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봄개학
'근데 날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예성아! 어딨냐?!">
신재준은 나예성을 찾으러 나선 것일 거다. 자신의 뒤를 쫓아온 게 아니라.
그걸 알았기에 신재준이 자신을 좋아할 거란 가설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박슬기는 모태솔로였지만 도끼병 환자는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도끼병 환자였다면, 나예성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착각해 고백했을 터였다. 그러고 나서 빛의 속도로 차였을 게 뻔했다.
'부모님한테 인사하니 마니 하는 것 보면... 떡도 다 쳤겠지. 시발, 개봊같네...'
박슬기는 동정충 기질이 있었다.
첫 경험을 할 때, 자신이 처음이듯 상대방도 처음이어야 했다.
나예성이 동정이 아닐 확률이 높다고 생각되니, 그를 향한 애정이 팍 식어버렸다.
'열 받네...'
박슬기는 '동정인 나예성'을 좋아했던 것이지, '높은 확률로 후다인 나예성'은 별로였다.
그 다음 수업에서도 박슬기는 통 집중을 하지 못했다.
나예성이 아다일까, 후다일까로 고민하느라.
고민할수록 나예성이 후다일 학률 높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였다. 그럴수록 박슬기의 동정충 기질이 나예성에 대한 연심을 야금야금 깎아버렸고, 이윽고 다른 남자를 좋아할 수 있는 '아무 남자 좋아하지 않는 상태'에 접어들었다.
나예성에게 쉽게 빠져든 만큼, 나예성으로부터 쉽게 빠져나간 것이었다.
* * *
기미정은 후배 일진들을 소수문해서 신재희의 집이 어딘지 알아냈다. 물론, 엄지혜와 신재희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후배 일진들에게 경고해뒀다.
'여기가 신재희네 집? 씹거지새끼였네.'
스레트 지붕에 무너져가는 듯한 집이었다. 한 10년 전에 외벽에 녹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것 같은데... 녹색인 색깔도 유치하고, 시간이 지나 군데군데 까지자 흉물처럼 변해 있었다.
그런데 기미정의 꼬라지도 저 집과 마찬가지로 만신창이였다. 손가락은 깁스가 돼있었고, 한쪽 다리도 깁스에 감겨 목발을 짚고 있었다.
셔츠에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갈비뼈 복대가 감겨져 있었다.
얼굴은 멍투성이어서, 그나마 예뻤던 얼굴이 안타깝게 변해있었다.
기미정은 신재연에게 참교육을 당했던 그날, 응급실에서 치료부터 마치고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기미정은 머리를 써서 자신의 아버지를 마중 나오게 해서 같이 집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참교육을 할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자신의 남편이 말리자 때리진 못했다. 신재연이 만들어놓은 기미정의 꼴이 심각하기도 했고.
신재준네 집앞에 나무의자가 하나 있었다. 기미정은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목발을 끌어안았다.
'하아... 이게 뭔 개짓거리냐, 시발.'
신재준과 신재희에게 폭력적으로 접근하는 게 막히자, 이젠 아예 평화적으로 다가기로 했다.
성욕을 풀고는 싶은데, 신재연의 폭력이 무서우니 나름 대책을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평생 힘으로 찍어눌러 원하는 것을 누려온 기미정이었다.
앞으로 '착해진 척'해댈 것이 벌써부터 오글거리고, 속이 느글거렸다.
'신재희는 몰라도, 신재준 그놈은 남자니까... 내가 약한 척 의존하면 마음이 약해질 거야. 그틈을 노려서 나한테 반하게 만들고... 그런 다음엔 내 입맛대로 갖고 놀아야지. 시발놈....'
기미정은 자신의 외모에 자신 있었다.
여태껏 모태솔로였던 것은 못 생겨서가 아니라, 이상형이 너무 특수해서였다.
그 이상형에 딱 맞는 사람이 하필 신재희 뿐이었다. 그런데 '동성애'에 본능적인 혐오를 갖고 있어 결국 사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이상형 리스트에 '신재준'이 추가가 됐다. 심지어 이성이기까지 했다.
'따먹고 싶다...'
기미정은 아랫배가 두근거리는 느꼈다.
그리고 뭔가 마려워지기 시작했다.
'아, 화장실 급한데... 신재준이든, 신재희든 얼른 안 오나.'
신재준을 공략하기 위해, 신재희부터 거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기에 둘 중 누가 먼저 와도 상관없었다.
* * *
한지유는 아까부터 신재준네 집 앞에 앉아있는 여자가 거슬렸다.
'몸이 아주 종합병원 신센데... 그냥 쉬다 가려고 앉은 건가?'
거슬린 이유 첫번째는 담배가 마려운데 요즘 자신의 전용석이 된 저 자리를 낯선 여자가 차지해서였고.
