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봄개학
'신재준'에 기억을 떠올려보면, 소희정이 '신재준'을 좋아하는 모습은 보인 적 없었다. 이번 봄개학 때, 나한테 반한 것 같았다.
'어? 그런데 지금 소희정에 눈으론 내가 '오석준'으로 보였을 건데... 그러면 '오석준' 얼굴에 반한 건가?'
법당의 문 가리개 너머로 나왔다.
사람 기 눌리는 게 있었던 법당에서, 일반적인 가정집 거실로 나오자 갭이 컸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좀 둘러보니 열린 방문 하나가 있었다. 거기로 가서 보니 소희정이 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서 롤을 하고 있었다.
헤드셋을 끼고 있어서 내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검지를 위로 세워둔 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볼이 내 손가락에 찔렸다.
"아. 뭐하냐..."
내 유치한 장난에 소희정은 짐짓 정색한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게임 재밌냐?"
"어."
소희정은 자신의 헤드폰을 목에 걸어두고,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하며 롤을 했다.
'난 AOS 장르는 왜 재밌는지 모르겠던데.'
롤은 10년 가까이 장수하고 있는 게임이었다.
그 게임이 아직도 전세계인들이 즐기고 있고,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어린 애들도 환장하고 즐기는 게 신기했다.
"재준아, 우리 아빠가 뭐래?"
"그냥. 별 말씀 없으셨는데."
"그래...?"
나는 소희정의 침대에 걸터 앉았다. 혹시 자신의 침구류에 손대는 걸 싫어하려나 싶어 소희정을 봤으나, 날 한 번 흘낏 보곤 신경 껐다.
이 침대를 써도 되는 것 같아 아예 누웠다.
"졸렵냐?"
"아니. 그런 거 있잖아.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고."
"눕고 싶있은 자고 싶어지잖아."
"흐흫, 그래."
난 고개를 베개에 묻어 냄새를 맡아봤다. 소희정이 평소에 쓰는 샴푸향이 은은하게 났다.
"희정아."
"어?"
"내가 아직도 재준이로 보여?"
나름 유명한 공포영화의 명대사를 따라해봤다. 그러자 소희정이 고개를 삐끄덕거리듯 돌렸다.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이었다. 무당 딸인 주제에 귀신인 척하는 장난에 두려워하다니.
"농담이지...?"
"어, 장난. 흐흫, 무서워하는 것 봐."
"아씨..."
"어. 너 죽었다."
"앗."
게임 화면이 회색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소희정이 게임하는 옆모습을 구경했다.
큰 눈을 가진 계란형 얼굴, 큰 키에, 적당히 부푼 가슴에, 여성스럽게 가느다란 팔다리. 새하얀 티셔츠 하나를 입고 있었는데, 검은색 브래지어가 다 비쳤다.
그리고 여고생.
소희정의 외견은 객관적으로 말하면 상당히 꼴렸다.
'소희정이 날 좋아한다면... 그래도 못 먹지. 먹으면 안 되지.'
한참 게임을 하던 소희정이 부시에 자신의 챔피언을 숨겨두고 날 힐끔 쳐다봤다.
누워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복귀시켰다.
소희정의 얼굴이 점차 빨개지기 시작했다.
'내가 쳐다보는 게 부끄러운가... 아.'
나는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소희정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이제야 짐작했다.
원래 세계로 치환하자면, 혈기왕성한 남고생의 방 침대에 최근 호감이 가게 된 여고생이 누워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상황이었다.
'시발... 그냥 아무 생각없이 누운 건데.'
나도 모르게 소희정을 공략하고 있었던 듯했다.
난 누워있던 몸을 세웠다. 재킷 단추를 풀어뒀더니 몸을 세우는 과정에서 재킷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재킷을 똑바로 고쳐올리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소희정이 날 뜨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교복 재킷이 벗겨져도 어차피 안쪽에 교보 조끼를 입고 있어서 볼 것도 없었다.
그러나 '옷이 흘러내려간 것'과 '그 흘러내려간 옷을 고치는 행동한 것' 자체가 그녀를 꼴리게 만든 듯했다.
