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5화 〉봄개학 (145/201)



〈 145화 〉봄개학

봄개학 4일차.


2교시가 수학1이었다. 수학과 영어는 성적우수자를 뽑아 따로 우수반이 있었다. 그래서 교실 이동을 해야했다.

'쟤가 박슬기...'


잘 정리된 긴머리카락에 반듯하게 세운 허리. 고집스러운 눈매에 굳게 다문 분홍빛 입술.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가졌지만 싸움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신재연과 기미정만 봐도 가느다란 팔다리를 갖고서 싸움을 잘했다.

가슴은 다소 아쉬웠으나 빈유는 아니고, 나올 만큼 나왔다.

내가 탈아시아적인 신재희와 신재연의 가슴을 매일 봐와서 가슴 크기에 대해 엄격해진 감이 있었다.

'그리고 피부가 계절마다 변하는 체질...은 아니고. 쉽게 피부가 타는 체질.'


'신재준'의 기억에 따르면 박슬기는 여름에는 금방 피부가 타서 까무잡잡해져버렸다. 겨울이 되면 아주 하얀색이 되어버리고.


'집도  살고, 일진에, 공부도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

박슬기는 쉬는 시간인데도 귀에 이어폰을 꽂은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교재가 영어인 것을 보니 영어듣기평가를 하고 있는 듯했다.


겉으로만 보면 순수해보이는 여자애인데, 사실 술담배는 기본이고 애들을 패고 다니는 반전이 있었다.

가슴이 간질간질거렸다.


박슬기한테도 따먹히고 싶었다.


'하아... 참아야 돼.'

나는 적당히 앞자리에 앉았다. 공부하기 좋은 자리였다.


박슬기 역시 앞자리에 앉아있었는데 나와는 좀 떨어져있었다.

김하늘이 내 옆 책상에 교재와 필통을 두고서 앉았다.

"으... 또 앞자리 앉으려고?"

김하늘도 성적우수자였기에 우수반에 속했다. 그렇기에 정수린네 아저씨가 김하늘의 추천을 받고서,  과외선생으로 썼던 것이었다. 김하늘이 공부를 못하는 녀석이었다면, 정수린의 아저씨가 김하늘의 추천에 날 쓰지도 않았을 거였다.

"싫으면 딴데 앉아."
"아니요, 싫지 않습니다..."


그녀는 우는 소리를 냈지만 결국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예성과 소희정은 맨날 나나 김하늘의 숙제를 베끼고, 시험기간에는 벼락치기하는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반이 찢어졌다.

"뭐지?"
"왜?"

김하늘이 옆을 쳐다보며 의문을 표하길래 같은 방향을 쳐다봤다.


박슬기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날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내 앞에 다가온 그녀에게선 시원한 계열의 향수 냄새가 맡아졌다.

그녀와 '신재준'의 사이는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년 동안 수석과 차석을 나눠가진 사이였다. 매번 거르지 않고.


그러면서도 사적으로 친하지 않았다.

"야, 신재준."


물론, 지나가다가 몇  대화 정도 나누는 사이는 됐다.


"왜?"
"기미정이 너한테 돈 받으라는데. 그거 개소리지?"
"어, 개소리 맞아."

'기미정... 설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저번에 응급실 갔다면서 나에게 치료비 명목으로 돈을 달라던 그녀였다.

자기 친구들한테 돈을 빌리기 뭐했던 모양이던데, 결국 박슬기한테 빌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기미정은 박슬기한테 돈을 갚지 않고, 거짓부렁이로 나한테 돈을 받으라고 말을 한 모양이었다.

'설마 박슬기도 나한테 지랄하진 않겠지.'


"하아... 알았다."


박슬기는 기미정과 다르게 상식이 있었다. 그냥 쿨하게 물어보기만 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김하늘이 내 옆에서 눈에 힘을 주고 있다가 풀었다.

"시비거려는 건 줄 알았네... 기미정, 이 미친년이 박슬기한테 돈을 빌렸나보지? 그리고 너한테 받으라고  것 같고."
"그런가 봄."
"재연이 언니한테 맞고도 정신  차렸나, 그년."


'학교 안 나오는 건 재연이한테 맞고 다친 몸을 애들한테 보여주기 쪽팔려서 그런 건가.'

"재연이 언니한테 말해. 참교육 덜 된 것 같다고."
"일단은 두고 보려고. 아직 나랑 재희한테 해꼬지한 건 아니니까."





2교시 수업이 끝나고, 원래의 교실로 돌아갔다.

소희정이 날 보더니 괜히 딴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하늘이 내 팔을  치고 물었다.


"어제 너희 둘이 집에 가다가 소희정이랑 싸웠어? 저년 왜 저래?"
"응? 아니, 그런 거 전혀 없었는데."


