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봄개학
"하. 너 네가 남자라는 거 믿고 깝치는 거냐?"
"어."
이 세상은 여자가 남자를 때리면 개양아치 소리를 들었다.
"하..."
내가 대놓고 그 점을 믿는다고 하니, 기미정이 비릿하게 웃었다. 날 때리려는 것처럼 다리를 들어올렸다.
'진짜 때리려나.'
그럼 싸울 생각이었다.
김하늘을 주먹 한 방에 날려버렸던 그 모습이 뇌리에 각인되어있지만, 그다지 무섭지 않았다. 내가 싸움에서 질 테지만 이 사회는 주먹보다 법이 더 강했다.
"그만하지?"
내 앞을 소희정이 가로 막았다.
"씨이발... 오늘 따라 앵기는 새끼들이 왜 이리 많지."
내가 품 속에 안고 있던 김하늘이 눈을 떴다.
"윽..."
그녀가 날 올려다봤다. 눈을 깜빡거리다가 말했다.
"뭐야... 아윽."
김하늘은 자신이 왜 쓰러졌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고미혜와 싸우다가 별안간 기미정한테 맞아서 기절했던 것이니까.
기미정한테 맞은 관자놀이가 퉁퉁 부어올라있었다. 그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아..."
김하늘은 기미정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왜 기절했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비틀비틀거리는 모습이, 곧 바로 쓰러질까봐 걱정됐다.
"하늘아, 병원 가자."
"됐어... 괜찮아... 카악, 퉤."
김하늘은 목 뒤로 넘어가다가 걸린 코피를 가래처럼 뱉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혹시 휴지 있는 사람?"
한 남학생이 휴대용 휴지를 뽑아서 내밀었다.
"고마워."
나는 김하늘의 쌍코피부터 닦아주었다. 고미혜도 다른 학생에게 휴지를 빌려서 자신의 코피를 닦았다.
나는 기미정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 보자고 했다며. 용무가 뭔데?"
"아, 별 건 아니고. 신재희, 그년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재희, 건드리면 죽여버린다."
"큭큭, 무섭다, 무서워."
"재희한테 손가락이라도 까딱하면 경찰 부를 거야."
"걱정마. 우리 재희를 다치게 해도, 딱 내가 정학 먹을 정도까지만 다치게 할게."
"시발년이..."
"너... 좀 혼나야겠다... 볼라 깝치네."
김하늘과 소희정이 내 앞을 막았다.
의외로 고미혜가 기미정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미정아... 볼 일 다 봤으면 나가자."
기미정이 고미혜를 노려봤다. 고미혜가 비굴하게 웃으며 기미정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니면 용무 더 있어? 없잖아..."
"그렇긴 해. 근데 또 생겼어."
기미정이 팔을 털어 고미혜가 손을 놓게 만들었다. 블레이저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녀가 다가오자 김하늘과 소희정이 바짝 붙어서 날 가리게 만들었다.
"신재준, 번호 좀 찍어봐."
"뭐?"
김하늘과 소희정이 만든 벽 너머에서 들려온 기미정의 요구, 뜻박이어서 되묻고 말았다.
"왜? 싫어? 안 그럼 당장에라도 신재희 본나 패러 간다? 웬 무섭게 생긴 년하고 등교를 같이 하기 시작한 모양인데... 그러면 안 팰 줄 알고 그런 거냐? 딴년들은 몰라도 그딴 거 나한테 안 통해."
다른 일진들이 조폭 같이 생긴 백호수를 두려워해, 정수린과 신재희를 건들 생각이 사라졌을지 몰라도. 기미정에게 만큼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기미정은 유일하게 조폭한테 쫄지 않았고, 혼자 3명의 조폭과 싸워 이기기도 했다. 그때 그 조폭들이 싸움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떠나서, 혼자서 성인 3명을 동시에 이겼다는 건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다 보니 백호수가 지키고 있더래도, 혼자 정수린과 김하늘을 패려고 굴 수 있었다.
"하아... 내 번호만 주면 재희를 그냥 놔줄 거야?"
"그건 앞으로 네가 하는 거 봐서."
"뭐?"
'얘도 나 좋아하나.'
그럼 '어장관리'로 조종할 수 있으려나... 신재희와 너무 크게 엮인 대상이다 보니까 따먹히는 것까지는 위험하고... 키스까지 해줄까?
어쨌든 조금 기미정을 상대해주는 것만으로 신재희가 안전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이득이었다. 지금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는 '균형'이 위태로워질지 모르겠는데, 기미정과 섹스까지만 안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재준아, 그냥 무시해."
김하늘이 기미정을 노려보고 있는 채로 말했다.
"싫음 말고. 기대해라. 내가 재희 얼굴 예쁘게 만들어줄 테니까."
"핸드폰 줘봐."
기미정은 정말 개같은 년이었다.
신재희를 걸고 말하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소희정과 김하늘 사이를 벌리고, 그 틈으로 손을 내밀었다.
