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봄개학
난 거짓말했다. 어차피 들키지도 않을 테니까.
재벌녀에게 조련당한 적 없었다. 있었다면 원래 세계에서 행복했겠지.
"너도 나처럼 고생이 많았네... 다른 남자들은 몰라. 여자한테 강제로 따먹히는 게 얼마나 처참하고 괴로운 심정인지!"
"나 이젠... 따먹히는 게 아니면 못 느껴. 이쪽 세계의 '오석준'처럼. 넌 어때?"
"...난 다행히 그 정도까진 아니야."
오석준이 나를 안타깝게 쳐다봤다.
나는 양심의 세모가 모두 닳아 없어진 모양이었다. 얼굴 하나 안 찌푸리고 거짓말하는데 찔리는 게 전혀 없었다.
"너 내 엄마는 만났어?"
"신연주?"
"그래."
"만나긴 했는데..."
"조심해라. 그년도 미친년이니까."
"설마 신연주도 근친 강간하려고 드냐?"
난 기분이 팍 상했다.
생긴 게 동안이면 뭐해. 나이 많은 아줌만데. 그리고 어렸을 때, 자식들 버리는 짓이나 하고. 마음에 들지 않은 여자였다.
"그래. 핏줄이 어디 안 가나 봐. 시발년들."
진짜 '신재준'이 '신연주'와 함께 세트로 두 누이를을 욕하는 것인데도, 괜히 울컥하는 심정이 들었다. 내가 '신재연'과 '신재희'에게 호감이 크긴 한가보다.
그래도 그가 겪었을 '불행'을 생각하면, 나는 그의 앞에서 그녀들을 두둔할 수 없었다.
"이쪽 세계의 신연주도 확실히... 그런 낌새가 있긴 하더라. 이쪽 세계의 '신재준'이 어렸을 때, 알몸으로 촬영하고 그랬거든."
"시발년, 나도 그거 원래 세계에서 겪었는데."
생각을 바꾸니, 그가 겪은 일이 '예견'이 될지도 모르겠다.
'균형'이 무너졌을 때, '폭주한' 신재연, 신재희이 무슨 짓들을 저지를지에 대한 예견.
100% 이 세계에서도 똑같이 흘러갈 거라고 할 수 없지만, 참고는 되지 않을까.
신연주에 대해서도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 같으니 들어보자.
"사실 요즘 걱정되네... 너한테 신연주, 신재연, 신재희가 어떤 짓들을 저질렀어? 아, 힘들면 말하지 말고..."
"...어떻게 보면 너랑 몸이 바뀐 덕에 난 행복해지고, 넌 불행해진 거니... 난 그 은혜를 갚아야겠지. 말해줄게."
오석준은 2시간 가까이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설명해줬다.
거의 전부 섹스에 대한 이야기였고,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여서 군대에서 후임병에게 듣는 '여친과의 섹스 얘기' 같아... 솔직히 꼴렸다.
나는 다리를 꼬아서 최대한 발기한 걸 가렸다.
그가 당했던 것들은 '따먹히는 성벽'을 가진 나에게 있어선 꼴리는 것들이었다.
물론, 거기에 '친누이가 저지름'이라는 딱지 붙으니, 나도 그의 불행이 공감가긴 했다.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들이 날 따먹으려고 굴었을 때, 나도 역류성 식도염이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 받았었다.
그렇게 그가 신연주, 신재연, 신재희한테 당했던 것들을 생각하니 한 가지 결심이 들었다.
'절대로 '균형' 깨지면 안 되겠네...'
"평범하게 연애하는 게 소원이었어. 이제야 이룰 수 있게 됐고... 아, 이 세계의 신재연과 신재희이 아직 본 모습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지? 혹시 위험할 것 같으면 말해. 도와줄 테니까."
"그래, 고맙다."
오석준이 먼저 도와준다고 말해서, 내가 저자세로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다.
실컷 도움 받아야지.
'바로 말하긴 그러니. 나중에.'
* * *
성연시로 돌아올 때는 편하게 오석준의 차를 얻어탔다.
'일단 내 편을 하나 만들었고... 아직 부탁하지 않았지만, 부탁만 하면 태연시에 있는 오석준의 집도 내가 쓸 수 있겠지.'
쓸만한 조력자를 구했고, 새로운 활동지에서 쓸 아지트도 구해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편한 이동수단이 필요한데... 원동기 면허 좀 알아봐야겠다.'
타는 방법이야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배달부 일을 한 적 있어서 오토바이 운전에는 이골이 났다.
'근데 원동기 면허 시험은 어려우려나?'
운전면허 1종 보통만 따봐서 모르겠다. 운전면허학원에서 뺑글뺑글 돌고만 있던 원동기 면허 수강생들을 본 적이 있긴 한데.
'집 돌아가면 바로 찾아봐야지.'
집에 도착한 나는 집안일을 했다.