어제 학교 끝났을 때, 김하늘의 아버님이 다치셨고, 나예성은 자기 애인이랑 트러블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별 변명  대고도 소희정과 함께 단둘이 갈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 물어보니까 김하늘의 아버님은 사실 크게 다친 게 아니라 연고만 바르면 나을 정도랬고, 나예성은 자신이 오해했다고 했다.


<"울아빠가 슬쩍 베이긴 했는데, 그걸로 뭐에 홀린 것처럼 엄청 엄살부리고 응급실에 갔던 것이더라고.">
<"그냥 누나가 나 옷 사주려고, 드라마 남주가 입었던 옷에 대해 물은 건데. 나는 누나가 나랑 그 남주랑 비교하는  알고 엄청 화났었어.">


둘 모두 귀신의 장난에 떠난 것이었던 듯했다. 악질적인 장난이긴 한데 그래도 두 사람에게 진짜 불행한 일이 생긴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날 수업이 끝나고,  애들에게 혼자 집에 가겠다고 했다.


"왜? 기미정 아직 정신  차린 것 같은데 같이 가지."
"오늘 갈 때 있어서 그래."
"어디 가는데?"
"데이트."


내 대답에 김하늘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가방을 맨 채, 하교할 대기를 타던 소희정도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나예성이 내 등을 밀며 말했다.


"데이트, 잘 해라."
"오냐."


사실, 오늘 데이트 약속이 없었다. 최아란은 아직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애들이 최아란이 회사 있을 시간 아니냐고 물어보면, 반차 썼다고 할 생각이었는데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우선 집에 도착한 나는 보일러가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했다.

보일러실이 조용했다. 보일러가 꺼져있는 걸 보니 신재희가 없다는 것이었다. 추위를 타는 신재희다 보니 보일러를 무조건 돌렸다.


집에 들어가서 얼른 옷만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오늘 만나기로  사람에게 톡을 보냈다.


(나) [지금 가도 될까? 지금 출발하면 1시간 뒤에 도착 예정]

답톡이 오기 전이지만 미리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집에서 먼 버스정류장을 이용할 생각이라 오래 걸어야 했다.

시내 버스정류장은 금방  수 있었지만, 그곳으로 가면 혹시 날 붙잡을 만한 애들을 만날까봐 멀리 떨어진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답톡이 왔다. 오늘 만나기로 한 상대가 오늘 반차를 썼다고 했다. 와도 좋다는 답톡이었다.


태연시로 오르는 버스에 올랐다.

성연시에서 태연시로 가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버스의  자리가 많았다.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까닭에 도중에 잠을 청해 시간을 죽였다.

태연시에 도착한 나는 김하늘이 따겠다고  것처럼 원동기 자격증을 딸까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 도시를 자주 오갈 듯했는데, 매번 왕복 2시간 걸리면 시간 손해가 너무 컸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 시간 소모가 절반 정도는 줄어들 것이었다.


전화가 와서 받았다.

[어디야?]


남자의 목소리였다.

"태연역."
[알았어.]
"근데 너 왜 반말하냐..."
[몸 바뀌고 내가 너보다 나이 많아졌잖아. 오히려 네가 나한테 존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됐다."
[그럼 나 태연역으로 간다.]
"근데 너  타고 올 거냐? 작년까지 고1이었던 놈이 자동차를 몰 지는 않을 테고."
[네 기억을 받았더니 문제없이 되던데? 오토 차량이라 그냥 밟으면 가기도 하고.]
"그래..."


흰색 카니발 차량이 굴러왔다. 눈에 익은 녀석이었다.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내 애마였던 녀석이었다.


그 차는 내가 있던 인도 옆에 멈춰섰다. 조수석에 올라타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너... '신재준'이냐?"
"그러는 넌 '오석준'이고?"

뚱한 표정의 고집 강해보이는 얼굴. 준수한 외모의 남성이었다. 바로 내가 25년 동안 살아온  얼굴이었다.


SNS 메신저를 통해서 만나자고 했더니 승락을 받았다. 서로의 전화번호를 묻지도 않고 교환해냈다. 서로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싶어 네트워크상에서는 중요한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놈은 제법 그럴 듯하게 운전했다. 한 상가 건물의 지하주차장에 주차해 시동을 껐다.

이곳에서 대화하는 것을 누가 엿듣진 못할 것이었다.

 놈을 '오석준'이라고 칭해야할지, '신재준'으로 칭해야할지 갈피가 잘 안 잡혔다.

제3자가 있을 때는 당연히 '오석준'이라고 칭할 것인데, 이렇게 단둘만 있을 때는 두 개의 호칭 모두 사용하기 애매했다.


결국 '오석준'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앞으로도 그를 많이 만날 생각이니까.

"오석준."
"어."

'오석준'의 얼굴을 한 '신재준'이 대답했다.

"너 행복하냐?"
"행복해."

