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봄개학
"하아...! 하아...!"
기미정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기미정은 두려움이 생겨났다.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고, 부어오르고, 뼈가 몇 군데나 부러졌다.
'이건 또 뭔 괴물이야...'
기미정의 어머니도 강했지만, 눈앞에 여자 만큼은 아니었다.
기미정이 어머니한테 도망친 것은 연장이 무서워서 도망친 거라 패배감은 없었다. 어머니가 더 강하긴 했지만 싸우다보면, 이길 수도 있을 같았다.
하지만 눈앞에 여자는 아무리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저 여자가 자신을 죽이진 않을 거란 걸 알기에 계속 덤볐던 것이었다. 신재연을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지금에는 패배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어디서 이런 게 튀어나와서...'
기미정은 신재연이 보자고 했을 때 기대했다. 신재준과 신재희를 닮았을 테니 귀엽고, 작고... 게다가 자신한테 반항적이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170cm 정도로 키가 컸다. 실망이었다.
얼른 박살내놓고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웬 걸. 박살나는 것은 자신이었다.
"졌다는 거 인정해라."
"봊까... 시발."
패배감을 느꼈지만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신재연이 신발로 기미정의 얼굴을 눌렀다.
"윽..."
기미정은 평생 당해본 적 없는 굴욕에 이를 갈았다.
'그리고 신재준하고, 신재희를 따먹기 전에는 절대 포기 못하지...'
"너 내가 만만한가 보네... 좋아. 그럼 제대로 '교육'해주마."
"뭐?"
그럼 지금은 대충 때렸다는 걸까?
아파 죽는 줄 알았는데?
신재연이 몸무게를 실어서 얼굴을 박살 낼 것처럼 힘을 주기 시작했다.
프레스 기계에 짓눌린다면 이런 공포를 느끼게 될까? 뼈가 으스러지다가 결국 박살 날 것 같았다.
"하, 하지마!"
"..."
기미정은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
실제로 죽진 않더래도 이 여자는 분명 '골절'은 시킬 것이 분명했다. 안면 골절은 다른 부위의 골절보다 두려웠다.
기미정은 어젯밤 개빡친 자신의 어머니가 몽키스패너를 들었을 때가 떠올렸다. 그때도 죽을 것 같아서 도망쳤는데 이번 역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신재연에게 짓밟힌 머리는 움직이지 못하고 고정됐다.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졌어! 졌다고!"
"..."
"졌어요, 졌다고요! 아, 시발... 아아악! 신재준이랑 신재희 안 건드릴 테니까 그만 밟으라고!"
신재연이 발에 힘을 뺐다.
기미정은 안도감을 느끼며, 욱씬거리는 관자놀이의 아픔에 눈을 찌푸렸다.
"그 말 지켜라. 안 그러면 진짜 죽여버린다."
신재연은 그렇게 말하고 돈이든 백팩을 챙겨 지하주차장에서 떠났다.
기미정은 패배감과 좌절감, 안도감과 자괴감을 느꼈다. 모두 기미정에게 낯선 감정들이었다.
"아윽...!"
긴장감이 풀리자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고통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지금 당장에도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있는 듯했다.
"시발... 또 병원가야 되잖아."
기미정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지하주차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병원비는... 박슬기한테 빌려야겠다. 시발. 친구한테도 이자 챙기는 년...'
/ / /
나는 신재연에게 전화가 오자 얼른 받았다.
"어, 누나."
[잘 해결한 것 같다. 걔 입으로 너희 괴롭히지 않겠다고 말했어.]
"오... 정말?"
[계속 괴롭히면 누나한테 말해. 그땐 아주 반죽여버릴 거니까.]
"근데 누나, 반차 썼다며. 그럼 이제 집에 올 거야?"
[어. 집에 재희랑 있어?]
"재희는 오늘도 지혜네 간대."
[밖에서 누나랑 놀래?]
"안 돼. 집에 친구 있어. 예성이랑 하늘이랑 희정이."
[그래...]
요즘 같이 다니는 멤버가 집에 와있었다. 다 무너져가는 이 집에 뭐 할 게 있다고.
김하늘과 소희정은 컴퓨터로 롤 프로 경기 동영상을 다시 보고 있었다.
나예성은 끊임없이 핸드폰 타자를 치고 있는 게, 아줌마 여친과 톡을 나누는 듯했다.
내가 전화를 끊자 애들이 전부 나를 쳐다봤다.
"재연 언니 온대?"
김하늘이 물었다. 하루가 지나자 시퍼런 멍이 되어있었다. 멍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어. 기미정, 참교육 완료했다는데."
"역시 재연 언니네..."
옆에서 나예성이 툭 말했다.
"일 해결돼서 다행이네."
"그러게."
아직은 두고 봐야할 듯하지만, 나예성도 그걸 몰라서 한 소리는 아닐 테니 대충 긍정했다.