김하늘과 소희정은 말리고 싶어하는 얼굴로 날 돌아봤지만, 나는 결국 기미정의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찍어서 돌려주었다.
"우리 재희, 오늘 하루는 무사히 보내겠네."
"시발년이, 진짜..."
볼 일을 마쳤다는 듯, 바로 교실을 나서는 기미정이었다.
고미혜는 내 쪽과 기미정 쪽을 번갈아보더니, 자신의 가방을 챙기고 기미정을 따라나갔다.
/ / /
"미, 미정아. 신재준을 어쩌려고?"
기미정은 뒤를 돌아봤다. 뚱보 하나가 가방을 멘 채 뒤따라왔다.
기미정은 학교 올 때, 가방을 메고 오지 않았기에 짐이 없었다.
"어쩌긴. 그놈 이용해서 신재희, 그 시발년 괴롭혀야지."
"신재준은 남잔데, 괴롭히려고?"
기미정은 걷다가 멈췄다. 고미혜를 노려봤다.
고미혜는 깜짝 놀라서 두 눈부터 내리깔았다.
"너한테 맡겨줄까?"
"뭐, 뭐?"
"신재준 괴롭히는 거. 마침 네가 신재준하고 같은 반이기도 하고. 찐따 괴롭히듯이 괴롭혀 봐."
"아, 아니... 여자가 남자를 괴롭히는 건 좀..."
"그럼 내가 해야지."
"아, 아니야. 내가 할게."
"흐음, 그래? 안 하면 뒈지게 쳐 맞는다?"
"어, 어..."
"꺼져, 시발."
"어... 잘 가..."
기미정이 지나갈 때마다 학생들이 두려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게 기분 좋았다. 타인보다 자신이 위에 올라서있다는 우월감을 느꼈다.
'신재준... 그냥 붙잡아다가 신재희 불러내서, 둘을 동시에 괴롭힐 생각이었는데.'
신재희를 불러다가 마지막으로 정말 일진회에서 나갈 건지 물어보고, 그러겠노라 하면 신재준 앞에서 신재희를 때릴 생각이었다.
기미정도 지키는 선이 있기에 사실 남자를 때리는 건 내키지 않았다.
신재준은 살짝살짝 위협하고, 신재희는 묵사발을 내서 손맛 좀 즐기고. 그 다음에는 일진회는 관둬도 좋지만, 자신의 말에만 따르는 '노예'로 만들어버릴 생각이었다.
신재희가 일진회를 나간다고 했을 때는 자신을 떠나려고 구는 것 같아 기분이 팍 상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렇게 되면 '폭행'할 구실도 되고, 자신이 '독점'할 구실도 되었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시발. 심부름센터에서 고용한 년이 뭐가 두렵다고.'
처음에 일진회는 봄개학 첫 날인 오늘 신재희를 두들겨팰 생각이었다. 패기 전에는 신재희의 절친인 엄지혜랑 싸움도 붙이게 해서 우정도 깨버리고.
기미정한테 함부로 깝쳤던 정수린은 둘체도 아파트에 사는 요주의 찐따니까, 때리진 말고 '왕따'만 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던 일진회는 쫄아서 그걸 보류하기로 했다.
성연중 일진 애들이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그것은 신재희와 정수린이 아침에 왼쪽 뺨에 칼빵이 있는 여자랑 등교하는 사진이었다.
일진회라고 해서 모두가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약자에게는 한 없이 겁대가리를 상실하긴 했으나, 강자이거나 강자로 보이는 대상 앞에선 고개를 숙였다.
'조폭'이 딱 일진회 애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신재희와 정수린이 조폭과 연관되어있을지 모른다는 것에 일진회는 두려움을 느낀 것이었다.
'나야 잘 됐지.'
신재희를 때리는 것은 자신만이어야 했다.
일진회가 나서서 린치에 가하면, 다른 년들도 신재희를 때릴 것인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피시방 가자."
"고고."
툭.
"아씨... 헉."
한 여학생 무리가 지나가다가, 그중 한 명이 기미정과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 여학생은 기미정을 보자마자 경악했다.
"'아씨'?"
"미, 미안..."
여학생은 최대한 비굴해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기미정은 눈앞에 여학생이 누군지 몰랐다. 관심도 없었고. 그러나 그녀가 자신 앞에서 보여주는 비굴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기미정은 툭 부딪쳤던 자신의 어깨를 바라봤다.
"더러워졌네.'
블레이저에 뭔가 더러워진 것이 보이진 않았다.
"세탁비 5000원."
"어, 나 체크카드 밖에 없는데..."
"네 옆에 친구들 많잖아. 빌려, 병신아."
기미정은 여학생들 무리를 둘러보았다. 수적으로 그들의 머릿수가 많았지만, 워낙 기미정의 강함에 대한 소문이 유명했던 탓에 다들 쫄았다.
"도, 돈 있는 사람?"
"자..."
