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봄개학
"...알았다."
기미정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다시 깁스신발을 신으려고 하길래,
"잠깐. 내가 신겨줄게."
그건 내가 신겨줬다.
기미정은 현관문을 열고서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뭔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걸음이었다.
나는 과감하게 현관문을 닫아버리지 못했다. 기미정한테 신경을 끄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계속 지켜봤다.
그녀는 집 앞 나무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그녀가 입김을 불었다. 추운 겨울날씨였다. 진짜 몸이 힘든 걸까.
사과하려고 힘든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건가.
내가 너무 매정했나 싶어 한숨을 내뱉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냥 들어와라."
기미정은 천천히 일어나 다시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난 다시 기미정의 깁스신발을 순수 풀어주었다.
"이게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미안."
"미안할 짓을 처음부터 하지 말지."
"그러게..."
나는 결국 기미정을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말았다.
기미정이 집안으로 들어오며 현관문을 닫지 않았다. 내가 닫으려고 했다.
바깥에서 시선이 느껴져 바라보니 집주인 딸과 눈이 마주치게 됐다. 그녀는 신축빌라 계단에 서있었다.
'담배 피러 나왔나?'
집주인 딸이 열심히 파수견 노릇을 해주고 있으니... 까딱 인사는 해줬다.
그러자 집주인 딸도 고개를 까딱이더니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음? 담배 피러 나온 건 아닌가. 나랑 상관은 없겠지.'
현관문을 닫았다.
기미정은 멀뚱히 서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
"어. 근데... 이 목발 끝 지저분한데..."
실외의 더러운 땅바닥을 짚고 왔을 목발이었다.
더군다나 우리집의 장판은 옛날 노란장판이었다. 뭔가에 찍히면 쉽게 찍힌 자국이 남게 될 것이었다.
그 꼴은 보기 싫었다.
"너 집에서는 어떻게 하는데?"
"집에서 쓰는 용으로 목발 따로 있어."
"하아... 그럼 일단 신발장에 기대둬. 어깨 빌려줄테니까."
"어? 어..."
기미정은 신발장에 목발을 두고서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왼쪽 다리와 오른손을 다친 그녀였다. 그덕분에 그녀는 왼쪽 손으로 목발 짚을 수 있었다.
내게 두른 팔은 손가락을 다친 오른쪽이었다. 네 손가락이 깁스돼있고, 엄지 손가락은 자유로웠다.
기미정이 그토록 강해도 여자의 몸이긴 해서 굉장히 부드러웠다. 은은한 향수 냄새도 나고.
그것은 신재연도 마찬가지였으니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내가 왜 널 부축해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역시 나 그냥 돌아갈까?"
"됐어. 여기까지 왔는데. 몸 녹이고 바로 가라."
"응."
부엌 옆방을 지나쳐 큰방에 들어왔다. 그녀를 전기장판 위에 앉혔다.
그녀는 집 내부가 신기한지 둘러보았다.
난 전기장판을 틀고, 보일러 온도를 높여서 작동시켰다. 쿠우웅 소리를 내며 보일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미정을 보고 있노라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청소기라도 돌릴까해서 일어서려는데, 기미정이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 번 사과할게."
"...너 죽을 때 됐냐? 안 어울리게 왜 그래?"
"그러게. 죽음의 위기를 한 번 넘겨서 그런가."
"지금 우리 누나 탓하는 거냐?"
"아니... 오히려 덕분에 정신 차렸달까. 맨날 나 이기는 사람 없다고 생각해서 막 살았는데, 이젠 조심하면서 살려고."
'뭐지? 신재연이 선사한 공포가 그만큼 컸던 건가?'
생각해보면 신재희도 그렇고, 김하늘도 그렇고. 신재연을 엄청 무서워했다. 나는 신재연의 참교육이 잘 먹혀들어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뭐... 잘 됐네.'
기미정이 괜히 뭔가 꿍꿍이가 있어보이진 않았다. 진짜 개심했나 보다. 그래서 나는 기미정 앞인데도 긴장이 풀기로 했다.
"그래, 정신차리고 잘 살아라. 앞으론 사고치지 말고."
"일진도 관두려고."
"오... 그래?"
'진짜 신재연이 사람 하나 만든 건가...'
대다하다, 신재연.
나는 청소기를 밀기 시작했다.
보일러를 틀어뒀기에 처음 들어왔을 때 얼음집이었던 집에 나름 따듯해졌다.
'갑자기 김하늘이나 신재희가 찾아오면 어쩌지? 뭐... 이해해주겠지. 환자가 아프대서 들어오게한 거라고 하면.'
나는 공부방부터 청소기를 돌리고, 큰방으로 나왔다.
기미정이 앉아있던 전기장판을 제외하고 방바닥 위를 청소기로 밀었다.
기미정은 그런 나를 계속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아니."
청소를 마치고, 설거지도 마쳤다. 쓰레기 분리수거도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오기까지 했다.
기미정은 나약한 모습으로 계속 큰방에 앉아있었다.
"이젠 몸 좀 녹이지 않았냐? 그만 가지?"
