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봄개학
엄지혜는 자신의 무릎에 후시딘을 발랐다.
그러다가 신재희의 이마에 난 혹을 보고 킥킥 웃었다.
"아, 시발. 웃기냐?"
"어. 볼라 웃긴데?"
"아놔, 씨."
신재희는 자신의 이마에 난 혹에서 느껴지는 욱씬거림이 이가 갈렸다.
주먹 두 번 날렸다가 모두 붙잡히고, 기미정한테 이마 박치기를 박고 쓰러졌을 때 죽는 줄 알았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다고 생각했다. 고작 한 대 맞았다고 전의를 잃고 말았다. 그걸 지금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이 움찔할 정도로 자괴감이 들었다.
"야, 웜. 근데 너 일진회 안 관둔다며."
"시발... 안 그래도 후회 중이다."
신재희는 안 그런 척하면서 속으론 기뻤다. 자신의 친구가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따라준 게.
그리고 걱정이 됐다.
"그 언니한테 말해볼게. 너도 나랑 정수린이랑 같이 다녀."
"어, 함 말해봐라. 기미정은 몰라도 딴 일진년들은 겁 먹은 것 같더라."
신재희는 백호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넹, 고갱님.]
"아, 안녕하세요... 뭐 좀 여쭤보려는데요."
[뭔데.]
"제 친구 하나도 저 따라서 일진회 관뒀는데요. 등하교 때 같이 해도 될까요?"
[흐음... 공짜는 안 되는데.]
고작 함께 등학교 해주는 일로 하루에 십 만원씩 타가면서. 애 한 명 추가로 동행하는 게 그렇게 힘들까.
"예, 알겠습니다..."
[아침에 편의점 아메리카노 1잔씩 줘. 그럼 오케이.]
"아, 넵... 그러면 그걸로..."
편의점 아메리카노는 작은 컵으로 1,200원, 큰 컵으로는 1,500원 밖에 하지 않았다. 일진 선배들한테 사들고 간 적이 많은 터라 잘 알고 있었다.
뭔가 동네 언니한테 보호비 명목으로 삥을 뜯기는 느낌이었지만, 1,500원이야 사실 공짜나 다름없는 돈이었다.
[내일 보자.]
"넵."
신재희는 전화를 끊고 엄지혜를 쳐다봤다.
엄지혜는 리세계를 사려는 사람과 오픈 카톡으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전화한 거 들렸냐? 1,500원짜리 편의점 아메리카노 매일 아침마다 사달래."
"뭐, 그 정도면 껌값이네. 차라리 그게 낫다. 공짜로 얻어타는 것도 뭔가 그런데."
"나 공짜로 얻어타는데 별 느낌없던데."
"그건 네가 염치가 없는 거고."
"아, 정수린이랑 친구해주잖아. 친구비 받는 거지."
"와... 사람이 어떻게..."
"넌 이름이 어떻게 엄지혜냐."
"아, 시발. 그 드립 치지 말라고."
엄지혜가 모니터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 이 십새끼..."
"왜?"
"리세계정 연동했으면서 리세계 연동 안 됐다고 구라치네."
"그럼 어떻게?"
"어떡하긴. 선불 받았으니까 그냥 차단하면 돼."
"그러다가 저 새끼가 사기쳤다고 신고하면?"
"계정도 실제로 받았을 건데, 뭣하러 피곤하게 경찰에 신고하겠어. 저거 그냥 내 계정 공짜로 받아먹으려고 저 지랄하는 거야."
"허어. 개새끼네. 근데 얼마짜리 팔았는데?"
"10."
"뭔 리세계가 10만원이나 하냐. 대단하다."
"나름 잘 뽑힌 계정이라... 하, 씨. 그래도 걱정되네. 이 새끼가 네캎이나 마갤에다가 내 사이트 사기꾼이라고 소문낼까봐."
"벌써부터 자영업자의 설움을 느끼는 거냐?"
"그래, 새끼야."
엄지혜는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담배가 마려워진 신재희도 담배를 꺼냈다.
엄지혜가 말했다.
"창문 좀 여시게."
신재희는 자신이 놀러와 있는 만큼 엄지혜가 시킨 것을 따랐다.
창문을 열자 겨울의 찬 바람 확 얼굴을 때렸다.
"야... 너희 오빠한테 말해야되는 거 아니냐?"
"뭘."
"기미정 조심하라고."
"하씨... 괜히 걱정끼칠까봐 그러지. 기미정도 여잔데, 설마 남자를 건드리겠냐?"
신재희는 기미정이 신재준을 건들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건드려도 남자 일진들을 시켜서 괴롭히거나 그러지 직접 나서진 않을 거라고 보았다.
'예성이 오빠도 있고, 김하늘도 있고... 그러니 괜찮겠지.'
남자 일진의 지시에 신재준이 왕따를 당하게 된다고 해도, 신재준을 지키는 이들이 막강하니 안심이 됐다.
"기미정, 그년은 가능할 것 같은데..."
"아, 재수없는 소리 할래."
"그래... 뭐 아무 일도 없겠지."
