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0화 〉봄개학 (160/201)



〈 160화 〉봄개학

기미정과 우리는 복도로 나왔다.


"나랑 무슨 얘기하려고?"
"그냥? 일상적인 얘기."
"뭐?"
"왜? 안 돼?"


나는 복도를 걷다가 멈췄다.

그러자 다른 4명이 모두  따라 멈췄다.


"흐음... 그러니까. 그냥 나랑 친구하고 싶은 거야, 너?"


딱히 특별한 용무가 없는데 잡담을 떨고 싶은 거라면, 나랑 친구가 되고 싶은 듯했다.


"어."


기미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는 괜히 눈썹을 긁다가 김하늘을 바라봤다.

예쁜 얼굴에 멍이 난 김하늘의 얼굴.

난 다시 기미정을 보고 말했다.


"하늘이한테   없냐?"


기미정은 놀랍게도 김하늘에게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비겁하게 딴년이랑 싸울 때 갑자기 기습해서."

뭔가 내가 생각했던 사과와는 달랐지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기미정의 모습에 안도가 됐다.


'정말 사람이 고쳐졌나보네.'


대단하다, 신재연.

난 김하늘을 쳐다봤다.


사과를 받아들이든 말든, 김하늘의 몫이었다.


그런데 김하늘은 내가 쳐다본 걸 '화해 승낙의 재촉'이라고 받아들였는지, 내키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네. 내가  거 아니다? 비겁하게 기습한 거잖아."
"근데  기습 안 먹였어도 나한테  방일 걸?"
"지랄."

둘 사이에 우정이 오고 가는 대화 잘 들었다.

"하암... 난 그럼 돌아가서 잔다. 졸려서."

나예성은 김빠진 얼굴로 그리 말하더니 교실로 돌아갔다.

소희정과 김하늘은 여전히 기미정이 경계스러운 건지, 떠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5분 정도만 있으면 아침조회 시간이었다.

"나중에 우리랑 놀려면 우리 반에 찾아오든지. 아침조회 시작하겠다. 지금은 돌아가자."
"나중에 쉬는시간에 찾아간다?"
"그러시든지."
"그럼 있다가 봐."


기미정은 그 파란을 일으키며 나를 부른 것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물러났다.

목발 짚은 다리를 힘들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힘들어보였다.

복도를 지나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반은 2층이었다.


'아... 저 다리로 우리가 있는 교실까지 오라고 하긴 좀 그러네...'

내가 가야할까, 기미정의 교실로? 그런데 그건  에반데.

기미정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김하늘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생각해?"
"쟤 다리 아파보여서."
"내가 볼 때, 저거 다 엄살이야."
"뭐?"
"나도 깁스해봐서 알거든. 기억 하나? 나 교통사고 났었던 거."

'신재준'의 기억을 더듬으니 김하늘이 어렸을 때, 자전거 타다가 자와 부딪쳐 다리가 부러졌던 적이 있었다.


"교통사고 당했을 때?"
"어. 나 그때 정강이 뼈 부러졌었거든? 근데 내가 팔힘이 좀 셌잖냐. 다친 다리의 발이 땅바닥에 닿아서 정강이에 무게 쏠리면 아프긴 했는데, 정강이에 무게 쏠리지 않게 팔에 힘 주면 안 아팠어."
"아..."
"이젠 내가 하는 말 알겠지?  힘 무식하게  년이 저렇게 느릿느릿하게 걷는다? 그것도 팔힘조차 없는 척하면서? 다친 건 겨우 손가락인데? 즉, 저거 다 엄살이야."
"내 생각도 그래."

김하늘의 추리에 소희정이 동의했다.

용한 신기를 가진 소희정의 말이니, 김하늘의 추리에 신뢰가 갔다.


"그런데  저런 약한 척하지?"

지금 저게 기미정의 약한 척이라면, 아마 저번주에 우리집에서도 약한 척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설마 나한테 동정사려고? 그래서 날 꼬시려고?'

"너 꼬시려고 그런 거 아닐까."


김하늘이 나와 같은 추리를 했다.


"재준재준쓰. 인기 많네."


김하늘이 입은 웃는데, 눈은 웃지 않은채 말했다.

'그러게.'

난 속으로만 대답했다.

교실로 돌아갔을 때, 호기심이나 질투를 담긴 눈이 나에게 쏟아졌다.


호기심은 여자들이었고, 질투는 남자들이 보내오는 것이었다.

기미정이 일진이긴 했지만 미녀였기에,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신재준'의 기억에 따르면 성연초 시절 때부터 그랬다.

나예성은 엎드려 자고 있다가 담임선생님이 들어와서야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지방 라디오 좀 꺼라."


선생님들이 곧잘 내뱉는 말로 아침 조회가 시작됐다.


대충 출석 체크만 하고 조회가 끝났다.

나예성은 선생님이 나가자 마자 바로 엎드렸다.

아직 1교시가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이 10분 넘게 남았다.


교실의 남자애들이 나한테 다가왔다.

고추놈들한테 둘러싸인 거 기분 더러웠다.