'음... 나한테 더 빠진 것 같은데... 그래도 설마 고백은 하지 않겠지... 나 여친있는 거 희정이가 알고 있으니까.'
"희정아?"
그녀가 너무 넋이 나가있자 이름을 불렀다.
"또 너 죽었는데."
"아!"
소희정이 얼른 모니터를 쳐다봤다.
같은 팀원들에게 욕을 먹는지, 소희정은 연신 채팅을 치면서 대답을 했다.
"하아... 점심 먹어야지? 나 아빠한테 받은 카드 있어. 그걸로 시켜먹자."
"순대국 먹을까?"
"그럴까?"
소희정은 부활한 챔피언이 정글로 가게끔 오른쪽 클릭해둔채 핸드폰을 조작했다. 배달어플로 시키려는 모양이었다.
"너희 아버님은?"
"원래 나랑 같이 안 먹어."
"그래? 근데 배달부가 너희 집까지 올 때, 좀 싫어하겠다."
우리가 올라왔던 돌계단을 떠올렸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배달하기 위해 올라오려고, 온갖 욕을 하며 올라오지 않을까 싶었다.
"아, 배달부 걱정 안 해도 돼. 집 뒷문으로 나가면 차 타고 올라올 수 있는 언덕길이 나오거든. 손님들은 대부분 그 뒷문으로 올라와."
"아하. 손님 많아?"
오늘은 없던데...
"많진 않고... 대신 큼지막한 손님들이 잘 찾아와."
"어... 국회의원이나 사업가, 이런 사람들?"
"응."
"대단하다..."
하긴... 소희정의 아버님은 용했다. 미래가 점쳐지길 원하는 정치가나 사업가들이 자주 애용할만 하겠다 싶었다.
소희정은 배달 어플로 주문을 완료했는지, 폰을 내려놓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았다.
그런데 아까 내가 말했던 대로, 침대 위에 앉아있으니 자꾸만 눕고 싶어졌다.
'에이. 유혹하든 말든 어차피 나한테 고백도 안 하겠지. 뭔 상관이야.'
나는 그냥 하고 싶은대로 침대에 다시 누웠다. 소희정의 베개를 베고, 핸드폰을 가지고 유튜버 영상이나 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러다가 누워있으니 잠이 왔다.
핸드폰을 오래 봐서 그런지 눈이 침침해졌다.
잠깐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서둘러 누르는 키보드 자판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 그리고 헤드셋에서 새어나오는 게임 소리를 들었다.
일부러 잠들지 않기 위해 그 소리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러한 소리들 사이로, 뭔가를 문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일까, 집중하자니 그 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쓰윽. 쓰윽.
소리가 커지니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칼을 연마석에 긁는 소리였다.
칼가는 소리가 커져갔다. 바로 내 옆에서 칼을 가는 것처럼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소희정이 자판과 마우스를 누르는 소리와 헤드셋에서 나는 게임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됐다.
뭔가 잘못됐다 싶어서 일어나려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정신은 깨어있는데 몸은 안 움직이는 것... 가위에 눌린 것이었다.
'무당집에서 가위에 눌리네...'
나는 가위에 눌리면 무서운 생각을 하고 만다. 그러면 무의식이 귀신의 형상을 만들어내 내 앞에서 쳐다보게끔 만들었다.
옛날 TV 방영물에서 쓰이던 연출처럼, 소복을 입은 여자 귀신이 파란색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모습으로 말이다.
이번에도 파란색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귀신이 나타났다. 난 귀신을 보자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
가위 때문에 만들어진 귀신인 줄 알면서도, 나는 두려움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귀신한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근데... 예쁘네?'
이번에 나타난 귀신은 여군에 어울릴 법한 눈썹이 굵은 미녀였다.
근데 이번 가위에서 만들어진 귀신은 이상했다.
그 귀신은 날 따먹으려는 것처럼 내 다리 쪽으로 향했다.
'오석준'일 때는 꿈에서나마 '따먹히고 싶다'고 했었는데, 결국 꿈 속에서조차 따먹힌 적 없었다.
