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봄개학
'내가 이겼네.'
박슬기는 쉬는 시간이 되자 마자 교실을 빠져나가는 안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별 것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시발년이.'
박슬기도 사실 안유리가 짜증나긴 했다. '친구 사이'끼리 할 수 있는 장난을 걸어오긴 하는데, 묘하게 감정이 실려있는 것 같달까.
시비걸 듯, 아니듯 하는 장난을 안유리에게 매번 받는 게 아니꼬왔다.
그래서 언제 한 번 밟아줘야겠단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잘 밟은 것 같았다.
쉬는 시간도 이용해서 공부를 해나갔다.
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귀찮아서 남자들처럼 숏컷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나예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긴 머리카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예성이 숏컷을 좋아하는 남자일 수도 있지만, 통계적으로나 확률적으로나 보나 그럴 확률은 적었다.
만약에 나중에 나에성이 숏컷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땐 그때 가서 머리를 자르면 됐다.
공부하다가 눈앞에 침침해져 눈을 꾹 감았다. 그러다가 눈 스트레칭을 위해 먼 곳을 바라보기로 했다.
운동장쪽 창문을 봤다가 박슬기의 두 눈이 커졌다. 나예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예성은 신재준과 함께 교정을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눌지 궁금했다.
각자 서로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 얘기를 하지 않을까?
그 주제에서 나예성이 좋아하는 여자애를 말하길, '박슬기'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박슬기는 멍하니 나예성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나예성이 신재준을 쳐다보려고 고개를 돌리자, 그의 옆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흑백이었던 세계가 컬러풀해지는 듯했다.
박슬기는 신재준과 나예성이 벤치에서 일어서 교실로 돌아가는 것까지 지켜보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고백이라도 해볼까...'
박슬기는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었다. 남학생들에게 고백도 많이 받아봤고, 시내에서 놀다가 남자들에게 전화번호도 많이 따여봤다.
"하아..."
'분명 차이겠지.'
아직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나예성과 그녀의 친밀도는 0에 가까웠다. 이러한 상태에서 고백하면 백전백패일 것이었다.
방금 전에 나예성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상상을 했지만, 그건 당연히 희망회로였으며 망상이었다. 박슬기도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도 여태껏 대화 한 번 못해본 남자들의 고백을 단칼에 거절하지 않았던가.
'그럼 고백은 하지 않는 걸로...'
종이 울렸다. 다음 수업이 진행됐다. 그런데 박슬기는 좀처럼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고백...'
고백해서 나예성과 사귀는 상상이 자꾸 됐다. 장밋빛 상상이었다.
'섹스도 해보고 싶고...'
나예성을 어떻게 잘만 꼬시면 사귀는 것도, 처녀딱지를 떼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박슬기는 그때부터 무수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수업은 듣지 않고 말이다.
나예성에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어느 정도까지 친해지고, 만약에 친해지는 것조차 거부당하면 어떤 방안을 강구해야할지.
친해지면 얼마나 친해져서,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어떻게 어필할 것이며, 고백을 어떤 곳에서 어떤 타이밍에 할지.
50분 내리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박슬기는 자신이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나예성 공략계획'이 제법 그럴 듯하다고 여겨졌다.
그 시뮬레이션대로만 진행하면, 나예성이 자신의 밑에 깔려서 앙앙거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조바심이 생겨났다. 자신의 시뮬레이션대로 나예성을 꼬셔내고 싶었다.
이전까지만 없었던 조바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난 왜 여태까지 가만히 있었지?'
가만히 앉아있으면 나예성이 알아서 자신에게 반해 접근할 줄만 알았다.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행동해야 돼. 그래야 쟁취한다.'
좋은 성적도 공부를 해서 쟁취해냈다.
연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구애를 해서 쟁취해내야 했다.
/ / /
다음번 쉬는 시간에도 나예성은 자지 않고 웬일로 교실 밖으로 나갔다.
내가 왜 나가는지 궁금해하는 시선을 보내자, 그는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펼쳐 전화 받는 시늉을 했다.
'아줌마랑 통화하려나 보네.'
나는 그리 생각하고 잠깐 잠이나 붙일 생각을 했다.
저저번 쉬는 시간에 김하늘에게 뽑혔던 것 때문인지 좀 피곤했다.
그래서 엎드려서 자려고 고개를 옆으로 누었다. 복도를 향해서 누웠는데, 마침 복도 창문으로 박슬기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나는 무시하려고 했다. 박슬기가 어딜 가든 나와 뭔 상황인가. 어차피 지금 상황에선 박슬기한테 따먹힐 수도 없었다.