그러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쪽 세계의 '오석준'은 원래는 따먹히는 성벽이 없다가 결국엔 억지로 만들어냈다고 했지... 그나마 다행히네. 원래 세계로 넘어갈 때, 그 성벽을 만들고 가서.'
원래 세계에서의 신재연, 신재희는 엄청 빡세게 신재준을 관리한다고 했다.
외출금지는 기본이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온몸을 구속한다고...
그렇게 구속한 상태에서도 따먹기 위해서 딜도처럼 사용한다고 했다.
'어휴... 난 그 정도로 심각하게 따먹히는 건 싫어.'
너무 하드코어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렇게나 구속된다면 새로운 여자들과의 만나지도 못할 테니 싫었다.
'장난처럼 가볍게 맞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진심으로 저러는 것은 좀.'
무조건 '균형'을 지켜야겠다.
/ / /
박슬기는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나예성이었다.
큰 키에 시원시원한 외모가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성연고에 올라와서 복도에서 실수로 그와 몸을 부딪쳤던 때가 있었다.
픽 하고 넘어져버린 나예성의 나약함을 보고, 그 나약함이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성연중 시절 때, 그와 같은 반이었을 때는 별 생각없었는데...
박슬기는 그가 속한 1학년 4반을 지날 때마다 교실 내부를 훔쳐보며 지나갔다.
'자고 있네...'
나예성은 책상에 엎드리고 있었다. 나예성의 옆자리에는 신재준이 앉아있었다.
신재준은 남자애답게 무릎 담요를 덮고서 쉬는 시간에도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신재준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박슬기도 여자였기에 성욕이 많았다. 자위를 할 때면 가끔 귀여운 외모를 지닌 신재준을 딸감 삼아 자위했다.
자신이 좋다는 여자들이나 대주고 싶어하는 남자 일진이 많았으나, 처녀 만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었다.
박슬기는 자신의 반인 1학년 1반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들어 통화이력을 확인했다.
'흐음... 이 새끼는 백만 원 빌려가고선 잠수탔나? 어이없네.'
'기미정'이 전화를 받지 않는 이력이 쌓이고 있었다.
'이번 달까지 못 갚으면 10% 이자로 내야할 건데...'
오랫동안 안 갚아도 상관없었다. 대신 이자는 확실히 받아낼 생각이었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기미정은 박슬기의 친구가 아니었다.
아니, 박슬기에겐 친구라고 할법한 인물이 없었다.
모두 자신의 아랫것들이고, 자신은 그 위에 서있었다.
박슬기는 자각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녀는 중2병이었다.
그래도 얼굴이 예쁘고 힘도 강하고 공부도 잘 하니, 그녀가 아무리 나대도 누구도 찍 소리내지 못했다. 오히려 다들 그녀가 나대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 시발. 신재준하고 떡치고 싶다."
뒷자리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같은 일진인 안유리이 자신의 친구들 중앙에 앉아있었다.
신재준을 따먹고 싶다고 말한 것은 안유리였다.
목소리가 컸던 탓에 몇몇 남자아이들이 혐오하는 눈으로 안유리를 흘겨봤다.
"난 강성진."
"채태영 귀엽지 않냐?"
"전수민, 그놈도 꼴리잖아."
안유리 주위에서 한 명씩 꼴리는 남자를 언급했다.
박슬기는 입이 간지러웠다. 가서 말하고 싶었다.
'나예성'이 가장 꼴리는 놈이라고.
영웅호색이란 말이 있듯이, 남들 위에 서있는 박슬기가 남자에 대해 짓궂은 말을 하는 건 흠이 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박슬기는 나예성이 꼴린다고 말하기 싫었다.
여태껏 자신이 도도한 이미지를 지켜왔는데, 그걸 깨기가 싫었고,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다른 여자애들 입에서 나쁘게 오르내리는 게 싫었다.
"나예성도 괜찮지 않냐?"
한 여자가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놈 괜찮지. 생긴 것답지 않게 까칠하지만, 막상 본방 들어가면 볼라 잘 해줄 삘."
"크흐... 키 크니까, 거기도 크겠지?"
"낮잠 잘 때 발기한 거 본 적 있는데 좀 크더라."
'시발년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음란패설의 주인공이 되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박슬기가 뒤돌아서 노려보니, 안유리가 얄밉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왜 시끄럽냐?"
"어, 좀 조용히 좀 해라."
"흐음, 알았다. 볼륨 좀 낮추면 되지?"
"그래."
일진회에 서열은 없지만 장은 있었다.
선배 일진의 말을 전달하고, 같은 학년의 일진들이 찐따들 돈 뺏아아모은 돈 중 상납금으로 쓸 돈을 회수하고, 관리하는 학년장이.
박슬기가 바로 그 학년장이었다. 지금은 1학년장이지만, 곧 오는 3월부터는 2학년장이 될 것이었다.
학년장은 돈 관리도 맡고, 선배 일진한테도 쉽게 불려가기에 기피되는 자리였다.
그래서 싸움질만 좋아하는 일진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대표적으로 기미정이 그러했다.