그런데... '신재준'이 되니 꿈 속에서도 여자한테 따먹히려는 모양이었다.
그 귀신은 내 물건을 입에 물고 쭉쭉 빨았다. 꿈이라서 그런지, 사람이라면 선사해낼 수 없는 쾌락을 주었다. 너무 자극적이라 아플 정도의 쾌락... 나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귀신의 펠라치오가 너무 자극적이라 금방 사정에 도달해버렸다.
아찔한 쾌락을 느끼며 정액을 싸질러지는 쾌감을 느꼈다.
"재준아, 재준아."
내 어깨를 흔드는 기척에 가위가 풀렸고, 눈이 번쩍 뜨여졌다.
"앗. 깜짝아."
나의 가위눌림을 풀어준 소희정이었다. 그녀는 내가 갑자기 눈을 뜬 것에 놀랐는지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하아... 순대국 왔어."
"어? 벌써?"
"40분이나 지났어."
가위눌려서 귀신한테 펠라 받은 거 아주 잠깐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잠들어버린지 시간이 많이 흘러가있었다.
난 꿈 속에서 발기하고, 사정했던 걸 깨닫고 아랫도리를 쳐다봤다.
의외로 발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축축한 느낌도 없는 걸 보니까 현실에선 실제로 싸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휴. 다행이네.'
소희정의 집에서 씻지도 못했을 것이라 하루 종일 찝찝했을 뻔했다.
거실에다가 테이블을 펼쳤다.
플라스틱으로 된 피크닉 바스켓을 열고 그안에 내용물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랩으로 포장된 순대국 뚝배기 2개와 일회용 수저, 깍두기와 김치, 밥과 다대기, 새우젓을 꺼냈다.
'프렌차이즈 순대국집이 아니라 시장 순대국집에서 시켰나보네.'
기분탓일까. 시장 순대국집이라 그런지 건지의 양이 풍족했다. 국물 가득 곱창, 염통, 머릿고기, 순대 등이 차있었다.
맛도 좋아서 흡입했다.
"재, 재준아?"
"어?"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난 아무런 생각없이 평소처럼 먹은 것뿐인데? 소희정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그러다가 소희정의 순대국은 양이 별로 줄지 않았는데, 내 몫의 순대국은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입가에 이물질이 느껴져 손가락으로 확인해보니 순대국의 국물이었다.
"휴, 휴지 줄게."
소희정이 내민 휴지로 입가를 닦았다.
순대국물은 내 코와 턱에도 묻어있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먹었길래 국물이 이렇게까지 튀었는지 모르겠다.
난 이번에... '귀신에 홀린 느낌'이 뭔지 자각했다.
뭔가 두려운데, 두렵지도 않은 듯한 묘한 느낌...
난 이번엔 일부러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팠다.
'왜 이러지?'
'신재준'의 몸은 입이 짧아서 얼마 안 먹으면 금방 배가 부른 체질이었다.
양이 많았던 순대국을 다 먹어치웠는데도 여전히 배가 고팠다.
위장에서 밥을 달라고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내 것도 먹을래?"
"어."
나는 소희정이 먹다가만 순대국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아직 부족했다.
"하아..."
"아, 아빠?"
뒤에서 들린 한숨 소리는 소희정의 아버님이 낸 것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대신 사과하마."
"네? 뭐가요?"
그가 갑자기 나한테 사과를 했다. 난 그가 사과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먹고 싶은 거 없냐? 다 말해, 시켜줄게."
"아, 아빠? 무슨 일이에요?"
"있어, 그런 게."
나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나한테 미안해하는 그에게 먹고 싶은 것을 전부 말했다.
배달 떡볶이, 햄버거, 피자, 배달 삼겹살, 짜장면, 짬뽕, 탕수육, 양장피, 치킨, 족발, 보쌈...
"희정아, 시켜줘."
"지, 진짜로요?"
"어."
난 소희정을 노려봤다. 배고파 죽겠는데, 음식 주문을 망설이는 소희정이 아니꼽게 느껴졌다.
소희정이 질린 얼굴로 날 쳐다보다가 배달어플로 음식을 잔뜩 시켰다.