뭔가... 약자를 핍박하는 악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떨떠름했지만 말할 건 말했다.
그때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내 배는 아니었으니... 그 소리를 낸 사람은 기미정이었다.
"그래, 고마웠다. 나 가본다."
"잠깐만. 너 배고프냐?"
"아니야. 안 배고파."
"그래도 점심시간이잖아. 밥이라도 먹고 갈려?"
보통의 나였다면 안 그랬을 테지만... 신재연의 참교육에 제정신을 차렸다니 대견스러워 밥이라도 먹이고 보내고 싶어졌다.
"그래도 될까...?"
기미정이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폈다.
그 미친년은 어딜 가고, 어디서 실컷 두들겨 맞아 불쌍해보이는 여자만이 남아있었다.
"밥차려줄게. 그거 먹고 좀 착하게 살아라."
"그래."
"떡만두국 먹을래?"
"어, 좋지."
비비고 만두 깜짝 세일하길래 대량으로 구입해둔 게 있었다. 만두들로 냉동고가 꽉차 있었다. 기미정한테 짬처리 좀 시켜야겠다.
만두를 잔뜩 투하한 떡만두국을 끓인 뒤, 큰방에 가져갔다.
테이블을 펼치자 기미정은 깁스한 다리를 편하게 옆으로 뻗었다.
물 반, 만두 반인 만두국의 모습에 기미정이 조금은 기쁜 표정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국그릇에 국자로 만두를 듬뿍 떠주었다.
"땡큐."
나는 이후 내 몫을 떠다가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기미정이 어색하게 숟가락질을 하는 꼴이 보였다.
그녀는 오른손을 다쳐서 왼손을 사용 중이었는데, 아마 오른손잡이였던 모양이었다.
'내가 떠서 먹여주는 건 씹에바겠지.'
그녀가 숟가락질을 불편하게 하든 말든 난 신경끄기로 했다.
"..."
"..."
침묵이 맴돌았다. 딱히 기미정과 친하게 대화나누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난 핸드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보며 식사했다.
내가 한 그릇을 반쯤 다 비웠을 즈음이었다.
도자기 그릇이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난 놀라서 기미정 쪽을 쳐다봤다.
평소 쓰지 않던 손으로 숟가락질하다가 실수한 건지, 그녀는 뜨거운 떡국을 자기 바지에 쏟아붓고 말았다.
"아, 뭐하냐."
난 그녀가 화상입을까봐 걱정돼 얼른 다가갔다.
국은 그녀는 국부 주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사용할 수 있는 왼손으로 자신의 바지를 위로 잡아당겨, 뜨거운 국물이 피부에 최대한 떨어지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뜨거웠는지 기미정은 멍든 얼굴을 찌푸렸다.
"야, 얼른 벗어."
남녀역전된 세계가 아닐지라도, 팔과 다리에 깁스해 거동이 불편한 여자애가 국부 주위에 화상을 위기에 처했다면 바지를 얼른 벗기려고 했을 거였다.
여자쪽도 한순간에 민망함보단, 평생 흉이 질 수 있는 화상의 위협을 더 걱정할 테니까 말이다.
기미정은 허리를 들면서 내가 자신의 바지를 벗기는 것을 보조했다. 팬티가 보였다. 정열적인 색상인 빨간색 팬티였다. 음모 부분이 실루엣이라 음모가 드러나보이는...
'얘는 뭐 이런 야시시한 걸 입고 다니냐. 환자인 애가.'
새하얀 허벅지였다. 그런 허벅지가 누군가에게 맞은 멍자국이 있으니 뭔가 가여워보였다. 이 허벅지의 주인공이 그 '시발년'이자 '미친년'인데도...
"됐어. 이젠 내가 벗을게."
국을 쏟은 바지 부분은 이젠 피부에 안 닿게 됐다.
기미정이 혼자 바지를 벗으려다가 깁스한 다리 때문에, 벗는 게 힘들어보였다.
"야, 그냥 내가 할게."
보다 못한 내가 그녀의 바지를 끝까지 벗겼다.
그녀가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던 터라, 깁스한 다리쪽을 벗기는 것도 별로 힘들진 않았다.
다만 그녀의 팬티를 보았던 것 때문에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미안. 이상한 꼴 보였네."
"아니, 됐어. 실수잖아."
"고맙다. 덕분에 화상 같은 거 안 입었어."
난 그녀가 화상을 안 입었을까 궁금해, 국부 쪽에 시선이 갈뻔한 걸 얼른 고정시켰다.
"다행이네."
난 옷을 보관한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잠깐 기미정과 키가 비슷한 신재연의 바지를 빌려줄까 하다가, 그냥 내 옷을 빌려주기로 했다.
트레이닝바지 하나를 꺼냈다.
난 일부러 기미정의 팬티차림을 보지 않으려고 딴데를 보며 그녀를 향해 바지를 내밀었다.
5초 정도 지나도 그녀가 받질 않자, 그녀가 핸드폰이라도 보고 있나 싶어 말했다.
"받아."
그제야 그녀가 내 바지를 받아채갔다.
"입는 건 혼자 할 수 있지?"