나는 가끔씩 궁금했던 의구심을 해소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근데 너도 다른 세계에서 왔냐?"
"남녀역전된 세계에서 왔냐는 질문이지?"
"어. 굳이 대답 안 해줘도 되겠네..."
"굳이 대답하자면, 맞아. 나도 그쪽 세계에서 왔어."
"그럼 넌, 이쪽 세계의 '신재준의 영혼'이 아닌 거네?"
"그렇겠지. 너 역시 이쪽 세계의 '오석준의 영혼'이 아닐 테고."
"허..."

나는 방금 해소된 줄 알았던 의구심이 다시 생겨났다.


이쪽 세계의 '신재준'은 다른 신체로 빙의된 것을 행복해할까, 불행해할까... 다시금 똑같은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이었다.


"이쪽 세계에 살던 너와 나의 영혼은, 우리가 살던 세계로 넘어갔을까?"
"그야 모르지. 다시 우리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 한 알 수 없을 거 아니냐."
"그런가..."

소희정네 아버님은 내 궁금증을 해결해줄 사람이 '내가 짐작하고 있는 사람'이냐는 것에 '맞다'고 했다.

''모른다, 알 수 없다'가  의구심에 대한 대답인가... 답을 알 수 없으니 앞으로도 궁금해하지도 말라는 해결 방안인 셈인가...'


뭔가... 반쪽짜리 '궁금증 해결' 같았다.

난 갑자기 의심쩍어서 물었다.

"근데 너 원래 세계에서 살 때도 '신재연'이란 '신재희'랑 같이 살았을 거 아니야? 그렇게 '가족'을 잃고 고아가  게 행복해?"
"이쪽 세계의 그년들은 아직 제정신인가 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살던 세계의 '신재연'과 '신재희'는 미친년들이야. 자신들이 '여자'인 것을 무기 삼아서 나를 강간해댔지."


원래 세계와 이쪽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은 거의 비슷한 것 처럼, 활동하는 거 역시 좀 다르지만 비슷하게 흘러갔다.


원래 세계의 대통령이 이쪽 세계에서는 당내 대표에 그치질 않나... 그런 것처럼 원래 세계의 신재준과 이쪽 세계의 신재준이 겪은 일이 다른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원래 세계의 나와 이쪽 세계의 내가 겪은 일이 다르겠지.

"..."


그는 내 반응을 살폈다.


내가 뭐라 반응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우리 세계는 '여자한테 강간 당하는 남자'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러워한다는 걸. 심지어 경찰도 움직이지도 않고. 너도 조심해라."
"아..."
"아... 너한테 '신재연'과 '신재희'가 가족이 아닌 타인이라 오히려 역강간 당하면 좋아하려나?"


난 그 물음에는 일단 말을 아꼈다.


"그럼... 네가 기억하고 있을 '오석준'의 기억. 내가 원래 세계에서 겪었던 것이란 다르겠네?"
"그럴지도... 이쪽 세계의 '오석준'은 힘든 삶을 보냈어."
"뭐?"


난 의외였다.

난 이쪽 세계의 '오석준'도 따먹히는 성벽이 있어서, 학창시절   나쁜 애들에게 따먹히며 산  알았는데.


"이쪽 세계의 '오석준'은... 어땠는데?"
"고아인 탓에 자기 편도 적고 하니... 약점 잡혀서 질 나쁜 애들에 의해 성매매를 하고 다녔나봐. 그게 힘들어서 자살 시도도 여러번 했고. 그러다가 결국 억지로 성벽을 만들어냈어. 자신은 따먹히는 걸 좋아하는 성벽을 갖도록. 생존본능에 의한 것이었지."


'신재준'은 자신의 손목을 풀었다. 칼로 자해한 흉터가 여러개 나있었다.

"허..."

이쪽 세계의 '오석준'은 나와 동일한 성벽이 있긴 했나 보다.


그런데 나는 소프트하게 그냥 어느날 문득 갖게 됐는데, 이쪽의 나는 하드하게 생존하기 위하여 그 성벽을 갖게 된 차이가 있었다.


'생긴 거랑 성장배경이 비슷해도, 소소한 요소들 때문에 완전 다른 사람이  수도 있나 보네...'


그렇다면 눈앞에 '원래 세계의 신재준'도 내가 아는 '이쪽 세계의 신재준'과 많이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니 너도 그 성벽이 있냐...?"
"뭐가? '이쪽 세계의 오석준'처럼 여자한테 따먹히는 성벽?"
"어."


난 앞으로 눈앞에 오석준을 이용해서, 내 성벽을 이 태연시라는 무대에서 이루어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밝힐 필요가 있었다.

"어, 있다..."
"어쩌다가 갖게 됐냐? 그냥 남자인데 이상성욕자라서?"
"성질 나쁜 재벌 손녀한테 약점 잡혔거든... 그래서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히고 조련당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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