신재연이 확실히 강하긴 해서 기미정이 일단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거짓말했을 수도 있으니까.
소희정이 말했다.
"하하... 난 집에 가볼게. 생각해보니 오늘 집안 행사가 있었네."
내가 소희정한테 잘 가라고 인사하려는데, 김하늘이 먼저 말했다.
"너 사실 재연이 언니한테 혼난 적 있어서 무서운 건 아니고?"
소희정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내가 물었다.
"희정이, 너 우리 누나한테 혼난 적 있어?"
"으응..."
"킥킥, 얘 너희 집에서 이상한 소리했다가 혼났잖아. 초딩 때 일이라 너 기억 못하는 거 같네."
난 소희정을 쳐다봤다.
신기가 있고 영혼을 볼 줄 아는 그녀였다. 그녀가 했다는 이상한 소리가 뭔지 궁금했다.
'신재준'은 그 '이상한 말'을 크게 인상깊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인지 기억에 없었다. 또한 소희정이 신재연에게 혼났던 기억도 없었다.
소희정이 말했다.
"재준이는 모를거야. 그때는 재희 따라서 놀러왔던 거라."
"아, 그랬나."
김하늘의 기억이 잘못된 거였다.
'신재준'에게 겪지 않은 상황이라, 나도 몰랐던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하고 싶어서 말한 게 아니었어. 그냥 지멋대로 입이 움직이더라고. '이 집에선 둘째가 불행을 피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고독했던 아이가 대신 돌아온다!'하고..."
'오... 씨, 소름돋네...'
소희정은 신기로 초딩 때부터 벌써 '오석준'과 '신재준'의 영혼이 뒤바뀔 것을 예견한 모양이었다.
"그때 재연이 언니한테 그딴 장난 치지 말라고 혼나고, 뒤통수를 세게 맞았더니... 좀 마주치기가 무섭네..."
맞는 소리를 했다가 맞은 꼴이었다.
나는 '신재준'이 어떻게 지내는지 소희정에게 물어보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거렸다.
왠지 소희정이라면 '신재준'의 영혼이 다른 육체로 들어가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지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굳이 알아볼 필요는 없겠지만, 만약 '신재준'이 잘 살고 있다면 내 마음이 편해질 거였다.
소희정의 말은 신뢰가 갔다.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물어봐야겠다.'
신재연이 돌아왔다. 그녀는 내 친구들이 있는 걸 보고 카드를 내밀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시켜먹어."
신재연 앞에서 바짝 긴장하던 소희정은 신재연이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영혼'이나 '미래'에 관련된 건 잘 보면서. 왜 내 '외도'에 대해선 모를까.'
하긴. 신기가 실제로 있는 무당들이 죄다 세상만사를 다 꿰뚫어보면, 이 세상은 무당들이 지배할 것이었다. 자기가 원하지 않을 때 발동하거나, 아니면 아주 간혹 가다가 발동하는가 보지. 그것도 자신이 보고 싶은 걸 보는 게 아닌.
나는 신재연의 몸부터 살폈다. 눈에 띄는 생채기나 다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입고 있는 정장 블라우스와 치마에 먼지가 좀 묻어있고 좀 구겨졌긴 했으나 일상적인 생활로 생긴 정도였다.
"안 싸우고, 말로 타일렀어?"
"싸웠는데? 개박살냈어. 나한테 져가지고 다신 안 괴롭히기로 했어."
'그러고 보니 스타킹 안 신었네. 올 나가서 버린 건가.'
"와, 역시 재연이 언니."
김하늘이 엄지를 척 세웠다.
신재연이 김하늘의 관자놀이에 난 시퍼런 멍을 보더니 말했다.
"계란 문질러."
"넵... 그러고 있습니다."
소희정과 나예성을 힐끗 봤다.
"둘 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넵, 언니."
"네, 누나."
'어색하구만...'
소희정과 나예성도 신재연과 안면은 있지만, 김하늘처럼 어린시절부터 함께 뒤놀진 않았다. 서로 딱히 나눌 화제가 없는지 침묵에 잠겼다.
신재연은 부엌 옆방에 이불을 갖고 나갔다. 나와 친구들이 있는 큰방으로 들어오지 않을 생각같았다.
우리 집은 딱히 개인 방이 없기에, 저런 식으로 옆방으로 피해줘야했다.
나예성은 모르겠지만, 김하늘과 소희정은 확실히 신재연을 어려워하고 있으니 큰방으로 와 있으라고 하기도 뭐했다.
'그래도 밥 오면 같이 먹어야지.'
"점심 뭐 먹을래?"
"짱개?"
"콜."
"난 볶음밥."
내 물음에 김하늘, 소희정, 나예성 순으로 말했다. 나는 애들한테 주문을 다 받은 뒤, 옆방 문을 열었다.
마침 정장을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있던 그녀였다. 맨날 봐도 속옷 차림의 뒷태는 여전히 아찔했다.
