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봄개학
"미안... 기분 나쁘지?"
나는 별로 기분 나쁘진 않았다.
만약 소희정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히 기분 나빠했을 거였다. 나는 무당이나 귀신 따위를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영적인 일'로 자신의 집에 찾아오라니. 보통 사람 같은 경우라면 질색할 만한 일이긴 했다.
"음... 좀 그렇긴 하네..."
그래서 대답은 일단 그렇게 했다.
'희정이네 아버님한테 뭔 소리 들으려나... 그게 걱정되긴 하네.'
"원래는 아빠한테도 안 말하려고 했는데. 어제 너희집에서 내가 너한테 이상한 소리 했잖아. 괜히 위험한 상태같아서 아빠한테 말해버렸어. 그랬더니 데려오라고 하셨고..."
소희정이 변명처럼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없었는데.
소희정네 집에 가는 길에 우리집을 지나쳤다.
"가방 놓고 올래?"
"음... 아니, 그냥 가자."
신재희가 혼자 집에 있을지도 몰랐다. 괜히 신재희한테 붙잡힐라.
5분 여 더 지났다. 빌라와 빌라 사이로 여고괴담 같은데서 나오는 '여우계단' 같은 돌계단이 나왔다.
'여름 장마철되면 아주 폭포수가 될 것 같은 비쥬얼이네.'
소희정이 앞장서서 올라갔다. 요즘 여고생답게 치마가 짧아서 몇 계단 아래에서 따라올라가니 그 속이 훤히 보였다. 팬티스타킹에 감싸인 팬티는 노란색 이었다.
눈요기를 하며 따라가는데 소희정이 고개를 돌렸다. 난 얼른 치마 속에서 눈을 뗐다.
"너무 우리 아빠가 이상한 말해도, 막 신경 쓰지는 마."
"응."
'그런데 소희정이 신기가 있고, 소희정네 아버님도 신기가 있다면... 소희정은 자기 아빠의 '이상한 말'을 믿겠네?'
소희정처럼 소희정네 아버님도 내가 이상하게 보인다는 말을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소희정보다 더 신기가 강해서 '내 외도'를 눈치챌 지도 모르겠다.
'궁금하긴 하네. 정말 눈치챌 수 있을지.'
계단을 힘들게 올라갔다. 다리가 아프고, 소희정의 치마 속을 보느라 자지가 자꾸 발기하려고 해 참느라 힘들었다.
달동네여서 그런지 오래된 집이 많았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훨씬 상태가 나쁜 집도 쉽게 보였다. 사람이 떠나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도 보였다.
산사태를 막는 턱에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주택재개발구역으로 선정됐음을 알리는 현수막이었다.
'희정이네 집은 새로 지은 편이니 철거하진 않겠지. 그런데 몇 년 동안 시끄럽겠네. 주위에서 철거하랴, 공사하랴.'
卍 마크 스티커를 붙인 현관문이 나왔다.
겉으로 봤을 땐 집이 작아보였다.
현관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좁아서, 한 눈에 보이는 집의 크기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길의 한 쪽에 난간이 세워져있었다. 난간 너머로는 낭떨어지였다. 그 반대쪽은 언덕의 턱이 높게 세워져 벽이 되어있었다.
1층 집인데 지붕 위에 커다란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있었다.
현관문 위에는 LED전광판이 부착돼있었다.
[복 받으세요. 예약한 뒤 방문하세요. 010-4444-4444]
'오우... 엄청 레어한 전화번호 득템하셨네. 근데 무섭게 하필 4의 연속...'
소희정은 디지털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내가 봐도 상관없다는듯 조심성이 없었는데, 난 예의상 그 비밀번호를 쳐다보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 곧장 넓은 거실이 드러났다. 손님 십여 명이 동시에 들어와서 대기해도 넉넉할 정도였다. 지금은 아무도 없었지만.
난방이 잘 되고 있어서 따뜻했다.
거실 반대쪽에도 현관문이 하나 더 있었다. 다른 언덕길로 올라오는 현관문인 듯했다.
거실만 봐서는 이곳이 무당집인지, 일반집인지 구분할 순 없었다.
내부에서 본 집이 컸다. 부엌도 따로 있었고, 화장실을 제외한 방이 5개는 되었다. 그리고 인테리어도 새로 지은 집처럼 깔끔했다.
붉은 색의 문 가리개로 내부가 안 보이는 방이 하나 있었다. 느낌상 저 방에서 귀신을 모시는 듯했다.
그 문 가리개 사이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아, 깜짝아...'
팔과 손가락이 가늘어서 여자의 손 같았다. 그 손은 우릴 보고 들어오라는 건지 손짓을 했다.
"재준아, 들어가자."