"어."
뒤에서 주섬주섬 그녀가 바지를 입는 소리가 들렸다.
난 슬쩍 뒤를 돌아봐 바닥에 널브러진 기미정의 바지를 붙잡았다.
"이거 세탁기 돌린다?"
"그럼 말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까?"
"이대로 입고 갈 수는 없을 거 아니냐."
"그럼... 빨아주면 고맙고."
난 그녀의 바지를 들고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어제 세탁기를 돌려서 세탁물이 별로 없었다. 물을 최저로 맞춘 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소량 넣고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후우..."
'이게 뭔짓이냐, 진짜.'
그냥 기미정 보고 집에 가라고 할 걸, 괜히 밥 먹고 가라고 했다가 앞으로 몇 시간 더 집에 함께 있게 생겼다.
큰방으로 돌아와보니 기미정은 내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내 짧은 다리에 맞춰진 바지여서, 그녀한테는 기장이 짧았다.
'발목... 예쁘네.'
왼쪽 다리는 종아리부터 발까지 깁스돼 있어 안 보였지만, 오른쪽 다리는 발목이 고스란히 드러나있었다.
기미정이 내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빨리 먹자. 식겠네."
"그래... 이젠 또 쏟지 마라?"
"미안."
"됐어. 실수였을 텐데."
우린 서로 떡만두국을 묵묵히 먹기 시작했다.
난 이번엔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혹시 또 기미정이 실수로 국을 쏟지는 않을까 걱정돼 흘낏거렸다. 어떻게 먹길래 쏟았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뭐야. 의외로 왼손으로 잘 먹네?'
아까는 그냥 실수였나...
"잘 끓였네. 엄청 맛있다."
"너한테 칭찬 받을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고맙다. 맛있게 먹어라."
'기묘하다. 기묘해...'
평생 원수로서 여겨질 것 같았던 기미정과 이렇게 집에서 단둘이 식사도 하게 되고.
기미정의 팬티도 보게 되고. 기미정한테 요리 칭찬도 받고...
오늘 학교에서 수업 받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아니, 집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기미정만 봐도 그녀가 먼저 사과를 하고, 나한테 약한 모습을 계속 비출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집앞에서 봤을 때는, 뭔가 치료비라도 내놓으라고 깽판이라도 벌이려고 온 줄 알았는데...'
"아. 근데 너 우리집은 어떻게 알았냐?"
나는 기미정이 우리집에 찾아온 이유에만 궁금했었지, 어떻게 우리집을 찾아왔는지는 이제야 궁금해졌다.
"재희 친구들한테 물어봤어."
"아하. 일진 후배한테?"
"응, 그렇지."
"근데 이젠 일진 관둘 거라며? 그거 진짜야?"
"진짜로. 그래야 너희도 내 진심을 믿어줄 거 아니냐."
"흐음... 그래, 믿어줄게."
"고맙다."
"근데 너 여태까지 '일진 선배'랍시고 재희 많이 때렸겠다?"
"그렇지..."
기미정은 내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내가 잘못했지. 그래선 안 됐는데."
"그럼 나중에 재희가 분풀이로 너 때린다고 하면 어쩔래?"
"그냥 맞아주려고."
"그래... 그럼 둘이 알아서 해결봐. 아, 하늘이한테도 사과하고."
"응."
기미정이 순해졌다.
기미정의 탈을 쓴 타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 귀... 으, 아프겠다.'
지름이 길었던 귀고리는 기미정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하지만 신재연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어머니에 의해서인지 그 귀고리는 한 쌍 모두 사라져있었다.
대신 갈라진 귓볼을 꼬맨 수술용실은 보는 이가 대신 아플 정도였다.
"그 귀는 우리 누나가 그런 거야?"
"응? 아, 귀? 울엄마가."
"딸의 귀를...? 무서우신 분이네."
"네가 이르지만 않았어도..."
"내 잘못이야?"
"아니... 내 잘못이지. 무조건."
화장실에서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큰방에까지 들려왔다.
우리는 가끔씩 숟가락을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떡만두국을 해치워나갔다.
"야. 근데 이거 네 바지야?"
"어."
"아, 난 또 재희 꺼인 줄."
"내가 입었던 거라 싫냐?"
"아니, 네가 싫어할까봐 그렇지."
"별로 신경 안 써."
밥을 다 먹고 테이블을 치웠다.
난 부엌 옆방으로 가서 가계부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근데 기미정이 혼자 심심할까봐 신경쓰였다.
쟤 집에 가려면 세탁 다 돌리고, 바지를 말리기도 해야할 것이었다.
"할 거 없으면 컴퓨터 해."
"아, 써도 되냐?"
"어. 아, 부축해줄까?"
"부탁할게."
나는 기미정에게 다가가서 몸을 낮췄다. 그녀가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뭐지?'
방금 기미정이 내 목에 건 깁스한 손이 내 가슴을 건드린 것 같았다.
'실수겠지.'
깁스했기에 거리감각이 둔해졌던 것이리라. 그녀도 깁스한 상태기에 손맛도 못 봤을 테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