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1화 〉봄개학 (161/201)



〈 161화 〉봄개학

박슬기는 기미정이 만신창이 모습으로 등교했다는 소식에 2층으로 올라갔다.

'시발년이... 그동안 잠수 타? 이참에  독촉 좀 해야지.'

응급실 비용은 27만 원 정도 들었다. 치과 진료비가 5만  정도 나오고, 치아 재이식 수술하는데 6만 원 정도 나왔다. 성형 진료비도 5만 원 정도 나오고, 귀를 꼬매는 수술도 6만 원 정도 들었다. 그리고 약값이 총 5만 원 정도.

  중에 기미정에게 호출받았던 박슬기는 '차용증'을  다음, 카드로 그 치료비를 긁어줬다.

처음에 약속된 건 익일에 갚는 거였다.

그런데 역시나 상납하기로 한 다음날이 되자 미루기 시작했고, 신재준이 대신 갚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고, 잠수까지 탔었다.


"야. 기미정 어디갔냐?"
"그, 글쎄. 모르겠는데..."


기미정이 속한 교실에 들어와 근처 여자애 한 명한테 물었다.


쫄아가지고 대답하는 꼴에 박슬기는 우월감을 느꼈다.

"왜 몰라?"
"그, 미, 미안."
"모르면 알아봐, 븅신년아."
"어? 어..."

박슬기의 명령에  여학생은 주위에 있는 자기 친구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답이 나왔다.

"아까 4반에 들어가는 거 봤는데."

'4반? 4반이면... 나예성네 반이잖아?'


박슬기는 기미정이 왜 그 반에 갔는지 짐작가는 바가 하나 있었다.

'신재준의 반이이기도 하지. 신재준한테 시비 털러 갔나.'

저번주 월요일, 봄개학 첫날부터 기미정이 1학년 4반에서 난리친 걸 알고 있었다.


김하늘을 주먹  방에 날려버리고, 신재희을 폭행하겠다는 걸 핑계로 신재준에게 번호를 따갔다고 상황을 전해들었다.

'아니면 그년, 신재준한테 이성적인 관심이라도 있나? 원래 남자 좋아하는 년이기도 했고.'

매번 소개팅 나가는 년이었다. 그래놓고 어찌나 눈이 높은지 소개팅남만 보면 시큰둥해한다고 들었다.

'뭐... 신재준 정도면 귀엽긴 하지.'


박슬기는 아무 의자에 앉았다. 아직 아침 조회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남았고, 아침 조회 전까지 기미정이 돌아오겠지 싶었다.

"뭐 구경났어? 뭘 쳐다봐?"

박슬기의 눈치를 보던 애들이 박슬기에게 시선을 떼고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괜히 박슬기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목소리를 낮춰서.

기다리는데 또각또각 하고, 바닥을 짚는 소리가 났다.


뒷문을 쳐다보니 만신창이가 된 기미정이 나타났다.

양겨드랑이 끼고 있는 목발은 둘째치고. 찢어진 귀볼을 꼬맨 것이 보는 이를 하여금 아프게 하는 것이 있었다.

'뭐지? 자기 엄마한테 또 맞은 건가? 귀는 저번에 수술 받은 건데... 깁스는  했었는데?'

저번주에 응급실에서  기미정은 이수열 수술과 치아재이식 수술만 받은 상태였다.


"뭐냐? 나 보러 왔냐?"
"그래, 시발년아. 돈  갚냐?"
"아,  아빠한테 돈 받을 거여. 좀만 기다려, 새꺄."

기미정은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목발을 옆에 앉은 여학생에게 던지듯 놓았다.


친구랑 잡담 떨다가 목발을 맞은 여학생이 "악!"하고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뒤돌았다.

자신을 맞고 널브러진 목발을 얼른 줍고서 교실 뒷쪽 창가에 기대게 해두었다.


박슬기가 아무렇게나 앉은 자리는 기미정의 자리에서 좀 거리가 있었다.

박슬기는 자신이 먼저 기미정한테 가면 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기미정한테 다가가지 않고 큰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줄 거냐? '곧'이 언젠데?"
"아, 시발. 금방. 그리고 내가 안 주면 이자 받던지 하면 되잖아."
"차용증 있는 거 알지?"
"하, 그래. 이번주 안에 갚을 거."
"알았다."


박슬기는 빚 독촉하러 온 것이었다. 그 목적을 달성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갔다.


'시발년... 돈 빌려달라고  때, 그냥 쌩 까는 게 답이었나...'


여태껏 기미정에게 돈을 빌려준 애들은 많았다. 찐따든, 일반인이든, 일진이든.


누구 하나 돈을 돌려받은 애가 없었다.

박슬기는 유일하게 기미정에게 채무이행을 완수한 사람이 돼 자신의 입지를 높이고 싶었다.

'기미정이 박슬기한테는 함부로  대하더라.  갚는 거 보면.'식의 이야기가 떠돌길 바랐다.

'후... 근데 막상 빌려주니까 못 받을까봐 스트레스 받네.'