그 방 안에 들어가 보니 붉은색의 두루마기 한복에 갓을 쓴 남자가 법당 한 가운데 앉아있었다.
향 냄새가 코에 들어왔다.
법단 위에 향로와 음식이 올려진 그릇이 많았고, 벽을 빙 둘러서 무속화가 걸려있었다.
가장 가운데에 걸린 무속화는 마치 무신처럼 그려진 조선시대 여장군의 그림이었다. '이순례' 장군이려나.
이곳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일반인 입장에서 괜히 기가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영적인 체험'을 해서 그럴까. 긴장을 더 심하게 하게 됐다.
그가 날 돌아봤다. 중년의 미남이었다. 남성답게 얼굴의 선이 굵었다.
지금 보니 그의 어깨는 떡 벌어져있었고, 긴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가락은 굵은 편이었다.
'아씨... 그럼 방금 그 여자 손은 뭐였냐...'
나는 법당을 둘러보았지만 출입구는 내가 방금 들어온 문 뿐이었다.
여자 한 명이 숨을 만한 장소도 안 보였다.
'뭐지. 내가 헛것 본 건가... 아니면 귀신?'
그러고 보니 우리가 방문 앞까지 손짓하던 손이었다.
우리가 문 가리개를 옆으로 치우며 들어왔을 때, 바로 그 손의 주인과 마주쳤어야 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소름이 돋았다.
"너 얼굴이..."
그 역시, 내 얼굴이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희정아. 넌 나가있어라."
"네."
소희정은 날 걱정어린 시선으로 보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쾅!
방문이 저절로 닫혔다.
소희정이 문고리를 잡아당기지 않고 그냥 나갔는데?
폴터가이스트 현상... 같았다.
'아, 아닌가... 희정이가 순간적으로 손잡이 당겼는데 내가 그걸 놓친 걸까...'
"앉아라."
그가 몸을 돌려 법상을 등지고 앉았다.
그의 앞에 작은 상이 있었고, 그 상 건너 손님을 위해 준비된 방석이 있었다.
내가 그 방석에 앉으니 그가 쥘부채를 촥 펼쳤다. 살랑살랑 자신의 얼굴을 향해 부치며, 내 얼굴을 꿰뚫어보듯 노려봤다.
"못된 짓을 하고 다니는구나. 천방지축처럼. 이 세상이 네 안방인 줄 알고."
"..."
설마 내가 저지르고 있는 '외도'를 말하는 걸까?
하지만 아직 주어가 없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힐책이었다.
저렇게 말하는 것이야 누구나 말할 수 있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 저 말을 들었다면, 무당의 말에 놀랄 수도 있었겠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네 반오십, 평생 이루고 싶었던 환경이 되니까 날뛰고 있잖아. 틀려?"
난 그가 '오석준'의 나이가 반오십, 25인 것을 맞춘 것에 놀랐다. 괜히 자세를 자세를 바로 잡게 되었다.
'확실히... 용하네.'
"뭐, 그것만 빼면 문제는 없다. 가봐라."
"네?"
그는 그렇게 축객령을 내리더니 몸을 다시 돌려, 법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바닥을 비비며 자신이 모시는 귀신에게 기도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 내 상태가, 영능력자의 입장에서도 괜찮다는 건가 보네...?'
난 긴장했던 게 안도됐다.
나는 떠나기 위해 다리를 반쯤 세웠다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무당집... 우리집에서 북동쪽이네.'
어제 귀신 들린 소희정이 북동쪽으로 가면 내 궁금증이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신재준'의 영혼이 잘 살고 있는지 궁금했었다. 혹시 무당집에서 물어보라고 했던 걸까?
"저..."
"내가 아니야."
마치 내 마음을 읽어낸 듯, 그가 내 말을 끊고 말했다.
나는 일어나서 그의 등 뒤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희정이 마음 갖고 놀지 마라. 몸을 대주는 거야 괜찮지만."
그가 경고? 아니, 어쩌면 조건부 허락 같은 걸 말했다.
"...희정이한테 관심없어요..."
'희정이한테는 안 따먹힐 겁니다. 위험하니까.'
나는 다른 궁금증이 생겨 물어봤다.
"제가 북동쪽에 가서 만나야할 사람이 제가 지금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까요?"
막상 떠나려니까 궁금한 게 계속 떠올랐다.
그는 내 질문이 귀찮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래."
"저... 제가 그 사람을 만나면 저한테 불이익이 올까요?"
"후우... 너 자꾸 물어보면 복비 내야 돼."
그런데 무당이 '귀신'한테 복비를 받지는 않을 것 같았다. 심지어 그게 남의 육체를 함부로 차지하고 있는 '귀신'한테는.
그렇게 따지면 무당에게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을지라도, '인간'으로 여겨지긴 하는 모양이었다.
"낼 게요."