그냥 지나갈 줄만 알았던 박슬기가 우리반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쳐서 그런지 박슬기가 날 잠시 동안 바라봤다. 나는 시선을 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그녀와 아이컨택을 했다.
박슬기는 곧 나로부터 시선을 떼고, 내 주위를 둘러보더니 걸음을 떼었다.
'저저번 쉬는 시간에 싸울 때도 내 주위를 둘러보다가 얻어맞더니... 왜?'
나는 엎드린 상태에서 생각에 잠겼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신경쓰이나? 내 주위에 있을만한, 박슬기가 신경쓸 사람은...'
있었다. 딱 한 명. 바로 나예성.
'아하. 박슬기가 나예성을 좋아하는구만?'
나예성은 높은 확률로 내 주위에 있기도 하고, 한참 성욕이 혈기왕성한 여고생인 박슬기가 좋아할만한 훤칠한 키에 미남이기도 했다.
난 궁금증도 해결했겠다. 졸려워서 자려다가 몸을 일으켰다.
'지금 나예성이 허현주랑 통화하러 갔는데... 박슬기가 나예성에게 가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내가 막아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말정말로 재수없는 경우지만, 박슬기가 나예성의 전화를 엿들은 것을 통해 '나예성이 20살 많은 아줌마랑 연애 중이고 결혼까지 약속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박슬기가 전교에 소문을 내거나 한다면... 나예성이 학생들 사이에서 뒷담화의 대상이 될지 몰랐다.
'내가 너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긴 한데...'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친구'로서 그런 일을 막아내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소희정과 김하늘을 지나쳐 교실 밖으로 나갔다.
'일단 이쪽으로 갔지... 근데 나예성은 전화하려고 남자화장실에 갔으려나? 아니, 애들이 왔다갔다 하는 화장실에서 애인이랑 밀담하려고 하진 않을 것 같고... 1층으로 내려갔으려나?'
혹시나 싶어 나예성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일단 톡을 남겨놨다.
일단 전화하지 말고 있어보라고.
'촉이 안 좋단 말이지, 촉이...'
약하게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등가죽이 움찔거리고, 주위 온도가 낮아진 느낌이 들었다. 뒷덜미가 서늘했다.
'혹시 이것도 장군님이 알려주시는 건가...'
모르겠다... 일단 걸음을 옮겼다.
1층에 내려왔다.
톡 어플을 슬쩍 보니, 아직 나예성은 내 톡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는데 숫자 '1'이 그대로였다.
학교건물의 현관문 앞과 뒤 모두 나가봐서 바깥을 크게 둘러봤지만 나예성이나 박슬기 모두 보이지 않았다.
'흐음... 난 최선을 다 했지? 못 찾을 것 같은데 그냥 교실로 돌아갈까.'
다시 계단을 오르려고 할 때였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나예성의 답톡일까 싶어서 확인했는데, 이상한 톡 메시지라 표정이 구겨졌다.
(알 수 없음) [강당 쪽]
"뭐지?"
갑자기 핸드폰 화면이 꺼졌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방금 전 '(알 수 없음)'과의 톡방이 아닌, 톡방 리스트가 나타났다.
'헐...'
난 소름이 돋았다.
'장군님이 톡도 하실 줄 아나...'
내가 방금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장군님이 보내신 게 맞을 것 같았다.
난 그 톡 내용을 믿고서 '강당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산사태를 막는 턱에 의해 교묘하게 가려져서, 방금 내가 보지 못한 곳에 박슬기가 서있었다.
슬리퍼의 소리를 죽인채 조용히 다가가니, 나예성이 통화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부모님한테 인사하러 가기로 했잖아. 왜 미루자는 건데?"
'오우쉣... 진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것 같은데...'
난 얼른 말했다.
"예성아! 어딨냐?!"
박슬기가 흠칫해서 날 돌아봤다.
"아, 나 끊을게. 나중에 다시 전화해."
나예성도 내 말을 들어서 주위에 엿들을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는지 통화를 종료했다.
난 박슬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남의 통화를 엿들은 주제에 날 뚱한 눈으로 쳐다봤다. 마치 '왜 내 일을 방해하냐'는 듯한 시선이어서 어이가 없었다.
난 그녀를 지나쳐 나예성을 찾아갔다. 그는 교내 주차장의 구석진 곳에 있었다.
