?"


'나예성한테 다가가려고 나한테 점수 따려는 걸 보면... 아직까진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 같긴 한데...'


근데 장군님이 이리 박슬기와의 만남을 인도하셨으니, 경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어."
"후우... 일단 학교 나가자. 더 이상 여기 있기 싫다. 너도 하교하고 싶을 거 아니야?"


장군님이 박슬기의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자세히 얘기해줬으면 좋았을 것인데, 자꾸 수수께끼처럼 내주셔서 답답했다.

"그래, 가자."

난 일단 박슬기에게 밀착해서 '위험징후'를 살펴보려고 했다.


장군님께서 뭔가 나한테 위험 신호를 주려고 보냈을 테니까.


'그래도 시내까지는 못 따라다니겠네.'

김하늘과 소희정, 나예성이 시내에서 놀고 있을지 몰랐다.


그들에게 '데이트'하러 간다고 뻥을 쳤던 내가 박슬기랑 시내를 단둘이 돌아다닌다?

'개망하겠지, 그러면...'


장군님이 레이더 역할을 해주실 수도 있지만, 그보다 문제는 보충수업이라 학교 빨리 끝났다고 신나서 시내에서 놀고 있을 수십 명의 성연고 학생들이었다.


나도 그렇고, 박슬기도 학교의 유명인사니까 우리가 둘이서 시내를 돌아다니면 이상한 소문이  염려가 컸다.

그건 아무리 장군님이라도 막아주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마침... 장군님 덕분인지 주위에 애들이 없네.'


특이한 일이었다. 하교시간이 된지 얼마 안 됐음에도 하교하는 애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 현상이 시내에까지도 이어지면... 그땐 시내까지 같이 다녀보지, 뭐.'


그런데 우리가 언덕길을 다 내려오기 무섭게, 하늘에서 내리던 진눈깨비가 갑자기 겨울비로 바뀌었다.


가랑비 수준이었던 비가 점차 굵어져서 슬슬 피하지 않으면 비에 쫄딱 젖게 생겼다.

그때 박슬기가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비 피하자."


나예성을 좋아하는 애니까 지금 내게 점수 따려는 행동하는 건, 날 일단 공략해서 나예성을 어찌 해보려는 거겠지.


쏴아아아.


겨울비는 갑자기 장마철의 소나기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젠 비를 피해도 큰 소용없게 생겼다.


박슬기에게 이끌려서 도착한 곳은 필로티 구조로 된 빌라였다. 1층을 주차장으로 쓰는 빌라 말이다.

'그런데  겨울비도 장군님의 힘?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으음...'

오늘 학교에서 박슬기한테 몸통박치기를 유도시킨 것도 그렇고...  어째선지 장군님이 나랑 박슬기를 엮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박슬기가 나쁜 년이라 나, 혹은 내 주위사람한테 뭔가 피해를 줄 것 같으니 알려주시려는 것일 거다.

박슬기가 자신의 교복치마를 쥐어짜며 중얼거렸다.

"뭔 겨울비가 이리 많이오냐..."
"그러게..."


안그래도 짧았던 치마가 들춰지니 슬쩍 순백의 팬티가 엿보였다.

'개꼴리네...'


박슬기의 교복이 다젖어있었다. 여름철이었다면 젖은 블라우스 한  너머로 브래지어와 살이 비쳤을 텐데... 겨울이라 블레이저와 조끼에 가려져있었다. 그건  아쉬웠다.

그래도 그녀의 교복 아래로 쭉 뻗은 다리에서 빗물이 주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건  눈요기가 됐다. 아까 그 팬티도 그렇고.

근데 금방 질려서 나는 건물 밖에 빗물이 흐르는 아스팔트를 쳐다봤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보육원 애들끼리 비내리는 아스팔트 위에 우산 여러개로 지붕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놀기도 했었는데.


나도 물기나 짜려고 재킷을 열었다.


교복 조끼는 니트라서 냅두고.

교복바지춤에 들어가있던 셔츠를 뽑아내, 셔츠 끝단을  손으로 짜내었다. 물기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니 박슬기가  배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셔츠의 물 짜느라 드러난 내 배꼽을.

배꼽이야 뭐, 특별히 야한 부위도 아니니까 보든 말든 냅뒀다.

어차피 얘는  말고 나예성을 좋아하는 애이기도 하고.


"...신재준, 내 가방 좀 맡아줘라.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 사올게."
"안 사와도 되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가방을 주차장 바닥에 내려둔 그녀가 뛰쳐나갔다. 빗살을 가로지르며 멀어졌다.

'뭐지... 쟤가 나쁜  꾸미고 있는 거 맞아요?'

난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같아 장군님한테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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