그런데 싸움도 잘하면서 학년장을 하려는 예가 있다면, 바로 '리더'가 되지 않으면 싫은 자존심파였다.
물론, 그런 자존심파는 자리 욕심에 학년장을 옳다구나 맡았다가 질려서 다음 해에 다른 일진에게 학년장을 넘기기 마련이었다.
안유리는 그런 자존심파였다.
중학생 때 한 번 학년장을 맡더니 다시는 학년장을 노리지 않았다.
학년장은 그렇게 귀찮은 일을 떠맡아야 의무가 있지만, 같은 학년 이하인 일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학년장의 말을 무시한다? 그럼 선배 일진들까지 나서서 집단 린치에 들어갔다.
안유리는 자존심이 강해서 박슬기의 명령을 따르는 게 싫었어도, 집단 린치는 당하기 싫어 따른 것이었다.
박슬기는 두 귀에 이어폰을 꽂아 원어민의 영어 문장 발음을 듣기 시작했다.
"야. 신재준 낮잠 잘 때 발기한 거 본 적있냐? 쉬이벌... 볼라 크더라. 크크큭. 아... 그게 전부 들어오면 어떤 기분이려나."
안유리의 목소리는 명령 받은 직후에는 작았으나, 점차 볼륨이 커지기 시작했다.
박슬기가 꽂고 있던 이어폰에 안유리의 말이 새어들어왔지만, 나예성에 대한 음담패설을 하는 게 아니라서 그러려니 했다.
'아니, 참으면 안 되지. 내가 명령했는데 어겼으니.'
조용히 하랬는데, 안유리는 그 명령을 슬그머니 무시했다.
박슬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얼음장 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뒤를 노려봤다.
"조용히 하랬지?"
안유리와 그녀의 친구들 뿐만 아니라 교실 전체가 침묵에 빠졌다.
"시발... 미안하다. 시끄럽게 해서. 학년장이 조용히 하랬는데, 내가 실수해버렸네!"
안유리가 비죽여 웃으며 점점 소리를 높였다.
박슬기는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안유리에 화가 나면서도, 좀 어처구니가 없어서 묻고 말았다.
"뒈질래?"
"너 학년장 떼고, 함 맞짱 까자. 진 새끼가 신재준 포기하는 걸로."
"뭐?"
"뒤로 와, 시발."
"아니, 잠깐. 신재준을 포기하다니? 너 내가 신재준 좋아한다고 생각하냐?"
"...아니야?"
"하."
박슬기는 어이가 없어가지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안 좋아하는데. 신재준, 너나 실컷 따먹어."
"으음? 그럼 너 왜 지금 화났냐?"
"뭐? 네가 내 말 쌩까고 시비거니까 그렇지."
"아... 그, 그럼 왜 신재희 밟는 거 하지 말라고는 왜 했냐? 신재준 여동생이라 그런 거 아니었어?"
"뭔 개솔... 하아... 조사해보니까 그 백호수라는 여자, 성연고 선배야. 일진이었고. 내가 단톡방 공지로 올리지 않았냐? 선배 일진이 보호하는 거 괜히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
정수린, 신재희, 엄지혜가 등하교 할 때 같이 다니는 조폭 같은 여자가 하나 있었다.
처음엔 싸움을 잘하는 기미정을 앞세워 밟으려다가, 백호수가 직접 연락해와 자신이 까마득한 일진 선배임을 밝히며, 절대 자신이 건드는 애들을 건들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보호하는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신재희와, 정수린, 엄지혜는 지금도 학교를 잘 다니고 있었다.
"너... 공지글 안 봤지?"
"아씨. 귀찮게 왜 봐. 아, 아무튼... 네가 신재준 좋아하는 게 아니었구나. 흐흫... 미안미안."
"사과한다고 안 봐줄 건데."
"하아... 시발,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냐. 결국 싸워야겠냐?"
"어. 시발새끼야."
안유리에게 달려든 박슬기가 주먹을 날렸다.
/ / /
"뭐야? 싸움났나?"
김하늘이 복도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잠시 주인이 자리를 비운 내 앞자리에 거꾸로 앉아서 내가 공부하는 걸 의미없이 구경하고 있었다.
등받이를 끌어안고 다리는 양옆으로 쩍 벌린 자세였다.
이 세계의 여자들은 팬티를 '속옷'이라고 여기지 않는 걸까?
쩍벌을 하고 치마속 팬티를 드러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김하늘의 스커트 속을 한 번 스윽 봤다가 복도쪽을 바라봤다.
김하늘의 치마 속은 검은 팬티스타킹에 흰 팬티였다.
복도에는 학생들이 어딘가로 몰려가는 게 보였다.
'여자끼리 싸우겠지? 거칠게 싸우다보면... 옷도 벗겨지려나?'
내 여자들이 포함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자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이라면 구경하며 즐길만 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하늘이 따라서 일어났다.
"구경가게?"
"응."
"오. 고고."
김하늘도 싸움구경할 생각에 신이 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