배달 떡볶이가 먼저 왔고, 떡볶이 국물을 흡입하며, 떡과 오뎅을 다 먹어치우니 중국집 음식이 도착했다. 중국집 음식을 다 먹을 즈음, 배달 삼겹살이 왔다.
보통 배달 삼겹살의 사이드메뉴로 오는 상추 샐러드, 백김치 따위는 조금씩 삼겹살과 함께 먹다가 남겨진 것들은 전부 버리는 편인데... 이번엔 너무 배고파서 그것들을 전부다 먹었다.
음식이 오는 족족 다 먹으니 그제야 슬슬 포만감이 들었다.
"아, 아빠... 재준이가 괜찮은 거 맞죠?"
"어. 그냥 기가 빨린 것뿐이라. 먹으면 괜찮아져."
소희정 부녀가 뭐라고 옆에서 자꾸 떠들었다.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얼른 배를 채우고 싶을 뿐이었다. 배가 고팠다.
난 포만감이 들자 제정신을 차렸다.
"허..."
내가 먹어치운 배달용기가 거실 바닥에 쫙 널브러져있었다.
대학 동아리 MT 도중, 식사 이후의 개판을 보고 있는 듯했다.
대충 그 쓰레기 양을 따져보면 양만해도 15인분은 넘을 듯했다.
'이게 다 내 위장으로 들어왔다고...?'
<"그때는 내가 하고 싶어서 말한 게 아니었어. 그냥 지멋대로 입이 움직이더라고. '이 집에선 둘째가 불행을 피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고독했던 아이가 대신 돌아온다!'하고...">
어제 우리집에서 소희정이 말했던 게 떠올랐다.
나도 내가 하고 싶어서 이걸 다 먹은 게 아니었다. 그냥 지멋대로 몸이 움직여서 이 많은 음식을 다 먹게 된 것이었다.
내 배를 내려다보니 과식을 해서 부풀어있긴 하지만, 15인분 이상의 음식이 한번에 다 들어간 부피 같지는 않았다. 그 양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홀쭉한 편이었다.
소희정의 아버님이 구급상자를 뒤지더니 나한테 비타민 가루 같은 게 들었을 것 같은 것을 한 포 꺼내 하나 건넸다.
'무슨 영약, 그런 건가?'
"소화제야. 혹시 탈 날 수 있으니까 먹어둬."
영약은 개뿔, 그냥 건강기능식품이었다.
포에 인쇄된 성분을 보니까, 판토텐산, 비타민B1, 비오틴 등이 들어있는 현대 건강기능식품이었다.
"아빠? 무슨 일인데 그래요? 좀 알려..."
"넌 네 방에 가있어. 무슨 일이었는지 애한테 알려줄테니까."
"아, 네."
소희정은 날 걱정하는 시선을 보내며,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무당 아저씨는 자신의 자신의 뒷목을 두드리며 말했다.
"너 방금 그거 장군님한테 기 뽑혀서 그래."
"예...?"
"하아... 어떤 수단으로 너한테 기 뽑아갔는진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래."
"아..."
그 꿈에서 나왔던 내 정기를 뽑아갔던 여자 귀신이 '이순례' 장군인가, 그 여자 귀신이었나 보다.
난 어처구니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고, 무당 아저씨는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난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 처음에 이 집에 왔을 때, 저 문가리개에서 손 뻗어나왔었는데... 혹시 그 팔도..."
"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보네... 우리집에서 떠나면, 지금 같은 이상한 현상은 더 이상 없을 거니 안심하고. 그만 돌아가 봐. 그리고... 아마 장군님이 널 지켜주실 거다. 어지간한 불운은 피할 수 있을 거야. 네가 단단히 마음에 든 것 같으니..."
"아, 그래요..."
"너도 초자연적인 현상 겪었잖아. 못 믿겠어?"
"아뇨, 믿어요..."
이게 뭘까...
오랜만에 여자한테 따먹히고, 보험이 하나 생긴 듯했다.
그 여자가 귀신이었고, 그 보험도 초자연적인 것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