"재준아. 미정이 하고 어떻게 된 거야?"
"하늘이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뭐야, 뭔데."


시발. 얼굴을 보니까 평소에 신재준이 같이 안 어울리고, 공부만 하거나 하니까 근처에서  들으라고 뒷담이나 하는 놈들이었다.

'신재준'이 뭘 하든 말든 관심없어하는 남자애들은 이번에도 그냥 멀찍이서 구경하거나, 자기들끼리 볼 일 보는 중이었다.

'저런 무관심이 차라리 좋은데.'

"우리한테만 말해줘, 응?"

상대해주기 귀찮아서 내가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니까 나예성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시끄러워. 닥쳐, 좀."


나예성의 말에 주위에 모인 놈들의 표정이 썩어들었다. 꼴 보기 좋았다.

"아니, 쉬는 시간인데 떠들 수도 있지..."
"쫑알쫑알 거리지 말고 꺼져. 맨날 뒷담 볼라 까더니 이제와서 친한 척이야."
"..."

나예성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시원히 터뜨려주었다.

내 주위에 몰려있던 놈들은 나예성과 나를 번갈아 노려보더니 물러났다.


"얼굴만 믿고 깝치네."

그중 한 명이 우리 들으라고 중얼거렸다.


지딴에는 욕한 것 같은데 나예성이나 나에게는 그저 칭찬일 따름이었다.

나는 놈들이 떠나자 나예성에게 말했다.

"그말들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마음에 안 들었었거든."
"아무튼 고맙다."
"나 잔다."
"그래."


나예성은 다시 엎드렸다.

나는 핸드폰이 진동해서 꺼내들었다.


(알  없음) [지금 당장 윗층으로 올라가]

그 톡 메시지는 내가 눈을 깜빡한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톡방 자체가 사라지며, 톡방 리스트 화면으로 돌아와버렸다.

짧았던 톡 내용이었기에 금방 외웠다.


'뭐지? 장군님이  그런 톡을...'


장군님이 허튼 소리를 하실 분은 아닐 거였다.

뭔가 위급한 상황이니 '당장'이란 말을 쓰지 않았을까.

난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벗어났다.

"재준아, 어디 가?"
"화장실."
"아, 그래?"


도중에 김하늘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녀는 소희정과 핸드폰으로 롤 대회 영상을 보며 토론하고 있었다.

'근데 하늘이는 공부하는 모습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하지.'

'신재준'의 기억에 따르면, 김하늘은 한 번 본 지식은  외우는 타입이라고 했다.

'부럽네. 난 열심히 외워야하는데.'

학습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다면 고생하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두 칸 씩 올라갔다.

앞서 올라가고 있던 여자애 둘의 교복치마가 짧아서 팬티가 다 보였다.


'짧은 치마가 유행이라 개꿀이네. ...아씨. 도대체 뭐 때문에 윗층으로 '당장' 가라는 거지?'

윗층은 하필이면 또 기미정이 속한 교실이 있었다. 기미정의 관련된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렇게 여러 딴 생각과 불안감을 지닌채, 계단을 뛰어올랐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던 여자애 둘을 지나쳤다.


복도로 진입하려고 코너를 돌 때였다.

"앗!"


 여자와 부딪쳤다.


나와 부딪친 여자는 단단히  자리에 서있었기에, 작용 반작용의 법칙으로 부딪친 충격 만큼이나  뒤로 튕겨져 나가게 됐다.

갑작스러운 충돌이라 결국 균형을 잃고 자빠졌다.


딱딱한 대리석 복도 바닥에 꼬리뼈부터 찧으니 이가 갈리도록 아팠다.

"크으윽...!"
"괜찮냐?"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늘씬한 다리 위로 평범한 정도 크기의 가슴을 지나, 예쁘장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박슬기였다.

저번주에 안유리와 싸웠던 것 때문인지 예쁜 얼굴 군데군데 아직 멍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나한테 손을 뻗었다.

나는  손을 잡았다.


가느다란 팔로  가볍게 일으켜세웠다.

"너 되게 가볍네..."
"아, 부딪쳐서 미안하다. 나 가볼게."
"어...? 그래."

나는 박슬기를 지나쳤다. 그러고 나서 깨달았는데 나는 기미정이  반인지 몰랐다.

그래서 계단과 가까운 교실부터 창문 너머로 살피기 시작했다.


2개의 교실을 살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장군님이 혹시 힌트라도 줬나 싶어서 확인해봤다.

(알 수 없음) [미션 컴플리트]

'예?'


이게 무슨 뜻일까. '임무 완료'라는 뜻의 영어인 것은 알겠는데, 내가 뭘 했다고 임무 완료라고 말씀하신 건지, 그 말뜻을  모르겠다.


그리고 16세기 조선시대 사람인 장군님이 어째서 영어를...  어울리게.

'쓰실 수도 있겠지...'

글로벌 시대니까.


'일단 무슨 상황이 있었는데, 내가 그걸 해결한 건가? 계단으로 올라오면서?'

나는 가만히 멈춰서 고민을 시작했다.

'이 층으로 올라오면서 내가 뭘 했더라...'