두번째는 저 여자도 '신재준네 집을 기웃거리는 이상한 년'이라고 판단해 쫓아내야할지 고민이 되어서였다.
'집 주위를 괜히 기웃거리지 않는 걸 보면... 그냥 몸이 아파서 쉬다가 가려는가 보지. 담배는 그냥 옥상 가서 피자.'
한지유는 담배와 라이터를 챙기고 집밖으로 나섰다.
겨울의 찬 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으흐... 추워라."
슬리퍼를 신은 다리로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갔다. 신혼부부가 세들어 사는 2층을 지나 옥상에 도착했다. 옥상 난간에 기대 담배불을 붙였다. 니코틴이 흡입되자 정신이 각성됐다.
"후우..."
'저 여잔 대체 뭐지. 교통사고라도 당했나.'
다리 한 쪽에도 깁스, 한 손에도 깁스, 얼굴을 멍으로 가득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거라 나이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키가 큰 걸 보면 성인이지 않을까 싶었다.
'어? 재준이네.'
옥상에 올라와있다보니 멀리까지 내려다보였다. 멀찍이서 다가오는 교복 입은 소년이 신재준임을 알게 되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크... 교복이 역시 최고지. 교복 차림의 재준이 따먹고 싶다...'
한지유는 자신의 미소를 바로 지웠다.
'나한테만 안 대주는 치사한 놈...'
걸레면 걸레답게 가리지 말고 다 받아주지.
'왜 나만...'
"하아..."
한 숨을 쉰 뒤, 필터를 물어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렇다고 강간할 수도 없고. 니미랄...'
아예 손에 닿지 못 한다는 상대라면 이토록 조바심이 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하지면 손에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았다.
신재준은 걸레인데다가, 신재준에게 젖꼭지도 빨리고, 보지도 빨렸던 경험도 있지 않았던가.
그 이후부터 한지유는 공부에 통 집중이 되질 않았다.
간신히 집중이 되긴 하는데... 그렇게 집중하기까지의 시간이 신재준과 그 일이 있기 이전보다 몇 배로 늘어났다.
'도의적으로다가 몸 대줘야하는 거 아니야? 날 심란하게 만들었잖아, 시발놈.'
담배를 피다보니 목에 가래침이 걸렸다. 가래를 끓어올리고 옥상 바닥에 뱉었다.
'근데 저 여자 아직도 있네. 설마 신재준한테 이상한 짓하진 않겠지?'
한지유는 갑자기 한 가지 시나리오가 머리에서 번뜩였다.
저 차에 치인 듯한 비쥬얼의 여자가 신재준을 겁박하려고 구는 거다. 바로 그때 자신이 구해주는 것이다. 그럼 신재준을 감사함에 몸을 대주려고 하고...
'대기탈까...'
슬슬 신재준이 자신의 집앞에 도착할 것이었다. 한지유는 아직 반쯤 남은 담배를 아쉽게 바라보다가 바닥에 버리고, 슬리퍼로 짓이겨 불을 꺼뜨렸다.
계단을 조심히 내려갔다.
마침 신재준과 정체불명의 여자가 마주한 상태였다. 둘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너 왜 왔어?"
"사과하려고."
"뭐?"
'둘이 아는 사이였나?'
한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둘의 대화에 더욱 집중했다.
"미안하다. 다신 너랑 재희 안 괴롭힐게. 그 말하러 왔어."
"그래? 근데 우리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 그리고 그냥 학교에서 말하면 됐잖아."
"지금 내 꼴이 이렇잖아... 너희 누나한테 맞아가지고. 학교 다니기 불편해서 쉬고 있어."
'뭐? 재연이한테 저렇게 맞은 거라고? 와... 신재연, 애 하나 죽이려고 했나, 아주...'
한지유는 결심했다. 신재연한테 까불지 않기로.
무서워하서 그런 게 아니라, 위험해서 그런 거였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사람을 저렇게 후드려 패다니... 가난해서 그런가? 뒤가 없었다. 뒤가 없는 사람은 건드려선 자기만 피해를 입을 거였다.
"알았으니까 돌아가."
"아, 근데 나 화장실 좀 쓰고 싶은데... 물도 마시고 싶고..."
'수작부리네, 저 시발년...'
저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러서 신재연한테 맞았는지 알 것 같았다.
분명 신재준에게 수작 부리다가 걸려서 저꼴이 되었으리라.
그런데 저렇게 다친 몸이 되고서도 또 다시 신재준한테 수작을 부리는 것이고.
'재준아, 무시해. 쟤 너 어떻게 하려고 수작부리려는 거야.'
하지만 신재준은 한지유의 바람을 져버렸다.
"하아... 그럼 물 먹고, 화장실만 쓰고 나가."
"응."