다른 애들처럼 기미정에게 빌려준 돈을 회수하지 못하면, 딴년들처럼 보통의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되긴 싫었다.

박슬기는 언제나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받을 것이다. 다른 학생들을 돈으로 매수해 기미정을 함께 두들겨 패서라도.


'그러니까 미정아. 말로  때 갚자, 응?'

박슬기는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복도 끝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탁탁탁 하고 계단을 빠르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나랑 부딪치는 건 아니겠지. 시발, 어떤 년이라도 나랑 부딪치면 볼라 패야지.'

그런 생각으로 바닥에 두 다리에 힘을 주며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누군가와 부딪쳤다.

"앗!"

'남자네? 운이 좋군.'

그녀와 몸이 부딪쳐서 튕겨져나간 남학생은 굉장히 귀엽게 생겼다.

그런 귀여운 남자와 사고로나마 몸이 부딪치는 경험은, 사춘기라 성욕이 혈기왕성한 그녀로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어? 신재준이었네. 뭐야. 얘도 약하네.'

신재준에게 뭔가 선입견이 있었다.


맨날 자신의 뒷자리인 2등자리를 고소하는 그의 정신력이 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신체적으로도 남자치고 강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는 남자였다. 약해빠졌다.

그리고 박슬기의 취향은 '나약한 남자'였다.


여태껏 신재준이 강인해보였기에, 남자친구로 삼을 만한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그 생각이 확 달라졌다.


'아파서 찡그린 얼굴도 귀엽네...'

"크으윽...!"
"괜찮냐?"


박슬기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인사하니 마니'할 정도로 깊게 사귀는 여자친구가 있었던 나예성은 이젠  좋아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공석인 상태였다.

그 자리를 신재준이 지금 순간 차지했다.

손을 뻗자 그가 붙잡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이었다.


"너 되게 가볍네..."


살짝 팔에 힘을 주자 남자 치고 작은 그가 벌떡 일어났다.


'키 작은 남자... 내 취향 아닐  알았는데... 뭔가 꼴리는데?  품 속에 쏙 들어올 것 같고.'


박슬기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었다.

"아, 부딪쳐서 미안하다. 나 가볼게."
"어...? 그래."

신재준이 박슬기를 지나쳐 떠났다.

박슬기는 그와 길게 얘기를 하지 못한 게 아쉬워졌다.


그래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하고 신재준이 하는 것을 지켜봤다.

누군가를 찾는  교실 창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톡이라도 왔는지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고민에 빠진 듯했다.

마침, 방금 새로 좋아하게 된 남자인 신재준에게 말  건수가 생긴 듯했다.

"뭐하냐?"

그렇게 묻자 흠칫하는 신재준이 귀여운 동물 같아서 확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애써 그런 충동을 참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 놀래?"
"아니, 평소 너랑  아무 말도 안 하잖아. 그런데 갑자기  걸어오니까 놀라지."
"다치지 않았나 싶어서. 꼬리뼈부터 넘어진  같았는데 괜찮냐?"
"괜찮아. 좀 아프지만."
"좀 아픈 거 정도면 괜찮은 거네. 골절이었으면 아파 뒤질 텐데. 근데 2층에는 왜 올라왔냐?"
"그 이유를 너한테 말해줘야 돼?"

신재준이 경계하듯 되물었다.


확실히 신재준이 자신을 경계할 만했다. 평소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듯 이리 허물없이 다가오면 경계할 것이었다.

특히나 자신은 일진이질 않나. 여학생들 뿐만 아니라 남학생한테도 두려움을 사고 있는 자신이었다.

'그래도 신재준은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는 편이었지. 그런데 기미정 만나러 왔나? 얘도 기미정하고 트러블 있었잖아.'

"혹시 기미정이라도 보러 왔냐? 시발년이. 돈 빌렸으면 갚아야 하는데, 또 미루네."
"아..."


자신의 생각을 들켜서 그런 건지 그저 눈만 크게 뜨는 신재준이었다.

'귀엽네...'


"어쨌든 다치진 않은 모양이네."
"너한테 걱정 받을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가서 치료비 달라고 하지 마라."
"혹시나 나중에 꼬리뼈 금 갔다고 하면 치료비 청구할 건데."
"...그러든지."

돈이야 용돈 받는 게 많으니까 괜찮았다. 돈으로나마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았다.

'더 얘기해보고 싶은데... 그러면 내가 자기한테 관심 갖기 시작한  티 나려나?'

뭔가 남자한테 좋아하는 티를 먼저 내면 지는 느낌이었다.

박슬기는 그것보단, 남자 쪽에서 자신에게 매달리는 걸 원했다.


'나중에  기회 만들어서 차근차근 나한테 빠지게 만들어야지.'

박슬기는 신재준과 더 말하고 싶은 욕구를 참고서 등을 돌렸다.

그랬다가 마침 신재준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떠올렸다.  정보를 알게 되면 신재준은 고마워할 것 같았다.