나예성은 기분 나쁘다는 듯, 박슬기를 쳐다봤고 난 그에게 턱짓해서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나예성과 동행하며 떠나다가, 슬쩍 뒤를 보니 박슬기는 등을 보인 채 학교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박슬기가 네 통화 엿듣고 있더라. 뭔가 위험한 말했냐?"
"아니, 그냥 일상적인 대화."
"그... 부모님과 인사, 어쩌구 하지 않았어?"
"그 정도면 일상적인 대화 아니냐? 고딩 커플끼리도 서로의 부모님 껄끄러워하는 거 있잖아."
"아..."
"나도 혹시나 싶어서 누나의 나이 같은 건 얘기하지 않아. 동거나 결혼 얘기도 안 하고. 지금처럼 남이 엿들을 지도 모르니까. 시발, 박슬기 저년은 왜 엿듣고 있었던 거지. 기분 나쁘게."
나예성도 아예 무방비하게 전화를 하던 것은 아니었다. 다 생각이 있었다.
"근데 방금은 위험할 뻔했네..."
"응?"
"나이 어쩌구 말할 뻔했거든. 평소엔 안 그러는데, 지금 전화는 좀 빡쳐서. 도대체 몇 번째 인사를 미루는 건지..."
"하핳..."
나는 허현주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갔다.
원래 세계로 치면 30대 후반 남자가 자신이 임신시킨 고2 여고생의 부모님을 찾아가 인사를 해야하는 격인데... 어지간한 강심장에 철면피가 아니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일 것이었다.
'그럼... 이번 '촉'도 맞았네. '톡'도 맞았고...'
등골이 오싹했던 '촉'.
(알 수 없음)이 보내온 '톡'.
"근데 너 어떻게 위기의 순간을 딱 알았냐? 박슬기가 대놓고 나 스토킹 했냐?"
"그건 아니고... 오늘 갑자기 박슬기가 너 좋아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네가 전화하러 나간 뒤, 얼마 안 가서 박슬기가 교실 앞 지나치는 거 보니 갑자기 '촉'도 안 좋아졌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너 찾으러 내려와봤더니..."
"와... 네 촉이 맞았네."
"그러게 말이다."
"하아... 고맙다."
"고마우면 한 턱 쏘던가."
"그래. 하아... 들켜도 상관은 없지만, 뒤에서 수군거리면 좀 봊 같겠지. 학교 다니는 거."
"아마 그렇겠지?"
나는 나예성의 걱정에 동병상련을 느꼈다.
나도 '내 외도'가 내 여자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중이었으니까.
"시발, 박슬기, 내 타입 아닌데."
"네 타입은 아줌마지..."
"어."
그냥 농담으로 한 번 말해본 건데, 나예성은 단번에 동의해버렸다.
나는 한때, 나예성이 허현주의 돈을 보고 저러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의 즉답도 그렇고, 나예성이 외모가 되니까 돈이 좋았다고 한들, 더 젊고 돈 많은 여자와 사귈 수도 있을 거였다.
이걸 보니 진짜 나예성의 성벽은 '아줌마'인 듯했다.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성벽이네.'
/ / /
박슬기의 표정은 무덤덤했지만, 그 발걸음은 거칠었다.
그녀의 속마음 역시 불규칙적으로 날뛰고 있었다.
'하! 시발. 말문부터 좀 트고, '친구'로서 몇 번 학교에서 놀다가, 시내에서 놀다가 하면서 내 여성스러움을 어필하면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박슬기는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만 시도하면 나예성을 자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태솔로'의 착각이었며, 희망회로였을 따름이었다.
계획은 처음부터 막혔다.
나예성에겐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고, 부모님과 인사하자느니 하는 걸 보면 꽤나 사귄지 오래돼 보였다.
나예성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해도 한 번 대시해볼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의 첫 인상이 안 좋게 남겨버렸다
'신재준... 그놈 때문에...'
나예성의 통화를 엿듣는 게 된 순간, 그 통화를 통해서 정보만 획득한 뒤 물러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재준이 인기척을 드러내는 바람에 나예성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나예성은 자신을 '남자의 통화를 엿듣는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았다.
안 그래도 '일진'이라 일반 남학생인 그가 두려워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더 사귀기 어려워졌다.
"시발."
박슬기가 욕지거리를 내뱉자, 주위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자기들이 시끄러워서 욕한 거라고 지레짐작해서일 것이었다.
'근데... 신재준은 왜 날 뒤따라왔지? 설마 나 좋아하나?'
모태솔로는 대부분 도끼병 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