'아니... 어째서 집에 들이는 건데? ...아, 알겠다. 신재준 저 놈... 저 년하고도 떡치려 빌드업 세우는 거구나?'
과연 걸레다웠다.
'근데 왜 대체 나만... 아오!'
한지유는 억울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 / /
또깍또깍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목발을 짚고 따라오는 기미정이 내는 소리였다.
'기미정을 우리 집에 들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기미정이 순순히 사과를 해온 데다가, 다친 꼬라지를 보니 가여워서 결국 집에 들이게 됐다.
'신재연... 되게 무섭네. 그 강한 기미정을 저렇게 만들어버렸다고?'
물론, 신재연이 '참교육'에 들어가기 전. 기미정은 이미 자신의 모친에게 얻어맞아 응급실에 갔었던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한테 도의적인 책임을 지라며 치료비 명목으로 금전을 요구했었지.
신재연에게 참교육 받았을 때, 기미정의 컨디션이 베스트 상태는 아니었을 지라도, 그 클라스가 어딜 가진 않았을 거였다. 그런 기미정을 내리 누른 신재연이 두려워졌다.
'절대 '균형' 깨드리지 말아야지... 아, 근데 문 열려면 열쇠 꺼내야 하는데...'
집열쇠는 보일러실에 두고 있었다.
그 열쇠를 기미정 앞에서 꺼내는 것이 께름칙했다.
"열쇠 꺼낼 거라 뒤로 좀 돌아볼래."
"어? 알았다."
기미정은 뒤뚱뒤뚱 움직여 뒤를 돌아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이가 최악이었던 기미정이었는데. 내 말을 순순히 듣는 꼴을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난 보일러실문을 열고 열쇠를 꺼냈다.
'뒤돌아봤어도 내가 보일러실에서 열쇠 찾은 건 기척을 통해 다 알았겠지.'
나중에 열쇠를 놓는 위치를 바꿀까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열쇠를 2개 더 복제해, 가족끼리 한 개씩 들고 다니거나.
현관문을 통해 들어온 그녀는 깁스 신발을 벗기 위해 허리를 숙이려고 했다.
"야. 가만히 있어."
손가락도 부러져서 깁스하고 있는 주제에 뭘 하려는 건지.
나는 몸을 숙였다. 샌달처럼 찍찍이로 깁스를 고정하는 신발이었다.
기미정은 날 내려다보다가 이 집의 내부가 신기한지 둘러보았다.
"화장실은 여기. 아."
문을 열었더니 쥐 한 마리가 화장실 세탁기 뒤로 숨어버렸다.
겨울 추위를 피해서 하수구 구멍이나 세탁기 하수 구멍으로 기어나온 모양이었다. 이 집 화장실에서 쥐를 구경하기 쉬웠다.
"쥐 들어왔냐?"
기미정도 쥐를 봤는지 물었다.
"어, 그래도 상관없지?"
"응."
기미정은 목발을 짚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녀가 몸을 목발에 기댄채, 손을 뻗어 화장실 문을 닫으려고 했다. 내가 대신 닫아주었다.
한참 동안 입고 있던 바지와 팬티를 벗으려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폭포수처럼 오줌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진짜 마렵긴 했나보네.'
나는 교복을 사복을 갈아입고, 컵에 보리차를 따라 부엌 싱크대 위에 올려났다.
아무리 기미정이 사과를 해왔다고 해도, 손님으로서 맞이하긴 싫었다.
큰방에까지는 못 들어오게 하고 떠나보낼 생각이었다.
'물 먹고 가겠지.'
두루마기 휴지를 뜯는 소리가 들렸다. 소변을 본 뒤, 자신의 보지를 닦나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하의를 다시 입는 기척이 들려왔다.
난 바로 옆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장면이 상상되자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는 듯했다.
'상대는 그 기미정이잖아. 뭘 꼴리려고 하냐...'
상대가 '시발년'인 기미정이어서 그런지, 내 자지는 내 의지에 곧 꼬무룩해졌다.
기미정은 목발을 짚으며 화장실문을 열었다.
내가 부엌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그녀의 멍들고 부운 눈가가 커졌다.
"여기 물."
"아, 고맙다."
기미정은 물컵을 받아다가 목을 축였다. 그리고 내게 컵을 돌려줬다.
"이젠 가라."
"후우... 미안한데. 조금만 몸 좀 녹이고 가면 안 되냐?"
"뭔 개수작이야?"
"개수작이라니. 너무하네. 나 다친 거 안 보이냐?"
"우리 누나한테 처 맞았겠지. 그런데 네가 왜 처 맞았는지 잊었냐? 화장실도 빌려주고, 물도 챙겨줬잖아. 이 정도면 내가 엄청 착한 거 같은데... 가라, 이젠."
기미정은 꼴도 보기 싫은 여자였다.
신재희와 김하늘을 때렸던 년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