여자애 둘의 팬티를 훔쳐보고, 박슬기와 부딪쳐 넘어졌었다. 그리고 자빠졌다. 그때 부딪친 꼬리뼈가 아직도 아파왔다.

사실 그 순간에도 엄청 아팠는데,  팔려서 고통을 무시하고 얼른 일어난 것이었다.


'설마 기미정이 아니라 박슬기가 문제였나? 장군님은 나보고 박슬기랑 부딪치라고, 얼른 윗층으로 올라가라고 시킨 거고? 왜지? 아, 그러고 보니 박슬기는 1반이라서 나와 같은 3층에 교실이 있는데 왜 4층에 올라온 거지?'


"뭐하냐?"


나는 바로 뒤에서 들려온 박슬기의 물음에 흠칫 했다.


"뭘 그렇게 놀래?"


박슬기가 놀란 내 모습이 웃겼는지 웃음을 흘렸다.


"아니, 평소 너랑 나 아무 말도 안 하잖아. 그런데 갑자기 말 걸어오니까 놀라지."

놀란 속마음과 다르게 내 목소리는 꽤나 침착했다.

그동안 연기를 많이 해와서 그런가.

"다치지 않았나 싶어서. 꼬리뼈부터 넘어진 거 같았는데 괜찮냐?"
"괜찮아. 좀 아프지만."
"좀 아픈 거 정도면 괜찮은 거네. 골절이었으면 아파 뒤질 텐데. 근데 2층에는 왜 올라왔냐?"


장군님이 올라오라고 시켜서 올라왔는데, 왜 올라오라고 시켰는지 몰라서 나도 잘 모르겠다.

"그 이유를 너한테 말해줘야 돼?"
"혹시 기미정이라도 보러 왔냐? 시발년이.  빌렸으면 갚아야 하는데, 또 미루네."
"아..."

박슬기가 2층에 왜 올라왔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오랜 등교거부를 끝내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등교한 기미정이었다.

그 기미정한테 돈을 빌려줬던 박슬기는 채무이행을 강요하러 기미정네 교실을 찾아갔던 모양이었다.

'기미정... 뭔 말도 안 되는, 도의적 책임 지라는 개소릴 하면서 나한테 응급실 비용 내라고 했었지. 게다가 지가 박슬기한테 돈 빌려놓고는, 박슬기한테는 나한테 그 돈 받으라고 헛소리 했었고.'


기미정한테 그 헛소리를 들은 박슬기는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나한테 물어본 적 있었다. 내가 기미정 대신 갚을 거냐고. 물론, 그때 난 아니라고 했다.

"어쨌든 다치진 않은 모양이네."
"너한테 걱정 받을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가서 치료비 달라고 하지 마라."
"혹시나 나중에 꼬리뼈 금 갔다고 하면 치료비 청구할 건데."
"...그러든지."

박슬기는 나와 할 말이 더 이상 없었는지, 등을 보였다.


'미션 컴플리트 라니까, 나도 이젠 2층에서 볼 일 없는 거네. 그래도 좀 있다가 내려갈까.'


박슬기와 같이 3층으로 내려가는 건  꺼려졌다.


내가 박슬기와 같이 걷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김하늘이 의부증이 발동할지 몰랐다. 조심해야지.

박슬기의 짧은 치마 아래로 쭉뻗은 다리 뒷태를 구경하고 있자니, 그녀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나는 그녀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고, 시선을 올렸다.

"아, 맞다."
"뭐, 왜."
"네 동생 신재희. 그 여자랑 다시 동행시켜, 등하교 할 때 말이야."
"뭐? 심부름센터 여자, 말하는 거야?"
"그래. 그것 때문에 일진회 탈퇴 보복 폭행, 못 하고 있는 거였거든."
"아씨... 너희들  그딴 짓을 해야겠냐? 그리고  똑똑하잖아. 다른 일진이 골빈년들인 것과 다르게. 왜 일진 짓하는 거냐."

나는 박슬기처럼 매회 1등을 놓치지 않는 그녀가 일진회에 소속되어있는 게 이해가 안 갔다.

두뇌 지능과 사회 지능은 별개인 걸까? 일진회 경험은 성인이 되었을 때 독이 되면 독이 됐지, 득이 될 것이 전혀 없을 텐데.

"어쨌든 신재희, 동행시켜. 동생 다치는 꼴 보기 싫으면."
"...그래, 어쨌든 고맙다. 조언해줘서."


박슬기는 등을 돌리고 이번에야말로 떠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박슬기의 등을 보며, 그녀가 갑자기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건지 좀처럼 이해가  갔다.

그녀가 학년장으로 있는 일진회가 신재희에게 린치 보복을 강행할 것이란 걸 생각하면, 그녀는 적의 간부였는데.


그 적의 간부가 신재희를 보호하기 위한 조언을 해주니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 왜  조언을 해준 걸까?


이유를 모르니까 찝찝했다.


'아... 쟤는 나예성 좋아하는 것 같았지. 나예성의 절친인 나한테 먼저 점수를 따고, 나예성한테 접근해보려는 건가? 연애에서도 머리를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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