"내 복비는 비싸."
"아... 얼마 내야하는데요?"
그러고 보니 달동네에 살고 있지만, 돈을 많이 버는지 집이 크고 넓었다.
용한 만큼 찾아오는 손님도 많을 테고, 몇 십 만원 들려나?
"5만 원."
생각만큼 많은 돈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 정도는 이미 수중에 갖고 있었다.
"낼게요."
그가 다시 몸을 돌려 날 쳐다봤다.
"질문이 뭐였지?"
"그... 제가 북동쪽에서 만날 사람이요.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까요?"
그러자 그가 작은 상 위에 쌀알을 뿌려서 점을 보기 시작했다.
'아... 지금 내 질문은 바로 나올 수 없는 거였나 보네.'
여태까지 곧바로 내 상황을 알아채고, 내가 할 질문이 끝내기도 전에 대답했던 그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런 영적인 능력이 발동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보조 스킬로써 쌀점을 사용하는 걸 보니.
"흠... 불길하지만 행복할 거다."
저 말은 그거 아닌가? 좋을 수도 있는데 나쁠 수도 있다는 거잖아...
'뭔가뭔가... 그러네.'
이런 애매한 대답을 들으려고 5만 원을 내야하나? 좀 억울했다. 5만 원이 적은 돈도 아니잖아.
다른 손님이었다면 복비 안 내고 무당집에서 뛰쳐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나야 이 무당 아저씨가 용하다는 걸 아니까, 좀 더 자세한 대답을 갈구하게 됐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순 없을까요...?"
그가 내 관상을 보려는 듯,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넌 여복과 여난을 동시에 타고 났어."
'그건 누구나 알 텐데...'
이 무당 아저씨가 아니더래도, '신재준'의 잘난 얼굴을 보면 열이면 열 다 떠오릴 생각일 것이었다.
자꾸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하니 이 무당 아저씨에 대한 신뢰도나 신비성이 점차 떨어졌다.
"그 사람을 만난다면 여복과 여난이 동시에 찾아올 것이다, 이말이지."
'만약 그렇다면... '오석준'을 찾아갈 만하겠는데...'
혹시 '오석준'을 만나는 게 나한테 불이익이 될까봐 걱정하던 차였다. 특히 나의 성벽을 이루는 것을 방해할까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여전히 그를 만나도 여전히 여복과 여난이 지속될 것이란 걸 보면, 그가 내 성벽을 방해하진 않을 모양이었다.
'마침 새로운 활동지도 필요했어. 날 지켜줄 믿을 만한 사람도 필요했고. 혹시 '오석준'의 몸에 '신재준'의 영혼이 들어가 있고, 나한테 우호적이라면 이용해먹을 수 있을지도.'
'균형'을 지키기 위해 내 성벽을 감추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활동하는 게 나을 듯했다.
"하여간. 넌 좋겠구나. 여자를 밝히는데 여자가 꼬여주니."
여태껏 내가 여자를 밝히는 남창 같은 놈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한 명 생겨나버린 듯했다.
"저 여자, 안 밝히는데요..."
"내숭은."
부정해봤지만 그는 한 마디로 내 입을 다물게 했다.
물론, 그가 '무당'인지라 내 주위 다른 사람들이 그의 말을 쉽게 믿지는 않을 거였다.
애초에 그가 내 주위 사람들한테 말할 리도 없을 테고.
'아, 근데 자기 딸인 소희정한테는 말하려나.'
소희정은 자기 아버지처럼 신기가 있는 만큼, 자기 아버지의 말을 믿을 가능성이 커보였다.
'희정이한테는 내 여성편력을 들킨다고 치면, 흐음...'
그래도 상관없긴 했다. 어차피 소희정은 따먹히지 못할 그림의 떡인데다가, 소희정이 '근거도 없이 자기 무당 아버지의 말만 듣고' 내가 여자 밝힌다는 얘기를 애들한테 떠벌리진 않을 테니까.
난 지갑에서 5만 원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복비였다.
내가 떠날 것을 알아차린 그가 경고했다.
"다시 말하지만, 희정이랑 몸을 섞는 건 괜찮아도 마음을 갖고 놀지는 마라. 알겠냐?"
"아니... 희정이랑 안 할 거라니까요... 마음도 안 갖고 놀 거고..."
"하아... 뭐, 네가 그런다고 해도... 희정이는 혼자 마음고생할 것 같다만."
"예?"
"아니다. 들어가봐."
"네, 안녕히계세요..."
나는 일어나서 법당을 나가다가 그의 말이 뭘 암시하는지 깨달았다.
'희정이가 날 좋아하나보네...'
요즘따라 그냥 내 얼굴이 '영적'으로 신기하게 보여서 쳐다보는 줄 알았더니, 사실 나한테 반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