둘은 사이다병으로 만든 재떨이에 재를 떨어뜨렸다. 병은 담배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아래쪽은 시커먼 담배 국물이 채워져있었다.
신재희는 신재준의 마음이 저렇게 시커만 상태일 거라고 짐작이 갔다.
'신재준 걱정 안 시키려면, 그냥 내가 전학가는 게 나을지도...'
도망가는 것 같아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신재준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몸둘바 모르겠다.
'한 대 맞았다고 전의 잃을 거면서. 뭘 도망치기 싫다고...'
기미정은 정말이지 괴물 같은 힘을 가졌다. 누구든 기미정한테 한 대라도 맞으면 전의를 상실할 거였다. 공원에서의 시비가 붙었던 조폭 3명도 그랬다.
그런 인간병기를 어떻게 무찌를 수가 있을까.
"아..."
"왜?"
"그냥 얻어터져볼까?"
"뭐?"
"심각하게 두들겨 맞고, 기미정을 신고하는 거야."
"그래봤자 정학이나 퇴학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하아... 기미정, 그 거머리 같은 년. 왜 나한테만 지랄이지."
"이건 내 생각인데..."
"응?"
"그년, 레즈비언 아니야?"
"뭐어?"
신재희는 소름돋았다.
기미정이 장난처럼 자신의 젖가슴과 엉덩이를 주무르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서는 손을 씻지도 않은채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렸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전부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기미정이 자신을 '성(性)'적으로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저 괴롭히고 싶은 생각에 그런 짓을 해왔다고만 여겼다.
"아씨. 지랄하지 마. 그년 맨날 소개팅하고 그러더만."
겨울방학 때도 소개팅 나가던 기미정을 시내에서 만났고, 재수없게 걸려서 폐건물의 지하주차장에 끌려가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나도 너처럼 엄청 큰 가슴은 아니지만, 딴년들보단 가슴 크잖냐. 그런데 기미정이 단 한 번도 내 가슴 만진 적 없거든? 엉덩이나 내 얼굴도 안 마졌고. 내 몸을 장난식으로 터치한 적이 없었어. 기합 주려고 때린 거 빼면. 나말고도 기미정이 건드리는 여자애도 없었고. 오직 너만..."
"아씨. 시발아. 말이 되는 소릴 해."
신재희는 닭살이 오른 자신의 팔을 문질렀다.
"기미정이 소개팅 자주 나가긴 하는데, 한 번도 사귄 모습 본 적 없잖냐. 그년이 중학생 때부터 쭉. 일진인 거 거르고 기미정이면 반반하게 생겼는데 안 생기는 게 신기하고, 또 남자 일진 애들 중에도 기미정한테 반해서 고백한 애들 많았는데도 아무하고도 안 사겼고."
엄지혜의 추측은 그럴 듯했다. 그래서 기분만 더 더러워졌다.
'신재준도... 이런 더러운 기분이었을까...'
원하지 않았을 근친 섹스에 그가 기분 더러워했을 거라고는 상상했으나,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살짝 공감이 됐다.
"아씨... 만에 하나 기미정이 동성애자고, 날 좋아한다고 쳐. 그래서 나아지는 게 있냐?"
"몰라."
"아놔..."
"근데 동성애자인 게 들통나면, 쪽팔려서 다른 곳으로 도망칠 지도?"
"뭐?"
"자기한테 동성애 성향 없다는 걸 알리고 싶은지, 일부러 소개팅을 반복했던 년이잖아. 그만큼 자신이 동성애자인 걸 감추고 싶단 거 아니겠어?"
"기미정이 동성애자라고 소문이라도 내자고? 그걸 누가 믿겠냐?"
"그럴 듯한 증거를 내놓으면 되지."
"증거?"
"네가 유혹해서 녹음이라도 해서 퍼뜨리면 되지 않을까."
신재희는 상상했다.
같은 여자인 기미정이 알몸을 한채 덮쳐오는 상상을.
"개역겹네, 샹..."
"아직 기미정이 동성애자인 것도 확정인 것도 아니니까. 벌써부터 그런 상상은 말고"
"시발, 네가 그런 상상하게 만들었잖아."
담배를 다 핀 뒤에 엄지혜가 말했다.
"어쩌면 기미정도 질려서 너한테 신경 꺼버릴 지 모르지 않냐? 게다가 그년도 나름 '선'을 지키면서 애들 괴롭히잖아. 좀만 버티면 너한테 신경 꺼버릴 지도..."
"하아... 그럼 당분간 그냥 괴롭힘 받는 거 참을까."
"근데 역시 기미정이 너한테 동성애 품은 거면 절대 안 그만두겠다."
"아놔, 자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할래? 뒈진다?"
/ / /
김하늘을 떠나보내고 얼마 후, 톡 메시지가 전송됐다.
기미정 [사진을 보냈습니다.]
아스팔트 바닥 위에 눕혀진 신재희의 젖가슴을 신발로 짓밟고 있는 사진이었다. 신재희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이마를 맞은 건지 빨개진 상태였다.
아직 심한 상처는 안 보이지만...
"이 샹년이..."
기미정이 기어이 신재희를 건드렸다. 그리고 그걸 나한테 자랑하듯 보냈다.