한 여학생이 지갑에서 5천원을 꺼냈다. 기미정한테 부딪친 여학생이 그 돈을 받아 기미정에게 내밀었다.
"병신들. 큭큭."
기미정은 돈을 받아다가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 여학생 일행이 욕을 하는 건지 귀가 간지러웠다.
'신재준...'
기미정은 귀를 파다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그의 번호를 확인했다.
<"시발년아, 뒤질래?">
당돌하게 자신에게 분노를 표현하던 소년.
'시발놈이. 볼라게 따먹히면 안 그러려나.'
'남자'라는 성별을 방어막으로 내세운 신재준의 꼴이 짜증났다.
만약에 그 자리에 수많은 학생들이 없었다면, 손이 나갔을 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 남자를 때려본 적은 없었지만.
'시발놈. 깝치니까 볼라 괴롭히고 싶네.'
기미정은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담배를 꺼냈다. 가끔 일진회 집합 장소로도 쓰이는 곳이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피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나른해지는 느낌에 취하다가 불현 듯 깨달았다.
'남자를 따먹고 싶다고? 내가?'
평생 살면서 무성애자였다가, 신재희의 귀여운 얼굴과 풍만한 폭유를 보고선 동성애자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신재희를 마구 괴롭혀서, 쾌락을 느끼는 이상성욕자.
여태껏 남자를 따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신재희'를 제외한 그 어떤 여자한테도 성욕을 느낀 적 없었다.
'왜지? 신재희하고, 신재준한테는 왜 성욕이 들까... 귀여운 얼굴... 아담한 체형...'
그 조건만으론 기미정을 발정시키게 할 수는 없었다. 뭔가 더 부족했다.
실제로도 몇 년 간, 가끔 신재준을 지나치듯 본 적 있었으나. 성욕이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 신재희나 신재준이나. 나한테 굽신거리지 않는 태도를 보였지.'
신재희는 지금에 와서는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 번 짓밟아주기 전까지 까불댔었다. 그 까불거리는 모습에 반했었던 거였다.
"큭큭큭..."
기미정은 새삼 깨달은 사실에 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양성애자'였다. 남자와 여자 둘 다 좋아하는 사람.
귀여운 얼굴에, 아담한 체형이고, 주제도 모르고 까불거리는 것이 '이상형'인 사람.
'동성애자 같은 봊 같은 것보다야, 양성애자가 낫겠지.'
기미정은 담배를 물고 히죽 웃었다.
'아까는 신재준 따로 불러서, 신재희를 유인할 생각으로 핸드폰 번호 딴 거였는데.'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봤다. 신재준의 번호가 저장돼있었다.
정확하게는 '통화이력'이 남아있었다. 신재준이 잠깐 자신의 번호에 통화를 걸었다가 바로 끊은 흔적이었다.
전화번호 저장 버튼을 누르고, 이름 란에다가 [노예2호]라고 적었다.
"후우..."
담배 연기를 내뿜고, 이번엔 [노예]라고 저장한 번호를 편집했다. 2호가 생겼으니, 신재희의 번호를 [노예1호]라고 고쳐적었다.
'개따먹어서 엉엉 울게 만들어주고 싶다. 시발놈이 어딜 깝쳐.'
알몸의 신재준이 제발 그만하라고, 까불어서 죄송하다고 비는 모습을 떠올리니 팬티가 젖어들었다.
남자와의 섹스를 상상하면서 몸이 발정한 것이 처음이었기에 신선한 기분이었다.
알몸의 신재희를 본나 패고 난 뒤에, 보지를 마주대고 비비는 상상을 떠올리며 최초로 발정했던 옛날처럼... 기미정은 짧게 오르가즘을 느껴 눈앞이 새하얘졌다.
'쌍으로 따먹어야지. 시발것들.'
물론, 생각만 그렇게 하지 실제론 행동에 나서지 않을 거였다.
아무리 싸움을 하고 다녀도 아직 '학생'이니까 법적인 처벌까지는 보통 하지 않는 걸 알기에 마음 놓고 주먹질을 하고 다녔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간'은 잘못했다간 소녀원 신세를 질 확률이 높았다.
'염병... 신재희는 '동성애'가 싫어서 안 따먹은 건데. 신재준은 '법' 때문에 못 따먹겠네.'
기미정은 신재희를 때리면서, 그리고 신재희와 보빔을 하는 상상을 하며 흥분하면서도. 동시에 동성애를 거부하는 정신을 갖추고 있었다.
이 세계는 여자가 강간을 당하면, 그 피해자는 그냥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았다.
기미정은 그렇기에 마음 놓고 신재희를 강제로 따먹어도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동시에 동성애를 거부하는 자아도 있었기에 신재희를 강간하는 행동을 직접 하진 않았다.
'신재준... 남자친구로 만들어봐? 생각해보니 괜찮은데...'
그와 사귀고 합의 하에 따먹으면 강간이 아니게 됐다.
'마침 신재준, 이 놈. 신재희를 위해서 뭐든지 할 것만 같던데...'