"아, 맞다."
"뭐, 왜."
"네 동생 신재희. 그 여자랑 다시 동행시켜, 등하교  때 말이야."
"뭐? 심부름센터 여자, 말하는 거야?"
"그래. 그것 때문에 일진회 탈퇴 보복 폭행, 못 하고 있는 거였거든."
"아씨... 너희들 꼭 그딴 짓을 해야겠냐? 그리고 넌 똑똑하잖아. 다른 일진이 골빈년들인 것과 다르게. 왜 일진 짓하는 거냐."


'그야  짓을 하면 내가 윗사람이 된 것 같으니까.'

"어쨌든 신재희, 동행시켜. 동생 다치는 꼴 보기 싫으면."
"...그래, 어쨌든 고맙다. 조언해줘서."

'점수 좀 땄겠군.'

박슬기는 쿨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바로 등을 돌려 떠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갑자기 나예성이 떠올랐다.

'어? 그런데 신재준도 나예성처럼 이미 여친 있는 거 아니야? 이미 여친이랑 섹스도 해대는 걸레면... 개 싫게  것 것 같은데.'

나예성 때처럼 말이다.

아직까지 신재준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을 들은 적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나예성도 마찬가지였다.

나예성에게 여자친구가 없는 줄 알았는데, 저번주에 나예성에게 말 걸러 따라갔다가 그가 여자친구랑 전화하는  엿듣게 됐었다.

'신재준한테 여친 있나 없나 알만한 여자가 있나.'

있긴 했다. 김하늘하고, 소희정.

맨날 신재준과 같이 다니는 년들.


'흐음... 그 둘에게 물어볼 순 없잖아. 뭔가  방법이 없을까.'


박슬기는 습관처럼 1학년 4반을 지나치다가 나예성이 있는지 살폈다.

이젠 나예성이 엎드려자고 있는 모습을 봐도,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1반에 돌아가서 앉았다.

안유리와 그 친구들이 교실 뒷쪽에서 판치기를 하며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하압!"

탁. 안유리의 손바닥이 교과서 표지를 구겨서 만든 쿠션을 때렸다. 일렬종대로 배치되어있던 동전이 한꺼번에 뒤집어졌다.

"나이스!"
"시발. 밥만 먹고 판치기만 했나."


안유리의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저 년도 신재준 좋아했지.'


맨날 안유리가 신재준에 대한 음담패설을 해도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앞으로 신경쓰이게 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났다.


표정을 구긴채 쳐다보고 있자, 안유리가 시선을 느끼고 뒤돌아봤다.


"어? 뭐냐, 박슬기. 우리가 또 시끄러웠냐?"
"아니, 쉬는 시간인데. 맘껏 해라."
"너도 할래? 판치기."
"난 됐다. 너희들끼리 해라."

'저러다가 나중에 사회 생활 어떻게 하려고, 저렇게 놀고만 있지? 이해 안 가는 년들.'


박슬기는 그들을 지나쳐 맨 앞자리인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공부할 자습서들을 꺼내다가 어느  생각이 번쩍 들었다.

'안유리처럼 신재준 좋아하는 놈들 많겠지. 그놈들 이용하면 되겠네.'

담임이 들어와 아침조회를 시작했다.

아침조회가 끝나고, 1교시가 시작되기  10분 간의 쉬는 시간.

박슬기는 교실 앞문에서 제 친구와 잡담떨던 적당히 못 생긴 여자애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아씨, 뭐야... 헉!"
"아씨?"
"아, 아니... 슬기, 너인줄 모르고..."
"따라와라."
"어? 어..."


못 생긴 여학생은 어깨를  늘어뜨린채 박슬기를 따라 교실을 나섰다.

박슬기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오자, 그 여학생은 자신이 맞을까봐 걱정됐는지 두려운 얼굴이 됐다.


"야."
"어, 어."
"시발년아."
"미, 미안. 슬기야. 내가 잘못했어."

'병신년. 지가 뭘 잘못해.'

박슬기는 자기에게 벌벌 떠는 약자를 내려다보고 비릿하게 웃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부, 부탁?"
"신재준, 알지?"
"어? 어... 그냥 얼굴만..."
"그놈한테 고백하고 와."
"뭐?!"
"왜? 싫어?"
"나, 나 걔 별로 안 좋아하는..."
"하라면 해. 시발년아."

박슬기는 위협을 위해 벽을 발로 찼다.


그 위협에 화들짝 놀라는 여학생이었다.


"고, 고백만 하면 돼?"
"어. 그리고 걔랑 나눈 대화 나한테 다 들려주고 알겠어? 그럼 네가 나한테 잘못한 거. 봐줄게."
"아, 알았어..."


그 여학생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자존심이 상했는지 표정을 굳혔다.

박슬기는 코웃음을 치고, 툭툭 여학생의 뺨을 쳤다.


"왜? 볼라 꼽냐?"
"아, 아, 아, 아니..."
"오늘 안에 고백해라? 나 기다리게 하면 죽을 줄 알아. 알겠어?"
"어, 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