난 이성의 끈이 뚝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기미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고, 나와 신재희 앞에서 빌게 만들고 싶었다.
(나) [뭐하자는 거야]
(나) [번호 주면 안 건드린다고 했잖아]
기미정 [난 안 건드려고 했어]
기미정 [근데 지 발로 날 찾아왔네? ㅋㅋㅋㅋ]
기미정 [그리고 신재희가 먼저 날 공격했다고]
기미정 [난 정당방위였어]
"이 말이 사실이라도 해도, 네가 신재희를 먼저 자극했겠지. 시발년..."
신재희는 왜 기미정한테 가서는...
기미정 [신재희, 그만 때릴까?]
(나) [어]
기미정 [그럼 네가 신재희 대신 맞을래?]
"아니, 이런 미친년이..."
진짜 날 때리고 싶어서 이러나?
여자인 주제에 날 때리고 싶은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걱정돼 신재희한테 전화를 걸었다.
[왜, 또.]
"너 지금도 지혜네 집이야?"
[어.]
"기미정이 네 가슴 밟고 있는 사진 보내왔는데. 그거 언제 찍힌 거야?"
[아, 시발년... 그걸 진짜 보냈네... 학교 끝나고 얼마 안 돼서야.]
"왜 말 안 했어."
[네가 걱정할까봐... 죽여버릴거야.]
"됐어. 일단 기미정네 어머님한테 기미정 좀 타일러 달라고 부탁했으니 두고 보자."
[그년 엄마를 찾아갔다고?]
"나랑 하늘이랑...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었어. 기미정을 혼내겠대."
방금 나한테 기미정이 사진과 톡을 보내온 것은 아직 자기의 어머니한테 혼나기 전이라 보낸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걔네 어머님이 혼내는 걸로, 기미정이 안 고쳐지면... 그땐.'
최아란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평범한 대기업의 월급쟁이가 아니라 재벌 회장의 손녀였다.
[하아... 그럼 일단 기다려볼까.]
"어. 근데 넌 많이 안 다쳤지?"
[머리에 혹 좀 놨어. 시발년... 머리가 돌대가리야. 너는? 너야말로 기미정이나 남자 일질들한테 뭐 당하거나 그러진 않았지?]
"안 당했어. 성연고 일진들은 너랑 수린이가 백호수, 그 여자랑 같이 다니는 것 때문에 무서워하고 있어. 물론, 기미정 빼고."
일단 대기하기로 했다.
기미정의 어머니를 믿어보기로 하고 기다림을 가져보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신재연과 최아란이 함께 집에 도착했다.
신재연이 물었다.
"왜 아직도 교복이야?"
"아... 그냥."
재연아. 우리 산책 갔다올게."
최아란이 말하자 신재연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최아란과 길을 걷다가 '옆집'으로 들어갔다.
최아란은 현관문에 들어서기 무섭게 날 신발장으로 밀치며 내 턱을 들었다. 거칠게 혀가 밀고 들어왔고, 그녀의 무릎이 내 다리 사이로 끼어졌다.
내 자지를 압박하는 무릎 자극에 발기가 시작했다.
한참을 나와 타액을 교환하다가 입술을 뗀 그녀였다.
"준아."
"응?"
"무슨 걱정있어?"
"재희를 괴롭히는 애가 있어서."
"누나가 혼내줄까?"
"아직은 말고. 계속 괴롭히면 그때 누나한테 부탁할게."
"흐음... 심각한 괴롭힘이야? 재희가 일진회에서 나왔다며? 그것 때문에 일진회한테 밉보여서 괴롭힘 당하는 거야?"
"응. 조폭 같이 생긴 심부름센터 직원 한 명 구해서, 그 사람이랑 재희가 등하교 같이 하는데. 그 덕분에 거의 모든 일진들은 두려워서 재희 못 건드리고 있어. 근데 유독 한 명이 괴롭히네."
"박살내줄까?"
"아직은... 걔네 부모님한테 말해서 그 애를 혼내달라고 했어. 그거 지켜보려고."
"그게 안 통하면 말해. 누나가 다 해결해줄게. 준이가 나한테 해주는 게 많으니까, 누나도 다 해주고 싶어."
"응..."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도착한 곳은 침실.
내가 옷을 벗으려고 하자, 그녀가 내 손목을 붙잡아서 벌리게 만들었다. 지금 옷을 벗지 말라는 행동에 난 가만히 있었다.
최아란은 내가 입고 있는 교복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녀가 검지 하나를 빙글 돌렸다.
난 몸을 돌려 그녀에게 뒷모습을 보여주웠다.
등 뒤에서 내게 다가온 기척이 들리더니, 내 엉덩이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나? 미쳤어? 변태야?"
다른 곳도 아니고 항문 냄새는 왜 맡는 건지.
내가 질색하며 몸을 떼자 그녀는 무릎을 바닥에 댄 채로 가만히 있었다.
"오늘 수업 받느라 의자에 앉아있었지?"
"그랬지..."
"의자가 부럽다."
"뭐?"
"너랑 스킨십 몇 시간이고 했을 거 아니야? 네 냄새도 맡았을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