남자인 나예성이 나올 지도 모르는데... 남녀역전세계니까, 속옷차림을 다른 남자한테 들켜도 상관없어서 저러는 거 같았다. 위기심이 없었다.
신재연의 속옷을 나말고 다른 남자가 본다면 불쾌할 것이었다. 조심 좀 했으면.
"짱개 먹을 건데, 누나는 뭐 먹을래?"
"나는 먹고 왔어. 너희들끼리 먹어."
"응. 재희한테도 말해줘야 할 텐데. 기미정, 누나가 참교육 시켰다고."
"네가 알려줘."
"알았어. 아, 세트메뉴로 시킬 건데 탕수육 먹어도 돼?"
그녀의 신용카드로 결제할 것이니 물어봤다.
"세트 말고 그냥 탕수육 시켜."
"그랭."
음식이 도착했다. 우리는 한창 클 시기답게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입가에 짜장을 묻힌 김하늘이 물었다.
"재희는 공부 아직도 열심히 한다냐?"
"아, 그거 나도 궁금했다."
볶음밥 한 숟가락 먹고, 짬뽕 국물을 한 숟가락 먹기를 반복하던 나예성이 말했다.
"응, 잘 해. 우리 누나가 아이패드 상품으로 걸어서 더 열심히 하는 듯."
'사실은 아이패드가 아니라 내 몸이 상품이지만...'
"오. 재희쓰, 대견한데쓰."
"다행이네. 잘 됐다."
김하늘이 쌉소리를 하고, 나예성이 진정으로 잘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희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는 내 몫인 짬뽕을 작은 그릇에 덜고, 탕수육도 몇 개 집어다가 옆방에 있는 신재연에게 가져다줬다.
이불에 누워 핸드폰으로 인터넷뉴스를 보던 그녀가 말했다.
"누나, 밥 먹어서 괜찮은데."
"그래도 맛이나 보라고."
"고맙다."
"오늘 고생했어."
"너희를 위한 일인데 고생은 무슨."
"아, 젓가락 줄게."
음식만 가져다 주고, 젓가락은 주지 않은 걸 깨달아 부엌에서 바로 가져다줬다.
큰방으로 들어가자 나예성이 한 마디했다.
"너희 누나, 좋은 사람이네."
나와 신재연의 대화가 큰방까지 다 들려서 그런가 보다.
좋은 사람은 맞긴 한데. 남동생을 강간하는 거 때문에 속시원하게 동의를 못하겠다.
"우리 누나한테 반했냐?"
내가 나예성에게 물었다.
나예성이 괜찮은 친구이기도 하고, 이미 결혼까지 약속한 아줌마가 있다는 걸 알기에 농담을 걸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킥킥, 재연이 언니, 예성이한테 차였네."
김하늘이 신재연을 놀리자 괜히 짜증났다.
"지금 우리말, 누나 다 들릴 건데."
"헉..."
김하늘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었다. 누군가가 입을 다물어도 누군가는 말을 했다.
김하늘과 소희정은 롤 얘기를 하고, 나와 나예성은 간간히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이런 경우를 가끔 겪지 않은가. 계속 시끄럽다가 돌연 모두의 말이 끊겨서 침묵이 깔리는 상황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탕수육을 입에 넣었다. 확실히 '세트' 탕수육이 아닌 '메뉴' 탕수육이라 그런지 살이 더 통통했다.
난 시선을 느껴서 소희정을 찾아봤다.
그녀는 '동영상 일시정지'를 당한 사람처럼 짜장면을 젓가락으로 든 채로 가만히 있었다.
뭔가 초점이 없는 듯한 눈이었다.
소희정은 그 상태로 말했다.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으면 북동쪽으로 가라."
"..."
지금 나온 소희정의 목소리는 평소에 듣던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남자의 목소리였다.
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분탓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집안 온도가 1, 2도 급감한 것 같았다.
"...야, 장난칠래?"
나예성이 소희정을 노려보며 말했다.
소희정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눈을 껌뻑이던 그녀는 잠깐 멍하니 자신이 들고 있던 짜장면을 보곤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소희정은 방금 자신이 뭔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나와 김하늘, 나예성의 시선을 눈치채곤 눈을 크게 떴다.
"아... 나 지금 뭔가 했냐?"
"아니... 여름도 아닌데 자꾸 무서운 장난 칠래?"
나예성은 소희정이 무당 집안의 딸이란 걸 알지만, 소희정의 신기를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는 김하늘을 살폈다. 오히려 김하늘은 소희정의 신기를 믿는 눈치였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김하늘이 소희정에게 물었다.
"너 방금 네가 한 말, 모르겠냐?"
그렇게 말하는 김하늘은 입가에 짜장을 묻히고 있었다. 뭔가... 진지한 분위기이고 무서운 분위기인데 확 깨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